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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학력/ 베테랑이 이긴 네 가지 비결

Bawoo 2015. 9. 7. 22:06

 

 

베테랑의 학력

 

'베테랑'.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을 뜻한다. 비슷한 말은 숙련자, 전문인. 어원인 프랑스어로는 고참병이나 노장 혹은 40대 운동선수를 가리킨다.

1973년생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이다. 스무 살 때 영화판에 뛰어들어 23년째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의 영화 ‘베테랑’은 5일까지 1165만 명이 봤다. 개봉 32일만에 이룬 성과다.

그런 그가 일 년에 몇 번씩 받는다는 질문이 있다. 고졸자 학력으로 어떻게 성공하게 됐냐는 것이다. 5일 열린 '진로레시피 별별 진로콘서트'에서도 그 질문이 나왔다.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학부모와 자녀 200여명을 초청한 자리였다.

류 감독은 대답했다. "그런 질문이 없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를 세우기 위해) 내 앞에 뭔가를 세우면 그것들이 무너질 때 나도 무너진다." 그가 말하는 '뭔가'란 학벌 같은 것들이다. 사회생활에선 흔히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어려울 때 어느 학교 출신, 어느 직장 소속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다.

그러나 류 감독은 타이틀 없이 베테랑이 됐다. 지금의 삶을 일궜다. 그의 이름을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치면 결과에 '학력'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제목과 수상 경력이 그의 프로필을 채운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10개월 후 아버지를 여의었다. 청소년기 내내 그는 낡은 필름을 틀어 화면이 지글거리는 동시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탈출구가 없던’ 스무살 청년은 독립영화협의회 필름워크숍에 갔다.

거기서 그는 스물세 살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자신이 딴 ‘고려대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에 아랑곳없이 그를 선택했고, 아내가 됐다. 영화 ‘베테랑’ 제작사인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다. 두 사람이 세 자녀를 낳고 천만 관객 영화를 낳는 과정에서 학벌이 한 역할은, 없다.

왜 우리 학부모들은 학력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지 못할까. 독일 노동연구기구(IZA)의 연구원, 귄터 슈미트는 한국의 학력주의가 ‘보험적 동기’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높은 사회적 안정과 높은 임금을 보장하는 가장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란다. 시민단체 ‘오픈랩’이 번역해 2일 슬로우뉴스에 올린 이 논문은 페이스북으로만 1000번 넘게 공유되며 토론을 일으키고 있다.

슈미트는 학력주의가 한국 청년 실업의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직장 업무와 연결성이 떨어지는 학력은 사회적 낭비일 뿐 아니라 불평등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해법은 ‘사회안전망’ 보강. 슈미트는 “사회안전망이 튼실하다면 청년들은 구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우리는 경제, 사회 변동성이 커지면서 한 번 취직하면 정년이 보장되는 ‘정주(定住) 노동시장’이 줄어들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대신 취업과 재교육, 퇴직이 반복되는 ‘이동 노동시장’이 커졌다. 진로콘서트 말미에 교육부의 문승태 진로교육정책과장은 "지금 직업의 90%가 20~30년 후 없어질 것"이라며 "변화하는 세계에 대처하는 적응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스웨덴과 독일이 교육-노동(직장)-복지의 삼각망을 구축해 비숙련자를 숙련자 즉 ‘베테랑’으로 키워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안전망이 있는 사회라면, 류 감독이 ‘그 학력으로 어찌 성공했냐’ 질문 받을 일은 더는 없을 것이다.

 

머니투데이 이경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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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이 이긴 네 가지 비결

 

정신병원 병동을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40대 여성 환자가 자신을 “XX그룹 OOO회장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진료부장은 병실을 나오며 말했다. “망상 장애입니다. 예전엔 아버지가 대통령, 안기부장(현 국정원장)이란 환자들이 많았어요. 요즘은 재벌 회장들이 등장합니다. 사회적 권력이 옮겨감에 따라 대상이 달라지는 거죠.”

