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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쌀소동과 3·1운동
1918년 11월 1일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이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동맹 국가가 선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삼국협상 국가에 맞서 식민지 및 시장을 분할하기 위해 전개했던 전쟁이었다. 1914년부터 4년간 벌어진 세계대전은 2000만여 명이라는 막대한 사상자를 남긴 채 협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무기 삼아 유럽 전선에 직접 참전하지 않고도 막대한 이익을 본 수혜국이 됐다.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독일 조차지(租借地)인 중국 산동(山東)반도의 교주만(膠州灣)을 점령하고 청도(靑島)를 차지했다. 독일은 산동반도에까지 군사를 보내 일본과 다툴 형편이 아니었다. 일본은 1915년 5월 25일 중국의 원세개(袁世凱) 총통에게 21개 조항을 강요해 받아들이게 했다. 산동반도 내의 독일 이권은 물론 만주에 일본의 조차지를 설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21개 조항은 중국 내 반일감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성격이 강했던 일본 자본주의는 전쟁 특수로 급성장했다. 전쟁이 발발한 1914년에 11억 엔(円)의 채무국이었던 일본은 수출액이 네 배 이상 증가해 1920년에는 27억 엔의 채권국으로 탈바꿈했다. 전쟁 특수로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에 대해 생사(生絲) 수출이 급증하고 전쟁 당사국이었던 영국과 러시아로도 수출이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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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했지만 그 이면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농촌에서는 농토를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고 사는 기생지주제(寄生地主制)가 여전했다. 공장 노동자 수는 85만 명에서 178만 명으로 급증했는데, 농촌 인구가 공장 노동자로 빠져나가면서 임금과 물가가 동반 상승했다.
농촌인구 감소와 함께 쌀 생산량이 급감함에 따라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16년 5844만여 석에 달했던 쌀 생산량이 1917년과 1918년에는 각각 5469만여 석으로 400만 석 가까이 감소했다. 1918년 3월 한 되(升)에 20전 정도이던 백미(白米)가 7월에는 40~45전으로 치솟더니 8월 초순에는 50전으로 상승했다. 도시 노동자의 일급(日給)이 50전 정도였으니 하루 종일 일해 쌀 한 되 사면 끝이었다.
1918년 7월 23일 도야마(富山)현 우즈(魚津) 마을의 부녀자들이 쌀값 폭등에 항의하면서 현 바깥으로 미곡을 반출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 전국적인 쌀소동(米騷動)으로 번진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자연발생적이었던 쌀소동은 도시 노동자와 빈농(貧農)이 대거 가세하면서 1도(道)·3부(府)·32현(縣)·33시(市)의 500개소로 확대됐다.
일본 민중은 전국 곳곳에 집결해 쌀값 인상과 매점매석, 정부의 무대책을 비난했는데, 마침 일본 총리는 무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던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5185>正毅)였다. 조선총독으로서 공적을 인정받아 1916년 10월 총리가 된 데라우치의 머리는 비리켄 인형의 머리와 비슷했다. 이 때문에 헌법도 무시하는 그의 내각을 ‘비입헌(非立憲·비리켄) 내각’이라고 불렀다. 쌀소동이 격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고와 황실·재벌 자금까지 투입해 쌀값 안정에 나서는 한편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동원해 탄압했다.
그러나 무력통치로 일관하던 데라우치 내각도 쌀소동이 확산되자 책임을 지고 1918년 9월 29일 총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쌀소동은 더 이상 민중을 무력으로 억누를 수 없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산미증식 계획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
데라우치의 뒤를 이어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 총재이자 온건파였던 하라 다카시(原敬·재임 1918년 9월 29일~1921년 11월 13일)가 취임하면서 정당 내각 시대가 열렸다. 이 무렵 국제 정세가 요동쳤다.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그해 말 무병합·무배상 강화(講和),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자결, 비밀외교 폐지 등을 주장하고 나서 자본주의 국가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 맞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14개조 평화원칙’에 민족자결주의를 집어넣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이었던 독일 등이 지배하던 식민지 국가에만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민족자결’이란 언어 자체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8월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2월 파리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한편 선우혁·김철 등을 국내로 파견했다.
선우혁은 1919년 2월 초 평안북도 선천의 양전백 목사와 정주의 이승훈·길선주 목사 등을 만나 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협의하고 김철은 서울에서 천도교 측과 접촉했다. 신한청년당은 일본에도 조용은(趙鏞殷·조소앙)과 장덕수·이광수 등을 파견했는데, 이광수는 서울을 거쳐 도쿄로 가서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19년 2월 만주에서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좌진(金佐鎭), 조용은, 려준(呂準), 유동열(柳東說),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상룡(李相龍), 이세영(李世永),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문창범(文昌範),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翊),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윤세복(尹世復), 허혁(許爀) 등 39명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는 항일 독립전쟁을 “하늘의 인도와 대동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하고도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1919년 1월 6일 일본의 한국 유학생들은 도쿄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최팔용·백관수·김상덕·김도연·전영택 등 10명을 실행위원으로 선출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및 각국 대사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병으로 사임한 전영택 대신 이광수·김철수가 더해져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4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청년단 대회를 개최했다.
‘조선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국장 최팔용의 사회로 개최된 이 대회에서 백관수는 이광수가 기초한 ‘됴션쳥년독립단션언셔(2·8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은 4개 항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됴션쳥년독립단션언셔’는 ‘10년간 독립을 회복하려다가 희생된 자 수십만’이라면서 ‘한·일합병은 조선민족의 의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선언서는 ‘합병 당시의 선언과 달리 일제는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대하듯이 했으며 참혹한 헌병정치하에서 참정권·집회·결사·언론·출판의 자유와 신교의 자유까지 억압당했다.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일본과 혈전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새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유학생들은 도쿄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서 출동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다가 27명이 체포돼 최팔용 등 9명이 금고 1년 정도의 형을 받았다. 당초 내란죄를 적용하려 했으나 하나이 다쿠조(花井卓藏),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등 민권변호사들이 “학생들이 자기 나라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 어찌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하는가”라며 무료 변론에 나서면서 처벌이 가벼운 출판법 위반죄가 적용된 것이다.
2월 23일에는 유학생들이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조선독립청년단 국민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인쇄물이 사전 발각돼 변희용(卞熙瑢)·최승만(崔承萬) 등이 구금됐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후 2시에는 최재우(崔在宇)가 150여 명의 유학생과 함께 유인물을 배포하며 시위했다.
이런 와중인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붕어 소식이 전해졌다. ‘고종 독살설’은 불타오르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천도교계의 이종일(李鍾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