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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프트만 - 철로지기 틸

Bawoo 2015. 12. 5. 20:02

철로지기 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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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하웁트만노벨상을 수상한 인물 또는 단체입니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1862년 11월 15일 ~ 1946년 6월 6일)은 독일의 희곡 작가이다.

1912년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독일 자연주의 연극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했다.

 

생애

하웁트만은 실레지아 지방의 작은 도시인 오버잘쯔브룬(Obersalzbrunn)에서 호텔 경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늘날 그 곳은 폴란드의 일부로 슈쯔크짜오노-쯔드로즈(Szczawno-Zdrój)로 알려져 있다.

고향 마을학교를 나온 그는, 브레슬라우 지역에 있는 레알슐레(독일의 중등학교)에 진학하였고, 그 후 농사 일을 배우려고 그의 삼촌이 운영하던 자우어의 농장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농촌 생활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곧 브레슬라우로 돌아오게 되고, 조각가에 뜻을 두어 독일과 이탈리아의 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오토 브람의 '자유무대'에 자극을 받아 극작을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평생동안 친구로 지낸 요세프 블록(Josef Block)을 만났다. 그는 예나 대학에서 공부하고, 1883년부터 1884년에는 거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1885년 5월에 하웁트만은 결혼했고, 베를린에 정착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문학에 바쳤고, 곧 현대 연극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91년 그는 실레지아 지방의 슈츠레이베르하우로 이사를 갔다. 하웁트만의 첫 번째 희곡은 《해가 뜨기 전》(Vor Sonnenaufgang) (1889)으로, '자유무대'에서 초연되어 현대 독일 문학에서 자연주의 운동의 막을 연 작품이다.

하웁트만이 입센의 영향을 받았음은 일반적으로 시인하는 바이나, 《화해(和解)》(Das Friedensfest, 1890)는 《유령》과, 《쓸쓸한 사람들》(Einsame Menschen, 1891)은 《로스메르스홀름》과 비슷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하웁트만의 최고걸작이라고 불리며 또한 가장 성공한 작품은 그 다음에 쓰여진 《직조공들》(Die Weber, The Weavers, 1892)이다. 실레지아 지방에서 실제로 일어난 직조공들이 1844년에 일으킨 폭동을 생생하게 묘사한 힘이 넘치는 자연주의극으로서 최초에는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상연이 금지되었다.

 

하웁트만의 결혼생활은 어려웠고 1904년 그는 아내와 이혼했다. 같은 해에 그는 이미 자신과의 사이에서 한 아들을 낳았던 여배우 마가렛 마슈찰크(Margarete Marschalk)와 결혼했다. 다음 해에 그의 두 번째 결혼생활은 끝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가 17세의 오스트리아 여배우인 데다 오를로프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그의 연극인 《하넬레의 승천(昇天)》에서 연기할 때 그녀를 베를린에서 만났다. 오를로프는 하웁트만의 여러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이었고, 그는 후에 그녀를 그의 뮤즈로 언급했다.

 

자연주의 작가로서 유명해진 하웁트만에게는 본질적으로 낭만적인 면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이 표면화된 것이 《하넬레의 승천(昇天)》(Hanneles Himmelfahrt, 1893)이며 1896년의 《침종(沈鍾)》에 이르러 절정이 된다. 《침종》은 《직조공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공작이나, 가장 일찍이 그 평가를 잃은 작품이기도 했다. 하웁트만은 자연주의 작품과 반자연주의 작품을 병행시키면서 만년은 혼란스런 시대 양상(樣相) 및 불안정한 자기의 내면생활을 반영시킨 작품을 냈다.

1912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 수상은 "기본적으로 희곡 분야에 대한 그의 풍부하고 다양하며 독보적인 창작"에 따른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하웁트만은 평화주의자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Der Bogen des Odysseus (1914), Der weisse Heiland (1912–17), Winterballade (1917) 같은, 여러 우울하고 역사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희곡들을 썼다. 전쟁 이후에 그의 창작 능력은 분명히 약화되었다. 초기 성공을 거둔 것과 유사한 충분한 길이의 희곡 작품인 Dorothea Angermann (1926)와 Vor Sonnenuntergang (1932)을 썼고, 거기에는 사실주의적인 취향이 나타나 있다. 그는 히틀러의 "Machtergreifung"(나치당 집권일) 이후에도 독일에 남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드레스덴 지역에 감행된 폭격에도 살아남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아트리덴 사부극》Atriden-Tetralogie (1942–46)이었다.