 영화 ‘베테랑’이 상정한 악역도 정치권력이 아니다. 광역수사대 형사 서도철(황정민)은 범죄를 저지른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체포하기 위해 상부의 압력과 싸워 나간다. 이 영화를 단순히 재벌과 경찰의 싸움으로 국한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세상의 을(乙)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떻게 갑(甲)을 이길 수 있는지 보여준다. 비결은 다음 네 가지다. (※스포일러 있음)

 1. 약점이 적어야 버틸 수 있다. 자신의 욕망부터 관리해야 한다.

 서도철의 수사를 막기 위해 경찰 수뇌부가 감찰반을 보낸다. 서도철이 버텨낼 수 있는 힘은 그와 아내가 명품 백과 5만원권 다발의 유혹을 뿌리친 데서 나온다. 서도철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얼굴·체면)가 없냐?”고 반문한다.

 사실 우린 돈이 없으면 가오도 없는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 나는 가오를 자존감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자존감은 스스로에게 ‘쪽 팔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욕망에 무릎 꿇으면 자존감은 무너진다. 약점을 쥔 자의 노예가 되고 만다.

 2. 갈고 닦은 기량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프로는 변칙도 구사할 줄 안다.

 서도철 팀이 조태오 수사에서 배제된다. 형사들의 진심에 마음이 움직인 총경(천호진)이 넌지시 말한다. “난 분명 주부도박단 잡아오라고 했다.” 수사팀은 도박 단속을 내세워 파출소에 대기하다가 팀원의 112 신고에 따라 조태오의 마약 파티 현장을 급습한다.

 올림픽 정신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현실은 프로들이 뛰는 월드컵이다.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만으론 상대를 이길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왜 진실이 통하지 않느냐”며 징징거리는 모습만큼 보기 힘든 것도 없다. 반칙에는 변칙으로 맞서야 한다. 변칙은 원칙 없는 꼼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3. 참고 또 참는다. 승부는 명분의 크기에 달렸다.

 드디어 서도철이 거리에서 조태오와 맞붙는다. 시민들이 스마트 폰을 들고 격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서도철은 조태오에게 연신 두들겨 맞는다. 피투성이가 된 서도철이 주먹을 쥐고 일어선다. “지금부터는 정당방위다.”

 한두 번 맞는 것으로 명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인정할 때까지 참다가 반격에 나서야 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그래야 ‘쌍피(쌍방 피의 사건)’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켜보는 이들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다.

 4. 혼자선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가 필요하다.

 주인공은 서도철만이 아니다. 주저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오 팀장(오달수) 같은 동료들이 없었다면 조태오를 법정에 세우지 못했다. 서도철을 때려눕힌 뒤 도주하려는 조태오 앞을 가로막는 ‘아트박스 사장’(마동석)도 계셨다.

 개인기로는 끝까지 갈 수 없다. 우리의 희망은 ‘온 힘을 다해 일하면 자기 주위의 풍경이 변한다’(만화 『중쇄를 찍자』)는 데 있다. 진심으로 원하면 주위의 양심들도 공감할 것이다. 돈도 없고, 가오도 없어서 더 정의로울 수 있는 그들과의 리그를 짜는 게 승부처다. 서로의 작은 차이를 넘어서려면 절박해야 한다.

 ‘베테랑’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관객이 1100만을 넘어선 건 한국 사회가 얼마나 정의에 목말라 있는지 말해 준다. 우리에겐 “‘베테랑’에 영감을 준 진짜 베테랑들”(류승완 감독 인터뷰)도 있다. 류 감독 말처럼 “침몰하는 배에서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힘썼던 선생님”도 있었고, 메르스에 맞서 환자들 생명을 지켰던 간호사도 있다.

 이제 분명한 사실은 을들이 싸움의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했고, 그들 속에도 베테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패배주의에 빠져 있을 수 없다는 열망들이 조금씩 결집돼 가고 있다는 것이다.

* 중앙일보 - 권석천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