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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혼자라도 잘할 수 있겠는가?

Bawoo 2016. 1. 16. 09:51

요즘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처럼 배꼽잡고 웃으면서도 “맞아 맞아” 하며 무릎을 친 사람들, 많았을 거다.

 “육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놀랍지 않은가? 코앞에 닥친 ‘백세시대’에 딱 맞는 말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재수 없으면” 혹은 “우주인이 쳐들어오기 전에는” 백 살까지 산다는 게 우스개였다. 그러나 이미 한국인 남녀 평균 기대 수명이 80세를 훌쩍 넘었고 해마다 1~2년씩 늘어간다니 그야말로 백세인생이 남 얘기가 아니다. 나도 한국 나이로 오십대의 마지막 해, 평균으로만 쳐도 아직 수십 년이 남았다. 과연 난 80살이 넘어서도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연초여서인지, 주위에 은퇴를 앞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요즘 모임마다 가장 뜨거운 주제는 은퇴 후 3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다. 대부분은 여행이나 봉사·종교·취미활동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한다. 그래야 시간이 잘 갈 거라고.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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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에 표지 모델을 한 덕분에 매달 보게 되는 50대 이상을 위한 잡지에서도 노후준비의 3대 필수요소로 체력·경제력·인간관계를 꼽는다. 음, 이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여기에 한 가지가 반드시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혼자 있는 힘’이다.

 끊어졌거나 느슨해진 인간관계 회복을 위해, 구체적으로는 외롭지 않기 위해 동창회나 동호회에 꾸준히 나가고 각종 SNS 활용을 하라는 조언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은퇴 후가 외로운 건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과 단 둘이 있어본 경험이 적어서 그 상황이 낯설고 불편하고 견디기 어려운 건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자신과 있는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한다면 온라인 오프라인 친구가 아무리 많다 해도 기나긴 노년의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혼자 있는 힘! 이 힘은 나를 나답게 살게 해주는 최대의 동력이다. 여고시절, 학교 앞 분식집에 처음으로 혼자 들어가면서 얻은 자유이자 정신적인 독립이기도 하다. 그전까지는 나 역시 보통 여고생처럼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학교 오갈 때도, 시험공부 할 때도 도시락을 먹을 때도 심지어 화장실 갈 때도 친구들과 같이 갔다. 혼자 조용히 있는 친구들까지 억지로 끌어들이며 떠들썩하게 지냈다. 그렇게 해주는 게 좋은 건 줄 알았다.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겨울 날, 무슨 일인지 혼자 늦게까지 학교에 남게 되었다. 교문을 나서는데 몹시 춥고 배가 고팠다. 학교 앞에는 친구들과 거의 매일 가는 분식집이 있었지만 거길 혼자 가려니 쑥스러워서 망설여졌다. 그러나 따끈한 라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분식집 아줌마는 늦은 시간에 혼자 온 나를 보고 필경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내 눈치를 슬슬 보았다. 그러고는 시키지도 않은 떡볶이에 순대까지 갖다 주면서 ‘괜찮아. 다들 그렇게 싸우면서 크는 거야’라고 하셨다.

 한번 해본 일은 쉬워진다던가, 며칠 후 비 오는 오후에 학교 뒷문으로 몰래 나가 혼자 짬뽕을 먹었다. 짜릿했다. 들어오다 훈육주임에게 걸려 된통 혼이 났지만, 혼자 식당에 갈 수 있게 된 내게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누구랑 같이라도 좋지만 혼자 있어도 불안하거나 민망하거나 남이 어떻게 볼까 하는 데서 벗어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한 상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대학입시에 떨어지고 나서 아픈 가슴 달래며 앞날을 설계하려고 혼자 완행기차와 밤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갈 엄두가 났고, 6년간 혼자서 배낭 하나 메고 세계일주도 할 수 있었다. 이게 다 ‘같이 가면 좋지만, 혼자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덕분이다.

 단언컨대 나를 키운 건 8할이 ‘혼자 있는 힘’이다. 만약 혼자 밥 먹고 영화 보고 여행 가는 게 싫었다면, 만약 혼자 조용히 일기 쓰는 시간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분명히 즐겁고 자유롭게 기왕이면 남 도와주고 살겠다는 내 인생 목표이자 원칙과는 크게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 보면 여고시절, 라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건 내 일생일대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 운이 지금까지 이어져 ‘혼자라도 할 수 있는 힘’ ‘혼자서도 잘 노는 힘’을 키우는 게 나만의 확실한 노후대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게 살다 보면 80살이 되어도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서도 잘해요’는 유치원 어린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혼자라도 잘할 수 있겠는가?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세계시민학교 교장

[출처: 중앙일보] [한비야의 길!] 혼자라도 잘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