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예술계의 영수’를 보다 - 표암 강세황 탄생 300주년
조선후기 문인화가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의 진면모가 그의 탄생 300주년을 맞아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간송미술관이 봄 전시로 5월 2일부터 26일까지 개최하는 ‘표암과 조선 남종화파’전, 국립중앙박물관이 6월 25일부터 두 달간 100여 점의 유물을 선보이는 특별전 ‘강세황: 예술로 꽃피운 조선 지식인의 삶’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와 삶을 살펴본다.
특히 한국미술사학회와 표암의 묘소가 있는 충북 진천군은 7월 5일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어 표암의 시·서·화 세계를 재조명해 문화사적 위상을 재정립한다는 계획이다. 학술대회에서는 안휘준 전 서울대 교수가 ‘표암 강세황을 다시 보다’란 기조강연을, 변영섭 문화재청장이 표암의 문집인 <표암유고>의 문화사적 의의를 각각 발표한다. 이어 표암의 예술세계를 시문(정은진 영남대 교수), 회화세계(정은주 한중연 연구원), 서예와 서론(이완우 한중연 교수) 등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강세황 초상(자화상), 보물 제590-1호, 51×88.7cm, 국립중앙박물관.
표암은 진경산수화의 겸재 정선(1676-1759), 인물화·풍속화의 관아재 조영석(1686-1761), 명대 남종문인화를 조선식으로 풀어내며 조선 남종문인화의 기틀을 마련한 현재 심사정(1707-1769), 제자 단원 김홍도(1745-1806?)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동안 전시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의 특별전(2003년) 정도가 손에 꼽힌다. 표암 전문가인 변영섭 문화재청장은 “표암이 추구한 사의(寫意: 사물의 형상이나 외형을 정밀하게 그리기보다 그 안에 내재한 정신과 의미를 강조하는 것) 등 시·서·화 예술세계를 제대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표암은 시·서·화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렸다. 문인정신과 높은 식견으로 서화평론가로도 이름을 떨치고, ‘예원(예술계)의 영수’로 불릴 만큼 화단에서의 역할도 컸다. 그는 명대 남종화에 비해 필치가 굳세고 단순소박하며, 여백을 강조한 공간 구성의 조선 남종화 정착에 이바지했다. 동양미학 속의 사의를 중시, 겸재를 비판하기도 했다. 노년에는 사군자에 일가를 이뤄 난과 대나무에서는 당대 최고로 불렸다. 별개로 다뤄지던 사군자를 한 벌로 묶어 그린 것도 그가 처음이다.
강세황의 ‘소림묘옥’, 56.5×122.0㎝, 간송미술관.
자화상·초상화를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산수화에 서양화법을 처음 도입했으며, 안경이나 종이 등 각종 문물의 유래와 재료 등을 탐구해 기록했다. 여덟 살에 시를 지은 그는 서예에서도 청나라 건륭제로부터 “미하동상(米下董上: 미불보다는 아래이나 동기창보다는 낫다)”이라는 평을 들었다. 전문가들은 표암의 글씨에서 추사 김정희의 전조가 보인다고 평가한다. 조선 남종화를 정착시키고, 서예에서도 일가를 이룸으로써 그는 19세기에 등장한 추사화파의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이번 간송미술관 전시에서는 표암의 산수화·사군자 18점과 동년배인 이광사·허필·이인상·최북, 제자인 김홍도·신위, 후학인 조윤형·이인문·김득신·신윤복 등의 작품 등 모두 70여 점이 선보인다. [경향신문 도재기 기자 2013.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