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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시 재정 권력을 휘두른 인물]상홍양(桑弘羊)

Bawoo 2015. 12. 19. 22:11

 

상홍양(桑弘羊, 기원전 152년 ~ 기원전 80년)

 전한 중기의 관료로, 하남군(河南郡) 낙양현(雒陽縣) 사람이다. 무제(武帝) 때 균수법(均輸法) · 평준법(平準法) · 전매제 등을 실시하여 재정면에서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생애

상홍양은 본디 장사꾼의 자식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셈에 탁월하여 열세 살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시중(侍中)이 되었다.

원수 3년(기원전 120), 소금 · · 의 전매를 실시하여 막대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때의 공으로 대농승(大農丞)에 임명되었고, 이후 균수법을 추진하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110) 상홍양은 치속도위(治粟都尉) 겸 영대농(令大農)에 임명되었고, 지방에 염철관(鹽鐵官) · 균수관(均輸官)을 설치하여 그 정책을 구체화하는 한편 각지의 물류를 조정하여 재정 수입을 늘렸다. 이 공으로 좌서장(左庶長)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홍양의 정책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원 6년(기원전 81), 전국의 지식인들이 수도로 와 상홍양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어사대부였던 상홍양은 이에 반론을 펼쳤고, 그 결과 술의 전매는 폐지되었으나 이외의 정책은 유지되었다.

 

시원 7년(기원전 80), 상홍양은 상관걸(上官桀)과 함께 연왕(燕王) 유단(劉旦)을 제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곧 발각되었고, 상홍양은 상관걸 등과 함께 주살되었다.

출전

  • 사마천, 《사기》 권30 평준서(平準書)
  • 반고, 《한서》 권24상 식화지(食貨志) 上 · 권68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磾傳)

[출처: 위키백과]

 

 

[참고 자료]

1.염철론( 鹽鐵論)

[요약]BC 5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한(漢)나라 때의 정치와 경제 논쟁을 재현한 기록 문학이다. 논쟁의 초점이 ‘소금과 철의 전매 제도’였다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나, 그 내용은 그 무렵의 정치와 경제, 방위, 도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대화 형식을 취하는 등 기록 문학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편저자 환관은 여남(汝南) 사람으로, 관직은 여강(盧江) 태수의 승(丞, 부태수)이었으며 박학하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이 『염철론』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본의(本義)에서 잡론(雜論)까지 10권 60편.

한나라 선제(宣帝) 때 환관이 편찬한 정치토론집으로, BC 81년에 조정에서 열린 회의 내용을 골자로 했다. 이때의 회의는 ‘민간의 고통’을 테마로 하여 열렸는데, 민간에서 뽑힌 60여 명의 현량, 문학(文學, 관리 후보생)과 어사대부(御史大夫, 부재상)인 상홍양(桑弘羊)각주[2]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토의 내용은 정치와 경제, 방위, 도덕 문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으며, 특히 이 가운데 논의의 초점이 된 것은 선대 무제(武帝) 때 제정되고 시행된 일련의 경제 정책과 소금 · 철 · 술의 전매 및 균수(均輸)와 평준법(平準法)각주[3] 이 옳은가에 관한 것이었다. 상홍양은 이러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당사자였기에 그 정책의 변론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유가 사상으로 무장한 현량과 문학들은 도덕과 인의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원칙론을 내세우고, 이러한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법가 사상의 입장에 선 상홍양은 이러한 제도는 국가 재정의 안정에 이바지할 뿐 아니라 백성의 생활 안정에도 도움을 준다고 하여 그 존속을 주장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민간의 현량과 문학이 정부의 고관인 상홍양과 호각의 토론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무렵 상홍양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실력자 곽광(霍光, 전한 시대의 정치가)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홍양은 그로부터 1년 뒤 조정 안의 권력 투쟁에 휩쓸려 주살당한다. 그 이후에 곽광의 지배 체제가 완성되었는데, 술의 전매만 폐지되었을 뿐 나머지 제도는 지속되었다. 이 책은 그때의 논쟁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편저자 환관에 의해 정리되고 윤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논쟁의 기본적인 내용은 그대로 살린 것 같다. 이런 양자의 논점을 통해 그 무렵의 제도와 풍속, 관습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전편이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이 책을 기록 문학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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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국가 정책을 두고 과거에도 얼마나 큰 논쟁이 있었는지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벼슬아치인 상홍양(桑弘羊ㆍ서기전 152~서기전 80)의 경우로도 알 수 있다. 한 무제는 북방 흉노와의 전비(戰費)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상홍양을 등용해서 소금(鹽)과 철(鐵)과 술(酒)을 국가가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는 전매제를 실시했다. 국가안보를 빙자해 국가가 직접 상행위에 나선 것인데 당연히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더욱이 한나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기는커녕 서기전 90년에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전 군사를 들어 흉노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윤대(輪臺)의 조칙(詔勅)’을 내려 40여년에 걸친 흉노와의 전쟁을 포기한다고 선언해야 했다. 한 무제 사후 조정에서는 소금ㆍ철ㆍ술 등에 대한 전매제와 균수법(均輸法)ㆍ평준법(平準法) 등 무제 때의 경제정책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학자, 관료들이 모여 대토론을 전개했다. 이때 유가(儒家) 사상가들은 이런 정책의 폐지를 주장하고, 어사대부 상홍양 및 승상(丞相) 차천추(車千秋) 등 법가(法家)사상가들은 계속 실시를 주장했다. 이때 있었던 경제 정책에 대한 대토론의 내용을 환관(桓寬)이 정리한 책이 유명한 염철론(鹽鐵論)이다. 한 무제 때 경제 정책을 둘러싼 충돌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한서(漢書) ‘복식(卜式)열전’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무제 원봉(元封) 원년(서기전 110) 가뭄이 조금 들자 한 무제가 백관들에게 비를 내리게 하는 방도를 물었다. 그러자 복식(卜式)이 “고위 벼슬아치들은 모두 백성들의 세금으로 먹고 입는 자들일 뿐인데 홍양이 시장의 이익을 독점하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홍양을 삶아서 죽으로 만들어야만 하늘이 비로소 비를 내릴 것입니다(亨弘羊 天乃雨)”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