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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터어키]술레이만1세와 황후 록살레나

Bawoo 2020. 10. 19. 12:51

 

술레이만1세(1520-1566년 재위)

 

 

 

                               술탄 술레이만 1세

 

 

술레이만1세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최전성기로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술탄으로 '입법자'또는 '술래이만 대제(大帝)‘로 불리는 인물이다.

 

46년에 이르는 재위기간동안 무수히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서유럽에서

조차 존경받는 술탄이다.

 

술레이만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군주 솔로몬의 터키식 이름이다.

 

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비잔틴 제국을 역사의 무대에서

끌어 내린 오스만 투르크의 7대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 바예지드 2세와 아버지 셀림 1세 치세를 거쳐 1520년 26살 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10대 술탄이 되었다. 조선 중종15년이 되는 해다.

 

 

셀림 1세가 술탄의 지위를 넘볼 가능성이 있는 술레이만 1세의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해 주었기 때문에 즉위 때부터 통치 기반이 굳건했다고 한다.

 

 

그는 재위 46년 동안 13차례의 원정을 통해 헝가리를 정복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페르시아를 압박하였으며, 문화를 융성하게 하고

내치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1580년 무렵의 오스만 제국 영토(www.allaboutturkey.com)▲

 

 

그는 한 평생 오직 한 여인만을 사랑하였다는데 서양에서 ‘록셀라나’로 불리게 된

‘후렘’이라는 여인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예로부터 정식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술탄의 아내가 적의 포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적장이 왕비를

발가벗겨 술시중을 들게 하는 등 술탄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투르크족은 술탄의 정식결혼을 금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불문율은

술레이만 1세가 통치하던 16세기까지 엄격하게 지켜져 왔다.

따라서 후궁은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하고 권세를 누려도 공식신분은 하렘(후궁)의

노예에 불과했다.

 

 

이렇게 공식 황후를 두지 않았던 선대의 술탄들과 달리, 그는 노예출신인 록셀라나와

결혼을 하고 일평생 사랑했다고 하며, 그녀가 죽을 때까지 25년이나 그녀와 일부일처

를 유지하는 순애보를 보였다.

 

 

그는 전쟁터에서 조차 편지를 쓸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고 하는데, 술레이만이 그녀

를 만나기전 그의 아들을 낳았던 '마히데브란'을 제외하고는 하렘의 다른 여자들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만하다.

 

 

 

                             록셀라나

 

 

 

록셀라나는 원래 우크라이나 출신의 정교회 사제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납치당한 후 노예로 팔려 술레이만의 하렘에 들어갔다.

 

그녀는 곧 술레이만의 총애를 얻게 되었는데 술레이만은 록셀라나의 미모에

한눈에 반해 매일 그녀와 함께 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녀의 지적능력 때문이었다.

사제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분야의 책을 읽었고 이를

바탕으로 황제에게 점차 조언을 해주거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이전의 순종적이기만 하던 '마히데브란'과는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당시 오스만 하렘의 풍습은 술탄의 첩들은 오직 한명의 아들을 낳는 것이 원칙

이었다.

치열한 왕위계승싸움에서 어머니는 한명의 아들에게만 집중해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셀라나는 술레이만의 다섯 아이를 낳았고 그중 세 명의 아들이 성인

으로 성장했다.

 

술래이만은 록살리나와 사랑이 더욱 깊어져 마침내 그녀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다. 신하들은 과거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하며 술탄을 말렸지만

 

술레이만은 고집을 꺾지 않고 마침내 록셀리나를 황후로 맞이하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명랑한 사람, 잘 웃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후렘(Hürrem)’

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록셀라나는 후렘 황후라 불렸다.

 

 

이 후 후렘 황후는 오스만 제국의 실세로 등장하였으며 그 후로도

그 넓은 하렘을 텅 비게 만든 유일무이한 존재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그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술레이만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인이었지만

그 전에 다섯 아들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녀의 장남 메메드는 어린 시절 죽었고 그 외에도 네 아들이 있었지만

술레이만과 그녀는 막내인 지한 길을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을 굳힌 후렘은 이전부터 권력을 버리고 지방으로 내려간 마히데브란과

그녀의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무스타파를 노리고 환관들과 비밀정보요원들을

보내 감시하게 했다. 이후 그녀는 술레이만에게 무스타파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했다.

 

 

 

화가 난 술레이만은 무스타파를 공격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무스타파는

진짜 반란을 일으켰고 그 지방에서 존경 받았던 그를 돕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무기를 들어 반란은 3년간을 지속하게 되었다.

