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키바라 야스마사 榊原康政 | |
사카키바라 겐지 수레바퀴 | |
제1대 다테바야시 번 번주 1590년 ~ 1606년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1548년 도요타 |
사망 | 1606년 6월 19일 다테바야시 |
관위 | 종사위하 식부대보, 증 정사위 |
막부 | 에도 막부 노중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번 | 다테바야시 번 |
씨족 | 사카키바라 씨 |
자녀 | 오스가 다다마사, 사카키바라 다다나가. 야스카쓰 등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일본어: 榊原康政, 1548년 ~ 1606년 6월 19일)는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도와 우에노 전투 등의 일본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당시, 히데요시를 조롱하였으나, 오히려 히데요시에게서 칭찬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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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4천왕 중 한 사람으로 무(無)자가 적힌 깃발을 들고 전장을 지휘하였다.
1548년, 사카키바라 나가마사의 차남으로 출생한다.(차남인데도 형을 제치고 가독을 상속받았는데,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둘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니였다고 한다)
1563년, 미카와에서 잇키가 일어나면서 첫 출진을 하여 활약한다.(오케하자마 전투가 첫 출진이라는 말도 있는데, 야스마사가 13살 때 이에야스를 모시기 시작했는데, 이 년도가 오케하자마 전투랑 일치한다. 다만 시동으로 발탁 된 것이라 원복도 하기 전에 첫 출진을 했을 것이라 보기엔 어렵다고 생각됨.)
1566년, 혼다 타다가츠와 함께 직속군 선봉 부대장으로 임명된다.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혼다 타다가츠와 함께 활약하여 병력적으로 열세인데도 불구하고 아사쿠라 가문을 격파한다.(아사이 나가마사에서 적음)
이후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각지에서 활약한다
1582년, 혼노지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이에야스를 호위하여 본성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이에야스는 시바타 가츠이에와 함께 노부나가의 삼남인 오다 노부타카를 지지하면서 반 히데요시를 내세운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바타 가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하면서 몰락하자 이번엔 노부나가의 2남인 오다 노부카츠를 지지하여 반 히데요시를 계속 이여간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전 에 이에야스의 명으로 히데요시에게 욕설을 선사한다. 히데요시는 이를 보고 매우 분노하여 '야스마사를 산 채로 잡아 내앞으로 데리고 온 자에게는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은상은 바라는 대로 주겠다고' 라고 발언하였다고 한다.(욕설의 내용은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덕분에 출세한 가신주제에 지금은 그 주군의 아들(여기선 2남 오다 노부카츠를 뜻함)을 상대로 활을 쏘고 있다. 이는 팔역의 죄(율령제 시대에 가장 무거운 죄로 만약 저지르게 된다면 기본이 사형, 감형자체가 없다)에 해당된다. 비도한 히데요시와 같은 편에 서는 자에게는 반드시 천벌이 내릴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전술에서 말려 오히려 패배해버린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츠와 화친함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싸울 명분을 없애버린다.
1586년, 결국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천하를 인정하고 굴복한다. 히데요시는 여동생인 아시히히메가 이에야스에게 시집을 보내고
이 때 사자로 야스마사가 파견되었다. 코마키 전투 때 히데요시에게 엄청난 굴욕을 준 야스마사였지만, 히데요시는 '코마키 전투 때는 자네의 잘린 목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네의 충성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네' 라면서 언급하고 야스마사를 용서한다.(관직까지 받고 간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면서 호조 가문이 개역당하고(240만석이 1만석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관동으로 전봉되자 10만석의 영지를 받는다.
이후로는 일선에 물러나고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히데타다를 보좌하기 시작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자 히데타다와 함께 3만 8천 명을 이끌고 세키가하라로 향하지만, 우에다성에서 발목(제 2차 우에다성 합전)이 잡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참여하지 못한다.(원래는 9월 15일날 합류하기로 예정되어있는데, 20일날 도착)
이 때 이에야스는 매우 실망하여, 히데타다가 변명을 하기 위해 이에야스를 만나고자 했지만 면회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야스마사가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여 이에야스를 설득하자 이에야스가 분노를 풀고 결국 히데타다를 만났다고 한다.(이 때 히데타다는 매우 기뻐하여 자신의 가문이 있는 한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야스마사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사실 2차 우에다성 합전에서 발목이 잡힌 큰 원인은 야스마사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일단 히데타다 군중에서 군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야스마사 밖에 없었음으로 실질적으로 야스마사가 군 지휘를 했거나 최소한 조언이라도 해야하고 야스마스가 충분히 그런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에다성에서 발목이 잡혔으니 야스마사의 탓이 크다는 것, 참고로 우에다 성은 사실 공격할 필요도 없는데 괜히 공격해서 함락도 못시키고 시간만 버린 것이다.)
여하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지참(전투에 늦게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책을 받아 아무론 논공행상을 받지 못한다.
이후, 문치파가 대두하자 정계에서 소외받기 시작한다.
