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로마제국**

[네로의 누명]

Bawoo 2015. 11. 30. 21:24

 

네로의 누명

로마의 수많은 황제(서로마의 경우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약 80여 명)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황제로 알려진 네로(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는 37년 12월 안티움에서 태어났다.

190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대표적 장편소설 『쿠오바디스』에는 서기 64년 7월 18일부터 약 일주일 동안 일어났던 로마 시의 대화재와 당시 황제였던 네로에 대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이 책을 원전으로 한 영화 〈쿠오바디스〉도 공전의 흥행에 성공하여 네로와 대화재 사건을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켰다.

대화재는 네로의 대경기장 안에 있는 노점에서 일어난 불이 삽시간에 상가 지대를 모두 태워 버린 후 무려 일주일간이나 계속 타면서 로마 시 절반을 잿더미로 만들고 수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을 낸 사건이다.

네로가 비난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로마의 대화재와 그 처리 방법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화재는 시르쿠스 막시무스(대전차 경기장으로 길이 약 610미터, 너비 약 183미터의 직사각형 형태이며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함)에서 일어났는데 바람을 타고 곧바로 로마 전역으로 퍼졌다.

로마는 서기 1세기경 면적으로는 세계 최대는 아니지만 인구로 따지면 세계 최대의 거대한 도시로 무려 125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살고 있었다. 문제는 로마가 일곱 개의 언덕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도심지를 직각으로 관통하는 간선도로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도로 체계 자체가 미비한데도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인구 때문에 로마는 아수라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집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데다가 좁은 길이 굽어 있고 상수도 시설이 완벽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명으로 등유(燈油)를 쓰고 있었으므로 일단 불이 나기만 하면 순식간에 큰불이 되곤 했다.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도 여러 차례 화재 사건이 일어나 7,000명으로 구성된 소방대가 창설될 정도였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첼리우스 언덕 전체가 불에 타서 없어졌고 원형극장이 붕괴되면서 5만 명이 불에 타죽거나 질식사하기도 했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도 대형 화재 사건이 있었다. 54년 클라우디우스는 대화재가 발생하자 자신이 직접 소방대장 역할을 맡아서 진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그 당시에도 마르티우스 광장 전체가 전소되었다.

그런데 네로 시대의 막시무스 경기장에서 시작된 불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주일간 계속된 불은 일반주택과 공공건물들을 비롯하여 로마 시 거의 전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로마의 14개 행정 구역 중 화재 피해를 보지 않은 구역은 4개 행정구에 불과했다.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곳도 3개 구역이나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화재 때문에 도시의 10분의 1 정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 1막시무스 경기장의 대전차 경주
  • 2막시무스 경기장 복원도로마의 대화재는 이 경기장 근처에서 시작되었다.

문제는 네로에 대한 악평이다. 기록에는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제금이라는 악기로 자신의 자작시 「트로이의 붕괴」를 읊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네로가 노래와 춤을 좋아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화재가 시작되었을 때 네로는 로마에서 50마일 떨어진 안티움에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대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마로 달려와 화재 수습에 최선을 다했다. 집 잃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정원 시설인 마르티우스 광장과 개인 건물들을 개방하여 이재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곡물 창고에 비축된 식량을 방출하면서 곡물 가격을 낮추었다. 이 내용은 네로에게 결코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 타키투스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

네로는 안티움에 있었다. 그는 마에카나스 정원과 팔라티네 산 사이의 별장에 있다가 불길이 닥치는 걸 보고 로마로 돌아왔다. 불길은 그의 별장뿐만 아니라 팔라티네 산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네로는 집을 잃은 군중을 위해 마르스 광장으로 통하는 문을 개방했고 아르리파의 별공과 자신의 정원까지 대피 장소로 사용케 했다. 게다가 이재민들을 위한 긴급대피소를 짓기까지 했다. 오스티아와 인근 도시에서 식량을 긴급 조달하고 가격도 파운드당 사 분의 일 세스테르티우스를 못 넘게 했다.

