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이별은 없다. 타인은 결과만 보기 때문에 '쉽게 헤어졌다'느니 '참을성이 없다'느니 판단하려 들지만, 누가 이별을 쉽게 하겠는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작한 인연을 끊을 때에는 백번천번 더 생각해봤을 거다. 독해서 헤어지는게 아니라 출구없는 미움과 갈등을 견뎌낼 강한 정신력이 없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이별일지도 모른다. 영화 '추억'(1973년작)은 그야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 마음아픈 이별이야기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열혈 여대생 케이티(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는 엄친아 하벨(로버트 레드포드)은 대학 동기다. 영화의 첫장면은 두 사람의 사뭇 다른 삶을, 앞으로 펼쳐질 다른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케이티는 반전 전단지를 돌리며 목청껏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만 하벨은 여유있게 스포츠를 즐기며 캠퍼스를 누빈다.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은 졸업 후 우연히 마주치고 헤어지고 다시 마주치는 과정 속에서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진다. 정치의식이 강한 케이티지만 대학때부터 좋아했던 하벨 앞에서는 수줍고 여린 여자였다. 뼈속부터 다른 환경과 다른 지향점을 갖고 있지만 하벨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케이티는 자신의 모습을 바꿔나간다.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한 두 사람은 아이도 낳고 누구보다 행복한 부부로 살아가던 중, 메카시즘(1950~1954년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 휘몰아치게 되고 극과 극으로 갈린 두 사람의 정치적 성향은 결국 폭발하고 만다. 삶을 즐기고 친구들과의 여유로운 친목을 좋아하는 하벨과 사회를 옳은 길로 바꿔나가야한다는 신념이 강한 케이티의 치열한 논쟁은 결국 서로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고 마침, 시나리오 작가로 주목받는 남편의 앞날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해져 두 사람은 이별을 선택한다. 그리고 몇년 후 하벨은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의 거리에서 열성적으로 원폭반대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는 케이티를 본다. 비록 헤어졌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두 사람은 벅찬 마음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예전처럼 햐벨의 앞머리를 쓸어올려주기 위해 손을 내미는 케이티. 그리고 그 손을 잡아 포옹하는 하벨. 짧지만 강렬한 포옹에는 여전한 사랑과 그리움, 안타까움, 슬픔, 진심으로 서로가 잘되길 바라는 격려가 절절히 담겨있다.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사랑, 그러나 그 사랑하는 사람이 빠져버린 현실과 미래….두 사람은 다시 헤어진다. 하벨은 멋진 트렌치 코트가 잘 어울리는 고급 호텔로, 케이티는 자신의 신념을 펼칠 찬바람이 부는 거리로….
내가 여자라 그럴까? 생활고까지 떠안고 살아가면서도 1940년대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가는 케이티가 안쓰럽고 자랑스러워서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하벨이 조금 얄미웠다.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더 많이 변해야했고 '나답지 않게'살 수밖에 없었던 케이티를 하벨이 좀 너그럽게 품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러나 두 번, 세 번, 네 번, 이 영화를 볼수록 두 사람의 이별이 와닿는다. 어쩌면 하벨도 열정가득한 케이티가 가장 케이티답게 사는 모습을 사랑했고 응원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에 대해 몇가지 깨달은 게 있다. 결국,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랑도, 좋은 이별도 한다는 것. 이별했다고 사랑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것….아름다운 주제가 'the way we were'
참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 출처:서울경제 - 조휴정 KBS PD(KBS 1라디오 '빅데이터로 보는 세상'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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