 

하웁트만은 아그네텐도르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83세의 나이로 1946년에 타계했다. 러시아 군정이 하웁트만의 작품에 경의를 표한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정부는 하웁트만의 친척들이 그를 아그네텐도르프에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의 시신은 그가 죽은 지 한 달도 더 지난 후에야 독일로 옮겨졌다. 그는 그의 별장 근처에 묻혔다.

작품

희극 Kollege Crampton (1892), Der Biberpelz (1893) and Der rote Hahn (1901)이 있고, "꿈의 시"라고 언급되는 Hannele (1893), 그리고 역사적인 연극인 《플로리안 게이어》(Florian Geyer) (1895)가 있다. 그는 또한 실레지아 지방 사람의 삶을 다룬 두 비극인 Fuhrmann Henschel (1898)과 Rose Bernd (1903)를 창작했고, 극적인 동화인 Die versunkene Glocke (1897) and Und Pippa tanzt (1905)를 썼다.

작품 상세

  • 《해뜨기 전》(1889년)

그의 출세작이자 독일 자연주의 연극의 시작을 알린 작품은 《해뜨기 전》(1889년)으로, 이 작품은 자연주의의 원칙을 따라 유전과 환경이 극 중 인물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연극에서 벼락 부자가 된 주인공 크라우제의 둘째 딸인 헬레네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회학자 로트에게 버림을 받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로트가 헬레네를 버린 이유는 그녀의 집안이 알코올 중독자 집안이기 때문이었다.[1]

  • 《직조공들》(1892년)

1893년에 베를린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독일 자연주의 연극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844년 독일 슐레지엔 지방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직조공들의 반란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였다. 이 작품은 소위 "사회 드라마"로서, 특별한 개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고, 직조공들이라는 노동자 집단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출처:위키백과 -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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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당시 유행하던 슐레지엔의 한 휴양도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그곳 주요 호텔의 소유주였다. 1880~82년 브레슬라우 예술교육원에서 조각을 공부했고 1882~83년에는 예나대학교에서 과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883~84년 로마에서 조각가로 일하다가 1884~85년 베를린에서 공부를 계속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시인과 극작가가 되려는 결심을 했다. 1885년 유복한 마리 티네만과 결혼하여 베를린 근교의 에르크너에 정착해 정치·신학·문학 등 여러 분야에 손을 대는 동시에 자연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에 흥미를 지닌 일군의 과학자·철학자·전위작가들과 교제했다.

 

1889년 10월 공연된 사회극 〈해뜨기 전 Vor Sonnenaufgang〉은 관객에게 충격을 주긴 했지만 하우프트만을 하룻밤 사이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강한 사실주의 색채를 띤 이 비극은 19세기의 수사학적이고 고도로 양식화된 독일 드라마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고무되어 하우프트만은 유전이라든가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곤경, 개인적 욕구와 사회 제약 사이의 충돌 같은 자연주의적 주제를 다룬 뛰어난 극들을 빠른 속도로 연속 발표하면서 사회적 현실과 일상언어를 예술적으로 재생산했다.

 

가장 주목받은 인간적 작품일 뿐만 아니라 정부 당국에도 매우 비판적이었던 〈직조공들 Die Weber〉(1892)은 1844년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폭동을 동정하는 입장에서 극화한 작품이다. 〈평화의 축제 Das Friedensfest〉(1890)는 신경증을 보이는 가정 내의 소란스런 관계를 분석하고, 〈고독한 인간들 Einsame Menschen〉(1891)은 아내와 그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젊은 여인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한 불행한 지식인의 비극적 종말을 그렸다.

