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 우리 현대시

문정희, 「먼 길」

Bawoo 2016. 1. 14. 19:46

 

 

문정희, 「먼 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 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시_ 문정희 -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으며,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새떼』『남자를 위하여』『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나는 문이다』, 산문집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이다』『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등이 있음.

낭송_ 황혜영 - 배우. 연극 '타이피스트', '죽기살기' 등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하모니' 등에 출연.


* 배달하며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앞의 신은 신발이고 뒤의 신은 신일 테다. 요 말장난 속의 진리! 지난 삶을 돌이켜 보니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지상과 나 사이에 신이 있어/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여기까지 왔'단다. 실제로 처음 걷기를 배울 때는 맨발이었을 테니, 시 속의 처음 걷기는 집밖 세상으로의 걸음마일 게다. 신은 땅을 딛고 걷기 수월하게 발을 감싸는 물건이다. 그 신처럼 신이 세상을 딛고 걷는 고단함을 덜어줬을 수도 있으리.
그런데 신이 굴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새처럼 바람처럼 강물처럼, 신이 없거나 신이 가벼운 존재들이 무한 부러운 순간.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것. 자식이니 밥벌이니 이런저런 욕망이니 책임이니, 얼마나 발목 잡는 일이 많은가? 살아 있는 한 신을 신고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그렇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기쁨은 살아 있는 기쁨이다. 그래서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시인의 신, 기실 시인의 발, 시인의 몸! 신을 벗기는커녕 시인은 오늘도 새 신을 장만하리. 그 신을 단단히 신고 세상을 두리번거리리. 그 거취와 행로를 함께 하는 신이여! 문정희 선생님은 활력 넘치는 코스모폴리탄 시인이다.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그의 시들지 않는 매혹과 열정과 감격을 엿볼 때마다 나는 감탄스럽다. 선생님의 신 속에 늘 신이 함께 하시기를!

문학집배원 황인숙


출전_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