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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지휘자의 독재

Bawoo 2016. 2. 16. 11:06

독재자는 다양성 말살하고 자기 일탈에 빠지기 일쑤다
예술·경영·정치도 카리스마보다 진정성이 중요한 시대

 

설 연휴에 본 영화 ‘유스’의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정작 영화를 볼 때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고 싶어질 줄이야. 자극적이고 야한 영상이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숙연하게 만드는 것이 놀랍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휘자, 영화감독, 축구스타, 여배우들도 눈부신 청춘과 육체 앞에서는 초라하기만 하다. 나이가 들수록 미래보다는 과거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내 전공 탓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은퇴한 지휘자에게 온통 관심이 쏠렸다. 음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주변 사람들과 불화하고 가족에게도 상처만 주었던 프레드.

 원래 지휘자는 욕을 많이 먹는 직업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소리를 내는 것은 단원들이지만, 그 많은 소리를 하나의 음악으로 만드는 것은 지휘자다. 곡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지휘자 혼자서 결정한다. 단원을 뽑고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권한도 대부분 지휘자가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독선’과 ‘안하무인’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다. 앞에서는 “마에스트로”라며 존경을 받지만 뒤돌아서면 욕을 먹는 것이 지휘자다. 서양에는 유독 지휘자를 놀리는 농담이 많다. 주로 과대망상증에 걸린 지휘자들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번스타인이 카라얀에게 "내 음악적 재능은 신이 내린 것”이라고 했더니 카라얀이 "나는 너한테 재능을 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지 않은가.

 카라얀은 신처럼 군림했던 지휘자다. 베를린 필의 단원 선발과 오케스트라 운영은 단원 투표로 결정하지만 실제로는 카라얀에게 모든 권한이 있었고, 그는 이 권력을 아끼지 않고 휘둘렀다. 베를린 필과 종신계약까지 맺은 그였으니, 연주를 하고 싶으면 누구든 그에게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성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바그너 가수 비르기트 길손조차 리허설 일정을 알지 못한 채 그가 부를 때까지 무작정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신세였다. 끝내 그의 독선을 참지 못한 아그네스 발차가 ‘카르멘’ 공연을 포기하고 떠나버렸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지휘자가 반드시 독재자여야 할까. 독재적인 카리스마가 지휘자의 덕목이라는 주장도 있다. 각자 자신의 음악 세계를 갖고 있는 전문 연주가들이 모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휘자가 독재적인 것은 아니다. 전임이었던 카라얀과 달리 아바도는 단원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마에스트로라 불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는 협력과 소통을 통해 그들에게서 최고의 음악을 끌어냈던 지휘자였고, 그에게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복종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음악을 완성해 가는 소중한 동료였다.

 그의 음악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에게 큰 실망을 남긴 채 정명훈이 결국 서울시향을 떠났다. 통제받지 않는 권력과 일방통행, 편법적 비용 지출이 원인이다. 절대권력은 부패한다고 했던가. 독재의 폐해다. 응당 그가 책임져야 할 사안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 그가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하다. 그가 서울시향과 함께 만들어낸 예술적 성취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가도 같이 연주하고 나면 모든 것이 용서되더라는 한 시향 단원의 이야기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웅변한다. 그래서 그의 퇴장이 더욱 안타깝다.

 많은 지휘자가 독재적이 되는 이유는 도제교육을 통해 형성되는 개인주의적이고 폐쇄적인 경험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부터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이 배제된 채 오로지 기예만이 강조되는 생존경쟁이 원인이다. 그것이 예술적 성과주의와 만난 것이 바로 지휘자의 독재다. 때로 독재가 훌륭한 음악적 성취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가능성을 말살하거나 권력 과잉으로 인한 자기 일탈에 빠지기 일쑤다.

 이것이 어찌 음악세계만의 이야기이랴. 소통과 배려 없이 조직을 이끌 수는 없는 법이다. 자칫 개인은 사라지고 냉혹한 효율성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거나 내부적인 갈등과 균열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 테니까. 예술도, 경영도, 정치도 카리스마보다는 진정성이 가치를 발휘하는 시대다. 그런 지휘자가 어디 없을까.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출처: 중앙일보] [삶의 향기] 지휘자의 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