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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망친 임금들

Bawoo 2015. 12. 23. 19:10

명(明)나라는 이어진 혼군들의 실정으로 서서히 망했던 대표적인 나라다. 혼군시대의 문을 연 정덕제(正德帝)부터 가정제(嘉靖帝)·만력제(萬歷帝)·천계제(天啓帝) 등을 거쳐 마지막 숭정제(崇禎帝)까지 명나라 역사 절반인 139년 동안 민생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끝에 망했다. 군주들은 잔혹하지 않았지만 다양하게 어리석은 방식으로 나라를 망쳤다. 이 중 으뜸으로 꼽히는 이가 만력제다. 사가들이 “명나라는 숭정제가 아니라 만력제 때 망했다”고 할 정도다.

 그가 나라를 망친 방식은 ‘태업’과 ‘결정장애’였다. 그는 집권 48년 중 30여 년간 몸이 아프다며 틀어박혀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신하들과 대면해 국사를 논하지도 않았다. 주요 쟁점들은 편지로 오갔는데 왕은 거의 결정하지 않았다. 인사난맥상은 극에 달했다. 주요 관직이 비어도 후임 인사를 미뤘고, 중앙부처가 텅 빈 상태에서 재상에 임용됐던 이정기는 사직하려고 5년간 152건의 사직서를 보냈지만 왕은 이조차 처리해주지 않았다.

 태자 책봉도 미루고 미뤄 후임 황제 교육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천계제는 글도 모르는 일자무식으로 황제에 올랐으니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물론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군사를 파견해 양국 간 우호를 증진시켰고 조선에선 대대로 제사도 받았다. 하지만 광해군 세자 책봉을 미루는 바람에 조선 역사에 피바람을 부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출처: 중앙일보] [양선희의 시시각각] 대통령을 겨냥한 ‘혼용무도’에서 발췌

 

[참고]

 

만력제

 明神宗.jpg

만력제(萬曆帝, 1563년 9월 4일 ~ 1620년 8월 18일)는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이다. 는 익균(翊鈞)이다. 융경제의 3남이다.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길며, 명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쯤 지나고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묘호는 신종(神宗)이고, 시호는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이다

 

1572년부터 162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572년부터 1582년까지 장거정(張居正)이 섭정하였고 1582년부터 162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유왕 주재후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큰형과 둘째 형이 모두 죽자 유왕태자(裕王太子)에 봉해졌다. 1567년 아버지가 황위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572년에는 10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만력제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張居正)에게 맡겼다.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조이기 일쑤였다.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덕분에 명나라는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해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반대파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편들었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했다. 이후 그는 30년 간 여러가지 구실을 대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져갔고,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닢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 반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갔으나 국고는 점점 줄어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다. 거기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

 

만력제가 죽은 뒤로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으나 이미 만력제 때 뒤숭숭해진 민심은 이자성의 난을 불러왔고, 그가 죽은 지 24년째 되던 해 명나라는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썼다.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군주이지만, 임진왜란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친 편이다. 그래서 당대와 후대 중국인들에게서는 만력제를 가리켜 ‘고려의 천자(天子)’ 또는 ‘조선의 황제’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대한 호감이 생겨난 배경도 이때 만력제가 보여준 적극적인 우호 정책 탓이 매우 크다.

 

그런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송시열이 제자인 권상하에게 만력제와 숭정제의 제사를 지낼 사당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만동묘(萬東廟)이다. 만동묘는 도산서원과 함께 조선의 4대 서원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지시할 때 헐려버리고 지금은 묘정비만 존재하고 있다.[위키백과-만력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