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타 도코[ Fujita Toko , 藤田東湖 ]
출생 | 1806. 5. 3, 일본 미토[水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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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5. 11. 11, 에도[江戶 : 지금의 도쿄] |
국적 | 일본 |
[요약 ]
일본의 학자.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귀결된 일련의 운동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일본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고위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827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쇼코칸[彰考館] 편수(編修)가 되었다. 쇼코칸은 일본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미토 한[水戶藩]이 설립한 사관이었다. 그는 1829년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가 미토의 영주(다이묘[大名]) 자리를 계승하도록 도와주었고, 2년 뒤에는 나리아키와 함께 에도로 가서 일본의 국방을 강화하고 외국 열강과의 교류나 교역을 일체 금지하라고 바쿠후[幕府]에 조언했다. 그는 나라가 왕의 신성한 지도력 밑에서 다시 통일되면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로서의 운명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는 나중에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구호 아래 바쿠후에 대항해 일어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41년 후지타는 미토로 돌아와 영지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런 활동은 바쿠후를 놀라게 했고, 결국 바쿠후는 1844년 나리아키가 실각하자 후지타도 유폐했다. 후지타는 이 기간에 〈고도칸키주쓰기 弘道館記述義〉(2권, 1849)를 써서 일본의 독특한 운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1853년 바쿠후는 나리아키에게 매슈 C.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해군 함대가 제기한 국방 및 외교 문제에 대한 조언을 요구했고, 후지타도 다시 중앙에서 나리아키의 바쿠후 외교를 도와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페리 제독은 2세기에 걸친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교역을 시작할 것을 일본에 요구했다. 후지타는 미국인들과 협상하게 됨으로써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미처 재고하기 전에, 지진으로 집이 무너져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 출처: 정보-책 / 수집-다음백과[후지타 도코 (Fujita T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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