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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관한 글>사람 불러야 할 이유(송호근)

Bawoo 2015. 10. 27. 12:17

“30~40명의 필진을 구성하면 내년 말까지 완료할 수 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지만, ‘저게 될까?’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역사학자 2000여 명이 집필 거부 의사를 밝혔다면 가히 역사전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힘줘 말한 ‘올바른 역사’ ‘균형 잡힌 역사’는 통일시대를 대비해 미래 세대를 키울 진취적이고 반듯한 역사로 필자는 이해한다. 그런데 ‘올바른 역사’란 누구에게도 신기루다. 2천 년의 역사,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에서 옥석을 가리고 연결논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신화와 역사 사이를 오간다. 일본 군국주의는 일왕을 『고사기(古事記)』에 나오는 천황신화와 연결하는 순간 발생했다. 광기의 행진! ‘정치화된 역사’의 위험이 그토록 크다.

 그런데 ‘학계가 엮은 역사’도 문제투성이라는 것이 발단이다. 한국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들고 ‘음지의 역사’로 채색한다는 집권세력의 문제의식은 차분히 따져봄 직한데, ‘국정!’을 결정하는 순간 스스로 정당성을 훼손했다. 결과는? 본질적 쟁점들이 저 지긋지긋한 이념 회오리로 증발됐다. ‘학문의 자유’를 생명보다 아끼는 역사학자들의 예민한 원칙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지난주 원로 사학자 20여 명이 조선 사관(史官)의 지조론을 들고 나와 김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역사의 정치화’를 규탄했고, 결국 여론이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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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지난해 초 칼럼 ‘아직은 달빛’에서 검토했듯이 정치권의 공방과 학계의 대립은 실제보다는 훨씬 과장됐다. 그러나 아니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교육시장을 장악한 7종의 한국사 교과서는 ‘부실하고 편향적’임에 틀림없다. 조선은 못난 나라, 근대 개혁은 실패했고, 일제 강점기엔 지주·상공인·지도층이 대부분 친일파였다. 안중근의 쾌거는 설명이 부족하고 의병운동은 쪼그라져 있으며 사회주의, 노동·농민운동이 민족 정통성의 보루인 듯 보인다. 현대사에선 시각의 차이가 더욱 뚜렷해진다. 절박한 심정으로 보수진영이 개발한 교학사 교과서는 ‘식민치하에서도 근대 발전이 이뤄졌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 있는데, 민중 진영의 포화를 맞고 죽었다.

 역사학자들의 성향은 대체로 보수적이다. 그런데 왜 민중투쟁에 비중을 실은 교과서가 대종일까? 약 2할 정도인 진보학자들이 세 확장을 위해 선택한 게 사회운동으로서 교과서 쓰기다. 청소년 교육 시장을 파고들었고,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일종의 사명감의 발로였다. 이제는 중견 학자가 된 386세대 사학자들의 활약이 주효했는데 지지부진한 민주화에 대한 보상심리, 지배집단의 허술한 정당성을 철회하려는 학문적 실천이었다. 역사학과 사회과학에서 민중사관의 단점과 한계는 이미 밝혀졌고 이론적 설득력도 벌써 쇠퇴했음에도 말이다.

 더 중대한 문제는 부실(不實)이다. 통합교과서란 2천 년 역사를 종합적·객관적으로 다룬 ‘좋은 역사책’을 말한다. 누군들 그걸 원치 않으랴만 역사학자에게 이 기준은 천형이다. 영역별·시대별로 쪼개진 전공 주제를 평생 세공(細工)하는 학문이 역사학이다. 식민지기조차 전공이 수십 개고, 사관과 신조가 다른 판에 통사(通史)는 불가하다. 동료교수 논문을 읽을 수는 있지만 쓰라면 욕 뵈기다. 두어 명이 집필하면 부실이 된다. 특급 학자는 이론을 만들고 일류 학자는 사료에 파묻힌다. 학계에 길이 남을 특급 저서가 목표인 이들에게 교과서는 안중에도 없다. 속사정이 이러한데, 집필진이 원치 않으면 명단을 밝히지 않는다? 얼굴 없는 교과서를 누가 신뢰할까. ‘집필 참여가 곧 어용’으로 치부될 상황에서 의기충천한 일류 학자를 30~40여 명 초빙할 수 있을까? 혹시 자원방래해도 국가가 은근히 제안하는 ‘올바른 역사’ 기준에 동의할지 의문이다.

 부실·편향 교과서는 차제에 수정돼야 한다. 사람을 불러야 할 이유다. 그것도 여러 진영에서 특급· 일류 학자를 초빙해 깊이와 균형을 되살려야 한다. 그런데 국정이라는 정치화된 프레임이 걸림돌이다. 성취와 좌절, 오욕과 영광이 응어리진 역사적 경험지층을 가감 없이 보여줄 때 객관적 미래 지평이 열린다. 그래도 무리수를 두겠다면 ‘검인정 같은 국정’을 생각해봄 직하다. 첫째, 시한을 2년 이상으로 늘리고 적어도 2권 이상을 기획하는 방법이 있다. 기존 진보 교과서와 경쟁시켜 시민들의 자율적 선택권을 살리면 좋다. 둘째, 제발 특급 학자들을 불러라. 각 분야에 누구나 존경하는 학자들이 있다. 얼핏 김용섭, 한영우, 조광, 송재소, 조동걸, 이태진, 손정목, 노태돈, 김용구, 신용하, 임형택 같은 원로 학자들이 생각나고 중립적·객관적 사관을 견지한 중견 학자들이 다수 있다. 이게 안 되면 집필진을 밝힌 국사편찬위원회 간행본을 경쟁 시장에 하나 추가할 수 있다. 선진국 교과서는 대학교재 수준이다. 아무튼 부실 교과서가 부실 역사교육을 만드는 이 참담한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출처: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 사람 불러야 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