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은 눌친(訥親)이라는 인물을 파견했고, 건륭 시대의 장수들인 부이단, 악종기를 각각 내정대신, 사천총독으로 임명해 대금천 전쟁을 지원토록 했습니다.
문제가 또 생긴것은, 건륭이 파견한 이 눌친이라는 인물이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옹정 말년부터 정계에 등장한 눌친은, 건륭제 초기에 황제가 전략적으로 키우던 대신으로, 나이가 젊고 민첩하고 청렴결백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때문에 건륭도 일부러 그를 밀어주면서 장정옥, 오르타이 등의 노신들을 견제했고, 건륭 10년에는 엄청나게 그를 밀어주어 3워에는 협판대학사, 5월에는 국사관 총재와 보화전 대학사로 임명되었고, 오르타이가 사망하자 즉시 군기처 영반대신으로 임명, 장정옥보다도 서열이 높아졌습니다.
이는 당사자인 눌친 스스로도 놀라 사양할 정도였지만, 건륭은 아랑 곧 하지 않고 그를 조정의 핵심으로 임명했습니다. 문제는, 눌친이 전쟁에 대해서는 별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청군의 병력은 3,4만여 명으로 소수는 아니었지만 적을 완전히 반항도 못하게 찍어누를만큼 압도적인 숫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뭉쳐있을때도 압도적이라고 보기 힘든 군세를 10부대로 나뉘어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중에 1만여부대는 군량 운송을 담당했으므로 실제 병력은 더 적었습니다.
대금천 군대는 별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각개격파를 해가면서 청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모르는 눌친은 현장에 나가보지도 않고 막사안에서만 웅크리며 '원격 조종'을 했고, 이때문에 청군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눌친은 돌로 방어벽을 쌓아 반란군에 대비하자고 제안했지만, 건륭은 "진군하여 적을 치라고 보냈는데, 이제와서 수비를 하겠다니 무슨 말인가." 같은 식으로 이를 단칼에 거절했으며, 그럴 바에야 전장으로 나가 적의 요새를 무너뜨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눌친은 "정예병 3만이 있으면 문제없다." 며, 병력과 군비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건륭은 눌친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것을 보았지만, 그의 체면을 손상시키는것은 눌친을 지원한 자신의 체면에도 관련이 있으므로 먼저 파견된 장광사와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건륭은 눌친이 조금의 공이라도 세우면 어서 북경으로 '개선' 시킬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눌친이 파견되면서부터 작전에서 소외된 장광사는 사실 불만이 많았습니다.
눌친 때문에 자신의 권한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장광사는 매사에 비협조적이었고, 눌친이 상의를 하러 오면 빈정거리면서 모든 일을 눌친에게 일임하며 책임을 전가했고, 눌친이 서쪽으로 가자고 하면 그저 눌친에게 반대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지휘관들이 이렇게 반목하니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나서있는 동안, 눌친은 '단 한번' 도 전방으로 나간적이 없었습니다. 막사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건륭이 말도 하기전에 북경으로 자신을 어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는 청원까지 했고, 이를 본 건륭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렸습니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장광사가 처음에 금천으로 와서 소금천의 택왕을 항복시킬때, 택왕의 아우였던 양이길 이라는 인물도 같이 항복했습니다. 장광사나 눌친이나 양이길이 청군에게 충성을 바치는게 틀림없다고 여겼지만,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사실, 양이길은 대금천의 지도자, 사라분의 첩자였던 것입니다. 양이길은 형인 택왕의 아내, 즉 자신에게는 형수가 되는 여인을 항상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사라분은 그 부인을 빼앗아 양이길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에 감격한 양이길은 평생 사라분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항복한 후에, 양이길은 장광사에게 군사를 받아 전쟁을 돕는 역할까지 했는데, 물론 그러면서 청군의 이동과 움직임을 샅샅히 사라분에게 보고했고, 사라분은 이를 이용해서 매복 작전을 수월하게 벌였습니다.
이 사실이 폭로되자 건륭은 당연히 어서 양이길을 처형하라고 했지만, 눌친은 도리어 이렇게 말하면서 꾸물대었습니다.
"양이길은 물론 사형을 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장광사가 이전에 이미 투항을 받아들여 정벌에 나서도록 한지가 벌써 한 해가 지났는데, 지금에 와서 갑자기 목을 벤다면 명목이 서지 않습니다. 양이길이 어디서 무엇을 하건 그의 소식은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건륭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체면이고 무엇이고를 다 버린채 눌친과 장광사를 모두 잡아들여 목을 베어버렸고, 후임으로 부항이라는 인물을 파견했으며, 5만여명의 군대를 지원했습니다. 부항은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양이길, 양이길이 얻은 택왕의 부인 등을 모두 죽이고 체계적인 공격노선을 짜서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사라분은 첩자들이 모두 죽자 어려움에 처했고, 대패하여 3천여명 정도를 빼곤 대부분 전사하고 맙니다. 이에 그는 항복을 요청했습니다.
[출처: 정보- 책
317쪽/ 자료 수집-(54) ─ 금천 전쟁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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