그런데 로마가 화재로 황폐해지자마자 네로는 새로운 로마 건설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것이 로마인들의 의심을 사기 시작했다. 네로에 의해 재건된 신시가는 화재 이전보다 한층 거창했고 아름다웠다. 네로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로마를 고의적으로 불태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네로가 방화를 지시했다는 설을 단호히 부정한다. 자료를 철저히 연구한 결과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방화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잔인하게 박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네로가 명령하여 방화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도 서기 160년에서 220년 사이에 주로 기독교 박해 사건에 관한 저술을 남겼지만 네로를 방화범으로 지목하지는 않았다.

 

네로의 방화설은 처음부터 모순을 드러낸다. 가령 일부 후대 역사가들의 주장처럼 네로가 로마를 아름답게 재건하기 위해 불태울 계획을 세웠다면 자신의 승리를 상징하는 막시무스 경기장과 자신이 거주하는 황제 궁전은 불태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는 궁전에 상당히 많은 로마 미술품과 그리스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궁전을 새로 건설할 계획이라면 옛 궁전을 태워버리기에 앞서 작품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는 조처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로는 예술품을 확보하기 위해 다소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공들여 수집한 미술품을 일부러 태울 리는 없는 일이었다.

최고통치자로서 도시를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네로는 초토화된 로마의 재건에 힘을 썼고 특히 로마의 골목길이 좁아서 화재가 더욱 커졌다는데 생각이 이르자 또다시 대형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쉽게 진압할 수 있도록 건축방식을 규정하고 화재 진압용 수로를 확장하는 등 유용한 법규들을 공표했다.

또한 네로는 신들을 위해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대화재로 불안해하던 시민을 진정시키기 위한 중요한 행사였다. 따라서 네로는 대화재 직후 로마의 상황을 진정시키고 이 도시를 신속하게 재건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네로가 고의적으로 방화했다는 소문이 줄어들지 않자 네로는 희생양을 찾았다. 희생양은 당시 급속도로 퍼지던, 로마의 신들을 부정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특히 로마가 불에 타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이 (속죄의 날이 왔다고) 기뻐 날뛰며 찬송가를 불렀다는 소문이 퍼지자 로마인들은 기독교인을 짐승 같은 존재로 간주하며 더욱 증오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의 재판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방화는 살인과 같은 행위이므로 모두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들의 처형은 로마인의 구미에도 맞는 일이었다. 타키투스는 기독교인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기독교인들은 조롱을 당하면서 처형됐다. 일부는 원형경기장에서 짐승의 가죽을 덮어쓰고 개에게 물려 죽었고 투기에 나올 동물의 먹이가 되었다. 일부는 십자가에 묶인 채 맞아 죽거나 몸뚱이에 콜타르가 칠해진 후 어둠이 찾아온 뒤에 횃불을 밝히듯이 불쏘시개처럼 화형에 처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네로는 이와 같은 장관을 연출하기 위해 원형경기장에서 서커스 경기를 개최했고 자신도 전차 경주 선수 복장으로 군중 사이에 섞이거나 직접 전차를 몰았다.

 

타키투스가 이 글을 쓴 시기는 네로 시절보다 기독교 박해가 훨씬 심각할 때였다. 도미티우스 황제는 기독교 신자였던 자신의 사촌을 처형하고 그 아내를 유배시켰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로마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네로가 기독교인 박해의 주범처럼 낙인찍힌 것은 네로에 의해 로마제국에서 저질러진 최초의 공식적인 기독교도 박해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도 네로 통치기에 고문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학자들 대부분은 네로가 기독교 자체를 박해했다는 소문은 근거가 없다고 믿는다. 오히려 네로 시대 때 기독교가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 대화재로 말미암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기독교도를 박해한 것이 아니라 방화범을 응징하는 차원이라는 것이 오히려 옳은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현준만, 『이야기 세계사 여행』(실천문학사, 2001).
  •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이지영 옮김, 『역사의 오류』(열음사, 2008).
도서
미스터리와 진실 2(인물)
미스터리와 진실 2(인물) 저자이종호 | 출판사북카라반 전체항목 도서 소개

람세스에서 메릴린 먼로까지 역사 인물에 얽힌 세계 미스터리의 진실과 거짓을 밝힌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보에 입각하여 동서양을 넘나들며 신과 인류가 남기고 간 수많은 흔적을 탐험한다.

집필자

이종호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Dr. I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Dr. d'Etat.....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