 

결국 패배한 무스타파는 살해당했고 그의 어머니는 이스탄불에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하던 아들 지한 길은 존경했던 형이 어머니의 손에 죽자

죄책감을 못 이기고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시체를 본 후렘 황후는 크게 슬퍼했다고 전한다.

 

 

이후 그녀는 또 다른 후궁의 아들인 바예지드를 모함해 그 또한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권력욕은 그녀를 점차 병들게 만들었고 복수심도 발동해 과거 자신을

납치했던 크림칸국을 자주 침공해 그곳의 몽골인들을 정기적으로 학살하였다.

 

 

 

그런 후렘 황후지만 술래이만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 자신 아들들을

죽인 죄책감에 휩싸였어도 그 원인인 후렘 황후를 말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마저 떠나면 자신은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신하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1588년 후렘이 병고에 시달리며 세상을 떠난 뒤 술레이만 1세는 측근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의기소침해졌다.

 

이제 그에게 있어 아들이라고는 후렘과의 사이에서 낳은 알코올 중독자인 아들

셀림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인심 또한 무스타파를 그리워하고 후렘을 천하의 악녀라고 수근 대고

있었다.

술레이만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집단처형까지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후렘에 대한

악명만 커지고 있었다.

 

 

 

1566년 술레이만 1세는 헝가리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나섰다.

재위 46년 만의 13번째 원정이자 페르시아 원정 이후 12년 만의 친정(親征)이었다.

그러나 그는 통풍으로 다리를 절며 소화기능도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9월 중순 술탄의 군대는 헝가리의 시게르바트 성을 어렵게 점령했다.

그러나 술탄은 이미 9월 5일과 6일 사이 병영에서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술레이만은 자신이 죽은 뒤 후렘 옆에 묻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결국 록셀라나의 뜻대로 그녀의 아들이 술탄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 아들인 셀림 2세는 참으로 한심한 술탄이 이었다.

그 때문에 후대 역사학자들은 후계자 선정에 실패한 것이 술레이만 1세의

큰 실책 중 하나로 꼽는다.

 

 

어쨌든 셀림 2세는 유언대로 술레이만과 후렘 황후의 무덤을 이스탄불에 있는

 '술레마니아 모스크'에 안치하였다.

 

 

                                  술레마니아 모스크▲

 

술레이만 1세
EmperorSuleiman.jpg
오스만 제국 술탄
재위 1520년 ~ 1566년
별명 장려자
입법자
황후 록셀라나
부황 셀림 1세
이전 황제 셀림 1세
다음 황제 셀림 2세

술레이만 1세(오스만 터키어: سليمان, 터키어: I. Süleyman, 1494년 11월 6일 - 1566년 9월 5일)는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이다(재위 1520년 - 1566년). 군사전략가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46년이라는 긴 치세 동안 세 대륙을 가로지르며 13차례의 대외원정을 실행에 옮겨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음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서구인들은 그를 ‘장려한 쉴레이만(the Magnificent)’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으며, 한국에서는 흔히 ‘쉴레이만 대제’로 번역된다. 터키에서는 법전을 편찬하여 제국의 제도를 정비한 업적을 높이 사 ‘입법자(Kanuni; 아랍어: القانونى al‐Qānūnī)’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그의 이름 쉴레이만은 유대교기독교와 더불어 이슬람교에서도 경전으로 추앙받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고대 이스라엘 솔로몬의 터키어식 발음이다.

당시 이스탄불에 주둔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한 대사는 술레이만에 대해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무너뜨린 인물’이라며 그를 평했다. 그는 또한 술레이만을 작렬하게 내리치는 천둥과 번개의 모습에 비유하기도 했다.[1]

생애

술레이만은 1494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 셀림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경험이 풍부한 대신의 도움을 받아 소아시아 서부 지방의 마니사 총독직을 맡았다. 또한 부황이 외국으로 출정을 나가면 미래의 군주로서 최선을 다해 국가의 일을 처리했다. 이때부터 그는 나라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키워나갔으며, 관용을 베푸는 황제가 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0년 3월에 셀림 1세가 죽자 26살의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오른 술레이만은 남북을 오가며 대제국을 지휘하여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2]

술레이만이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은 지역은 그의 아버지 대에 대담한 원정을 감행했으나 결국 실패했던 베오그라드로도스 섬이었다. 당시 이 두 지역은 모두 중요한 요새였다. 베오그라드는 헝가리인이 점령하고 있어 오스만 제국이 유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로도스 섬은 오랫동안 성 요한 기사단의 지배 아래 있었기에 오스만과 아라비아의 밀접한 교류를 방해해 왔다.

