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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가 희망하는 역사 교과서

Bawoo 2015. 11. 10. 11:03

‘꼰대와 멘토의 차이’라는 유머가 있다. ①둘 다 충고를 한다. 멘토는 남이 요청하면 해주고, 꼰대는 자기 마음대로 충고한다. ②멘토는 미래를 말하는데, 꼰대는 과거만 떠벌린다. ③멘토는 자신의 실패 사례도 소개하는데, 꼰대는 “내가 왕년에는~”의 성공 신화만 말한다. 오늘 꼰대로 몰릴 각오를 하고 역사 교과서를 다시 이야기한다. 나는 국정화나 검인정보다 더 본질적 문제는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라 생각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이 있다. 미국 MIT의 대런 애스모글루(경제학)와 하버드대 제임스 A 로빈슨(정치학) 교수가 성공한 나라와 실패한 나라를 비교 분석한 책이다. 아프리카의 가나와 한국은 똑같이 식민지에서 해방됐고 유엔 사무총장(코피 아난과 반기문)을 배출한 나라다. 이 책은 묻는다. 그런데 왜 가나는 1인당 국민소득이 850달러이고, 한국은 2만8000달러인가. 이 책은 더 생생한 사례를 든다. 바로 노갈레스다. 미국과 멕시코에 걸쳐 있는 두 도시 이야기다.

 미국이 1853년 애리조나와 뉴멕시코를 매입하면서 노갈레스 한가운데 국경이 생겼다. 똑같은 인종과 똑같은 지리적 환경, 똑같은 문화를 가진 두 도시의 운명은 완전 딴판이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노갈레스는 1인당 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안정된 소도시다. 반면 담장 너머 멕시코 소노라주의 노갈레스는 소득 1만 달러에다 범죄가 판친다. 이 책은 그 비밀을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에서 찾으면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한 사회의 지배층과 엘리트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폐쇄적인 경제정책을 고집하고, 부와 권력 세습에 급급하며, 꽉 막힌 정치제도를 통해 국민의 참여를 막은 나라들은 모조리 실패한 국가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미화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부끄러운 역사로 여기는 것도 자학사관이 아닐까 싶다. 이승만·박정희 등 역대 지도자들은 분명 공과를 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기준에 따르면 자신들의 이익만 챙긴 대통령이 결코 아니다. 부와 권력 세습에만 집착한 지도자와도 거리가 있다. 두 교수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른바 ‘포용적 체제’로 분류한다. 반면 정반대의 ‘착취적 체제’도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다. 두 교수는 “그곳은 권력을 세습하고, 주민들을 착취하고 핍박하며,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바로 북한이다.

 물론 지배 계층만 우리 현대사를 구성한 게 아니다. 1960~80년대 눈물겹게 미싱을 돌린 저임금 여공들도 역사의 주인공이다.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 역시 빼놓을 수 없다. 66~87년 저 멀리 스페인 라스팔마스항까지 나가 9억 달러의 참치를 건져 올린 수만 명의 원양선원도 잊어선 안 된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78년 이후에만 141만여 명이 중동 등지에 나가 피땀을 흘렸다. 나는 ‘민중사관’ 학자들이 이 민중의 역사도 감안했으면 좋겠다. 무조건 4·19,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저항에만 초점을 맞출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역사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서울시장 시절 호프집에서 들려준 체험담이 기억난다. “내가 베트남·중동 건설현장을 누볐잖아. 그때 우리 근로자들 떠올리면 눈물 나지.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엄청난 축복이야. 한국의 50~60대(지금 60~70대)가 집단적으로 글로벌 체험을 한 거지. 미국·유럽 유학만 외국물 먹는 게 아니야. 먼 이국 하늘 아래서 한국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지. 이들이 우리 사회의 흔들리지 않는 허리가 됐고, 한국 현대사를 발전시킨 게 아닐까 싶어….”

 참고로, 나는 5·16을 쿠데타로 보는 쪽이다. 하지만 국정이든 검인정이든 역사 교과서가 근현대사의 명과 암을 낱낱이 기록했으면 한다. 또한 우리 국사학계도 세계 역사학계가 한국 근현대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한 번쯤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과거의 식민사관도 문제지만 이른바 ‘민중사관’과 ‘분단사학론’도 우물 속 낡은 프레임 아닐까 싶다. 지난 71년간 한국은 유례없이 발전한 드라마를 쓴 나라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는 기꺼이 꼰대가 되어도 좋다.

이철호 논설실장

[출처: 중앙일보] [이철호의 시시각각] 꼰대가 희망하는 역사 교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