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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당시 평화주의 장군>엔도 사부로 (遠藤三郎)

Bawoo 2015. 9. 29. 23:13

엔도 사부로 (遠藤三郎)

1893년 1월 2일 생 - 1984년 10월 11일 사망

 

 

야마가타 현에서 양복상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엔도는 센다이 육군지방유년학교,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4년에 육군사관학교제 26기를 졸업해 포병소위로 임관하여 요코스카 중포병 연대에 배치되었다. 육군포공학교 고등과를 우등으로 졸업하여 육군 중포병 사격학교 교관 등을 거쳐 1922년 11월에 육군대학 34기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제 3여단 야전 중포병 제 1연대 중대장에서 참모본부 대위로 있을 때, 간토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그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보호를 경찰에 의뢰하는 등 구제에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역효과가 되어 엔도의 소속 연대에서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외국 국적자의 살해는 국제문제라 여긴 일본육군은 은폐공작을 내렸지만 엔도는 불응해 프랑스 육군대학으로 유학하고 말았다.

 

1929년에 귀국 후 참모본부 작전참모, 관동군 작전주임 등을 맡은 후 만주사변에 종군하여 육군대학 교관, 야전중포병 제 5연대장,참모본부 과장 겸 육군대학 교관 등을 역임하다가 1937년 12월에 병과를 항공병과로 전직하여 항공병 대좌가 되었다. 대본영 연구반장,하마마쓰 육군비행학교 등을 거쳐 1939년에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엔도는 노몬한 사건 직후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파견되었다.

 

관동군이 소련군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엔도는 북진론보다도 만주방어를 우선시하자고 주장해 육군 수뇌부로부터 미움을 사서 경질당하고 말았다. 그 후 제 3 비행단장, 육군항공사관학교 간사 등을 역임했는데 제 3 비행단장으로 재직시 전략폭격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여 1941년에는 해군과의 공동작전이던 충칭폭격작전을 중지시켰다.

 

1942년 12월에 중장으로 진급해 항공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엔도는 다시 육군항공본부 총무부장, 군수성 항공병기 총국장 등을 지낸 후 병기산업의 국영화와 항공기의 규격화에 힘쓰다가 전후인 1945년 12월에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1947년 2월부터 1년간, 전범혐의로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엔도는 석방 후 사이타마 현의 옛 육군항공학교 부지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했다.

 

전후 반전운동과 평화헌법준수운동에 참가하며 1953년에 헌법옹호 국민연합을 결성하는데 참가하기도 한 엔도는 1959년에 무소속으로제 5회 참의원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친중파로서 중국과의 우호증진에도 힘쓴 그는 1956년과 1957년에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방중하여 회견을 갖기도 했다. 그리하여 1961년에 중일우호 전직군인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엔도는 사망 한달직전까지 <엔도 일지>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군사 비밀과 전시 자료, 당시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겨있어근대사의 자료로 현재 사이타마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엔도는 전쟁수행이라해도 범위를 벗어난 대량살상 및 학살행위에 단호히 반대했기에 그의 별명은 평화주의 장군이었다고 한다.

 

 

출처 : 하타 이쿠히코 <일본 육해군 종합사전>,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

[출처] 정보 - 책 144쪽/ 수집-http://blog.naver.com/mirejet/220332953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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