술레이만이 즉위한 지 1년 후, 그는 군사 10만을 이끌고 3주 동안 베오그라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몇 번의 교전 끝에 베오그라드는 마침내 오스만군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 후 1년 뒤 쉴레이만은 직접 로도스 섬을 정복했다. 반년의 시간 동안 병사 5만 명을 잃었지만 술레이만은 드디어 아버지 대(代)에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수했다.[3]

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헝가리 평원으로 쳐들어가 당시 서유럽 최대 세력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는 놀랄 만한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헝가리의 젊은 국왕 러요시 2세가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지만 승패를 뒤집기에는 그의 능력이 부족했다. 모하치 전투에서 쉴레이만에게 대패한 러요시 2세는 도주하던 중 연못에 빠져 죽었고, 이로써 헝가리는 오스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술레이만은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1529년과 1532년 두 번에 걸쳐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을 공격하여 수세에 몰린 합스부르크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술레이만은 가장 힘들어 보였던 두 가지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자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이제부터 오스만 제국은 다시금 영토 확장을 하기 시작했다. 1533년 이후, 그는 수차례 페르시아를 공격하고 이라크쿠르디스탄 대부분과 아르메니아 서부를 점령했다. 또한 페르시아 수중에 있던 도시 바그다드를 빼앗아 오스만 제국에 병합했고, 그의 파병군은 아덴예멘 등지를 획득했다.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로마 교황청베네치아,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쉴레이만은 지중해의 영웅이 되었다. 계속해서 그가 이끄는 오스만 대군은 북아프리카트리폴리, 튀니지, 알제리를 정복했다.

 
만년의 술레이만

 

술레이만은 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국가 통치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술레이만이 국내 통치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오스만 제국은 번영과 번성을 이루었다. 술레이만의 능력과 안목이 가장 돋보인 것은 그가 구상한 입법에서였다. 《군하총회》, 《이집트 법전》, 《쉴레이만 법전》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4]

나라의 경제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평한 법률 계약으로 사유재산의 보호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쉴레이만은 저명한 법학가들에게 법률을 조정하여 제정하도록 위탁했다. 그 중 《군하총회》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최대의 법전으로 이 법전이 발효된 후 귀족 계층 내부의 혼란이 사라졌고, 제국의 봉건 제도를 안정시키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술레이만 법전》은 토지, 전쟁, 군사제도, 지방 치안과 형법 등 각 방면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완벽한 법률을 바탕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계층과 광활한 영토의 대제국을 질서정연하게 통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술레이만이 오랜 기간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원성을 높이지 않았고, 사회 질서가 확립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또한 쉴레이만은 중요한 예술 후원자이기도 했다. 건축과 그림, 서예, 조명, 병기, 타일과 직물, 목제품, 금속제품 그리고 문학 등 모두가 그의 통치 기간 중에 꽃을 피웠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시와 노래를 무척 좋아했으며, 출정 중에도 매일같이 일기를 써 훗날 《전쟁일록》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더불어 집정 기간 동안에 건축가 시난을 시켜 쉴레마니예 모스크 등 많은 모스크를 건축했다.

 

1566년, 만년에 접어든 술레이만은 마차를 타고 자신이 정복한 헝가리를 행진하던 중 그해 9월에 병영 안에서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5]

 

한편, 술레이만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전통적으로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8남 1녀의 자식을 두었던 쉴레이만은 사랑에 빠져서 결국 자신의 애첩 중 한 명인 록셀라나, 훗날 사람들에게는 휘렘이라고 알려진 여인과 결혼했다. (수정 이전의 문서에는 쉴레이만이 일부일처제를 고수했다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훗날 셀림 2세가 되는 셀림과 황위다툼을 벌이다 처형되는 무스타파는 록셀라나의 아들이 아니다)

주석

  1. 이동 후얀신주, 《18인의 위대한 황제들》, 이른아침, 143쪽
  2. 이동 후얀신주, 《18인의 위대한 황제들》, 이른아침, 143-144쪽
  3. 이동 후얀신주, 《18인의 위대한 황제들》, 이른아침, 146쪽
  4. 이동 후얀신주, 《18인의 위대한 황제들》, 이른아침, 147-148쪽
  5. 이동 후얀신주, 《18인의 위대한 황제들》, 이른아침, 149-151쪽

바깥 고리

네이버 캐스트 - 술레이만 1세

 

* 출처: 정보- 책

무서운 공주들

/ 자료 수집-검색자료<위키백과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