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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식민사학 원조 중 1인>이나바 이와키치(일본어: 稲葉 岩吉)

Bawoo 2015. 10. 15. 22:09

이나바 이와키치(일본어: 稲葉 岩吉, 1876년 ~ 1940년)는 일본의 역사학자이다. 전공은 조선사, 만주사. 원래 성은 고바야시(小林)이며, 호는 군잔(君山)이다.

도쿄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중국으로 건너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의 통역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부터 1915년까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역사조사부에서 《만주역사지리》 편찬에 참여했고, 1915년에 육군대학 교관으로 취임했다. 1922년 12월 28일, 조선사 편찬위원회 위원 겸 간사로 임명되었고, 총독부 수사관, 조선사 편수회 간사직을 맡아, 《조선사》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1937년,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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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주무자로서 만선사관을 전개했다. 히토쓰바시 외어학교[一橋外語學校]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화베이[華北] 지방에 유학했다. 러일전쟁 때에는 통역으로 종군했다.

1909년부터 7년간 만선지리역사연구실에서 근무한 후,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이 되어 만선사관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가 되었다. 만선사관은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묶어 대륙사에 부속시키는 것으로 한국사의 주체적인 발전을 부정하고 타율성을 강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는 당시의 중국·한국·만주의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관점으로 접근했다. 이러한 학풍은 당시 일본의 정통 동양사학계에서는 이단시되었으나 한국사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그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여 고대의 조선 해안지역에 일본의 식민지가 존재했었다고 주장했고, 3·1운동 이후에는 만선사관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여 단군의 존재를 부정했다. 〈만선불가분의 사적 고찰〉에서는 한국의 고대 왕족은 모두 중국이나 만주의 패잔국에서 연유한 것으로, 한국과 만주는 태고 때부터 민족·영토·경제 면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연구들은 한국사의 주체적인 발전과 한국의 독자적인 영역의 존재를 부인하고, 나아가 일제의 만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서로는 〈만주발달사 滿洲發達史〉·〈지나사회사연구 支那社會史硏究〉·〈조선민족사 朝鮮民族史〉 등이 있다.<다음백과>

 

<관련 글 보기>

[이덕일의 천고사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한국일보

 

중국이 동북공정에 박차를 가하던 1997년 요녕성(遼寧省) 서쪽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고 쓴 봉니(封泥)가 발견되었다. 봉니란 죽간(竹簡)이나 목찰(木札) 등에 공문서를 써서 상자에 넣어 묶은 후 끈의 매듭을 진흙으로 봉하고 도장을 찍은 것을 뜻한다. 임둔이란 한(漢) 무제(武帝)가 서기전 108년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수도 부근에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이다.

 

일제는 한국사가 식민지로 시작했다고 강변하기 위해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고, 낙랑군은 평양, 임둔군은 함남과 강원 북부 일대로 비정했다. 따라서 임둔태수장은 함남이나 강원도에서 나와야 하는데, 요녕성 서쪽의 옛 성터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 사학계가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바라보는 정상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다면 “임둔군의 위치가 요녕성 서쪽으로 드러났다”며 일제히 환호했어야 했지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한민국에 불리한 사료가 나오면 일제히 환호하고, 대한민국에 유리한 사료가 나오면 일제히 침묵하는 카르텔이 작동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 일대의 고대 무덤군에서 또 하나의 한사군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국신문망 등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후한(後漢), 북조(北朝), 당(唐), 요(遼)나라의 묘 등 129기의 고분이 있는데, 이중 북조(北朝) 무덤에서 동위(東魏) 원상(元象) 2년(539) 사망한 ‘한현도(韓顯度)’가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 출신이라는 벽돌 묘비가 발견된 것이다. 그간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와 그 한국인 후예 식민사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평안남도 대동강 남단의 대동면 토성리(土城里) 일대라고 비정해왔는데, 천안문(天安門) 남서쪽 20여km 지점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식민사학계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대동면 토성리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병도 박사가 “일제 초기로부터 일인(日人) 조사단에 의해서 대동강 남안인 (대동면)토성리 일대가 낙랑군치(樂浪郡治)인 동시에 조선현치(朝鮮縣治)임이 그 유적ㆍ유물을 통하여 판명되었다”(‘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라고 쓴 것을 지금까지 추종한 결과이다. 이병도 씨가 말한 일본인 조사단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를 뜻하는데, 그가 대동강 남쪽에서 일부 중국계 유적ㆍ유물을 찾았다고 주장하자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이곳을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라고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식민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으면서 낙랑군이 멸망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위서(魏書) ‘세조 태무제(世祖太武帝) 본기’에는 그 119년 후인 “연화(延和) 원년(432) 9월 을묘에 거가(車駕)가 서쪽으로 귀환하면서 영주(營丘) 성주(成周)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현도(玄?) 6군 사람 3만 가(家)를 유주(幽州)로 이주시키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19년 전에 멸망했다는 낙랑군이 119년 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태무제가 고구려 강역 수천 리를 뚫고 평양까지 가서 낙랑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은 이상 낙랑군은 중국 땅에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때 고대 역사서 및 지리지를 토대로 작성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 북쪽 40리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조선성이 낙랑군 조선현을 뜻함은 물론이다. 하북성 노룡현 일대에 있던 낙랑군 조선현이 고구려의 잇단 공격으로 약화되었다가 북위(北魏) 태무제가 북경 부근으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다.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위서(魏書)’ ‘북사(北史)’ 같은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계속 이름이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북경시 북쪽 순의구(順義區)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적했듯이 지금도 고려진(高麗鎭)과 고려영(高麗營)촌이 있다.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매국의 역사관, 즉 식민사관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면 한사군이 처음부터 중국 내에 있었다는 문헌사료와 유적, 유물은 무수히 많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출처: 정보-책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