1606년, 병으로 몸이 위태로워지자 히데타다와 이에야스가 각각 사자를 파견해 안부를 묻는다. 이 때 야스마사는 명확한 차이를 두는데,
히데타다의 사자에게는 이불에서 나와 예복을 차려 입고 감사의 말을 전했지만, 이에야스의 사자에게는 이불에 누운 채로 '장이 썩어서 추해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혼다 타다가츠에서 언급함) 이후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59세로 사망한다.
여담
1.사실 야스마사는 혼다 타다가츠와는 달리 전형적인 무인이 아니였고, 히데타다와의 관계를 고려해보면 타다가츠와는 달리 완전히 소외되지는 않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노신이 정치에 관여하는건 망조'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은퇴를 하였다.(다만 이는 문치파의 대표인 혼다 마사노부가 싫어서 이런 발언을 하고 물러섰다는 설도 있다) 나름 학식이 있던 인물로 도쿠가와 가신단 중에서 능필가로 알려진 무장으로 이에야스의 글들을 자주 대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막부 수립 후, 관동지방에 다이묘를 배치할 때도 그 틀 제시한 것이 야스마사라고 한다.
2.다만 소외되지 않는다 쳐도 증오하던 혼다 마사노부 밑에서 일 할 것이 뻔 했기에 그 꼴 보기 싫어서 은퇴 하였을 수도 있고, 스스로도 문치파라 보기엔 혼다 타다가츠와 같은 무공파로 여겼기에 은퇴했을 수도 있다.
3.에도 시대 학자인 아리이 하쿠세는 야스마사를 매우 높히 평가 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소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이미 무공파의 역활은 끝나고 혼다 마사노부 같은 문치파가 중추가 되어 활약을 해야기 때문에, 문치파와 대립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평하며 '그 당시의 무장으로는 특별한 일이었다'라고 한다. 실제로 히데요시 사후, 문치파인 이시다 미츠나리와 무공파인 칠본창이 대립함으로 히데요시 가문 멸망에 기여한 것을 보면 이 행동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야스마사는 죽기 직전에 장이 썩어간다는 발언만 제외하면 혼다타다가츠에 비해서 깨끗하게 지낸 편.
4.야스마사의 야스는 이에야스의 야스에서 따온 것.
5.사카키바라 쪽 기록에서는 1601년에, 이에야스가 히타치 25만석으로 전봉시키려고 했지만 야스마사가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세키가하라 전투 논공행상으로 주려고 했던 보상이라고 하는데, 야스마사가 거리상 문제로 거절했다고 한다.
6.신장의 야망에서는 천도에서는 나름 A급 무장으로 도쿠가와 가문 주력 중 한 사람인데, 천도에 오면서 통, 무 80대로 줄어들고 전법도 그냥 저냥한거 들고 오면서 B급에서 좋은 무장으로 격하되었다. 전법도 평범. 특성 중에 위타천이 존재하는데, 이건 좀 계륵같은 전법이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정도인 특성. 이동속도 증가+폭설 등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인데, 사실 초장거리를 이동하지 않는 이상 크게 체감되지는 않는 특성.
그외에도 이렇다할 특성이 없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맹공,맹장,배수 가 끝,,,,,,(타다가츠는 그나마 화살겸비라도 있지,,) 신기하게 외교술을 가진게 특이한 점.(배수가 약간 희귀하긴 한데,,, 그렇게 좋은 특성은 아니다. 일단 조건 자체가 너무 열약하다..)
7. 그렇다 쳐도 지성과 본성이 많아 진 창조에서는 초반기에는 지성급 성주, 중반 넘어가서 영지가 넓어지면 그래도 본성급 성주로 쓰여 나름 주력 무장이긴하다. 솔직히 성이 많아서 통솔하고 무력이 80이상이면 본성급 성주 무장으로 쓰기에도 아깝지는 않은 편. 약소 가문에서는 장수가 없어서 60 정도 장수를 쓰기도 하니깐,
8.사천왕 중에서는 애매한 포지션, 그나마 전투에서는 사카이 타다츠구보다는 좋지만, 나머지 2 사천왕인 혼다 타다가츠나 이이 나오마사에게 밀린다. 창조와서는 혼다 타다가츠가 많이 민간인화 되긴 했지만, 그래도 무력과 특성에서 차이가 나서 밀린다.
9.기록에 따르면 무용은 타다가츠에 미치지 못하지만, 군을 지휘하는 능력은 타다가츠를 능가하고, 이이 나오마사에 필적한다고 한다.(하지만 창조에서는 나오마사가 가장 높고, 타다가츠랑 야스마사는 같음...) 또한 이이 나오마사와도 굉장히 친했다고 한다.
[출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작성자 블랙모아
Later life
Yasumasa received the 100,000 koku fief of Tatebayashi han following the Tokugawa victory at the Battle of Sekigahara, which remained in the family for a few generations. Yasumasa himself died in 1606, at the age of 59, and is buried at Zendoji Temple in Tatebayashi, where his grave still st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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