 

하우프트만은 〈마부 헨셸 Fuhrmann Henschel〉(1898)로 프롤레타리아의 비극을 다시 다루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가정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악화되는 한 노동자의 밀실공포증을 연구했다.

그렇지만 비평가들은 그가 〈하넬레의 승천 Hanneles Himmelfahrt〉(1894)에서 자연주의 신조를 포기했다고 느꼈다. 이 작품은 학대받던 한 구빈원의 소녀가 죽기 얼마 전에 꾼 꿈들을 시적으로 환기시킨다. 풍부한 베를린 사투리로 씌어져 성공한 희극 〈비버 털 코트 Der Biberpelz〉(1893)는 한 약삭빠른 여자도둑을 중심으로 그녀가 허풍스럽고 우둔한 프로이센 장교들과 대결해 성공하는 이야기이다.

오랫동안 아내와 불화상태에 있다가 1904년 이혼했고, 같은 해 배우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마르가레테 마르샬크와 결혼했다.

 

마르샬크와는 이미 1901년부터 슐레지엔의 아그네텐도르프에 있는 집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하우프트만은 자주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여생을 주로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독일 자연주의를 정립했으나 후기 희곡에서는 자연주의 원칙들을 포기했다. 말년의 희곡에는 동화적이고 사가적인 요소들이 신비적 종교성 및 신화적 상징주의와 뒤섞여 있다. 〈카를 대제의 인질 Kaiser Karls Geisel〉(1908)처럼 역사를 배경으로 인간 개성의 근본적인 힘을 그린 작품과 당대인의 운명을 자연주의적으로 파고든 〈도로테아 앙거만 Dorothea Angermann〉(1926) 같은 작품이 병존한다.

 

하우프트만의 극작활동에서 마지막 단계는 〈아트리덴 4부작 Die Atriden-Tetralogie〉(1941~48)에서 정점을 이루는데, 이 4부작은 비극적 그리스 신화를 통해 하우프트만 시대의 잔인성에 대한 공포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사회에 대한 실망을 표현하고 있다.

하우프트만의 장편·단편 소설, 서사시들은 극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하며 종종 주제면에서 내적으로 얽혀 있다.

〈그리스도 안의 바보, 에마누엘 크빈트 Der Narr in Christo, Emanuel Quint〉(1910)는 그리스도의 일생을 그린 현대판으로, 경건주의의 황홀경에 사로잡혀 있는 슐레지엔의 어느 목수 아들의 격정을 묘사한다. 그에 대비되는 인물은 하우프트만의 가장 유명한 소설 〈조아나의 이단자 Der Ketzer von Soana〉(1918)에 나오는 배교자 사제인데, 그는 이교적인 에로스 숭배에 빠진다.

초기 작가생활에서 하우프트만은 한결같은 노력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후기에 더 많은 작품을 써냈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더욱 고르지 않았다. 예컨대 야심적이며 환상적인 서사시 〈틸 오일렌슈피겔 Till Eulenspiegel〉(1928)과 〈위대한 꿈 Der grosse Traum〉(1942)은 학술적 구조와 철학적·종교적 사상을 훌륭히 종합시켰지만 문학적 가치는 불확실하다. 만년의 몇 십 년 간은 우주론적 사변으로 인해 무대 위에서나 독자의 상상 속에서 생생하게 다가오던 인물들을 창조해내던 타고난 재능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치가 집권하기 전까지 독일에서 누린 문학적 명성은 비할 데 없는 것이었고, 나치 정부는 그에게 거의 관용을 베풀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는 독일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망명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나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 않았으나 정치적으로 순진했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에 남아 있었고, 슐레지엔 주변지역이 소비에트 적군에게 점령당하고 나서 1년 후 죽었다. 하우프트만은 20세기초 독일의 가장 탁월한 극작가였다. 그의 광대하고 다양한 문학적 생산에 통일적인 요소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동정어린 관심으로, 이는 사회를 비롯한 다른 기초적 힘들에 의해 대개는 수동적으로 희생당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표현된다.

그의 극작품들, 특히 초기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자주 공연되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 - 하우프트만 [Gerhart (Johann Robert) Haupt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