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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Anastasia)

Bawoo 2016. 2. 17. 00:36

 

아나스타샤 (Anastasia)

追想

 

주연 : 잉그리드 버그먼, 율 브리너

 

1.1928년파리, 몰락한 러시아 황실의 장교였던 부닌(율 브리너)은 센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는 한 여인을 구한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공주인 아나스타시야와 흡사한 외모의 그녀는 기억장애로 과거는 물론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다. 부닌은 로마노프 왕조의 막대한 유산을 노리고 그녀를 훈련시켜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행세를 하게 한다. 러시아 귀족들에게 그녀를 소개하는 등 공주로 인정받기 위한 과정에서 두 사람은 차츰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고, 그녀가 진짜 공주일지도 모른다는 점들이 드러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에 괴로워하던 여인은 공주 행세를 포기하려 하고, 부닌은 그녀를 설득하여 황태후를 만나게 한다. 이 자리에서 그녀가 무심결에 드러낸 습관들이 그녀가 공주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만, 결국 그녀는 왕녀의 지위를 버리고 부닌과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난다.[위키백과]

 

러시아의 짜르(러시아 황제의 칭호)의 성에서 평화롭기만 하던 8세의 아나스타샤의 생활은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한 낙원 그대로 였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아 사악한 마술사 라스푸틴의 저주가 온 황실 가족에게까지 뻗치면서 점차 사라져 가고,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폭도들의 습격으로 황실이 공격을 받음으로서 라스푸틴의 저주가 성공을 거두게 된다. 폭동의 틈바구니에서 어린 아나스타샤와 그녀의 할머니 마리는 황실의 하인인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아 성을 빠져 나와 파리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려 하나 군중들 틈에 섞인 아나스타샤는 그만 할머니와 헤어져 혼자 남게 된다. 아나스타샤에게 남겨진 건 할머니 마리가 남겨준 뮤직 박스 열쇠뿐이고 그열쇠에는 언젠가 파리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러시아 제국이 사라진 후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18세가 된 아나스타샤는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린 채 아냐라는 이름을 가진 러시아 소녀로 성장하는데...[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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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과 함께 로마노프 왕족(Romanov Dynasty-Rulers)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일부 귀족과 시종들은 안전하게 피신을 했지만 황제와 그 가족들은 붙잡혀 감옥 생활을 하다가 1918년에 사형당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황실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살아있다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세월은 갈수록 소문은 무성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이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막내딸인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하는 한 여인이 등장했다. 만일 아나스타샤가 살아 있다면 이 영화의 내막은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 결혼으로 인한 스캔들로 7년 만에 미국 영화에 출연한 잉그리드 버그먼은 당시 4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순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혼돈과 불안 속에서 방황하는 내면 연기를 훌륭하게 표출함으로써 1956년뉴욕 영화 비평가상》을 비롯하여, 1957년골든 글로브》상과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율 브리너의 냉정하면서도 강인한 남성미와 앨프리드 뉴먼(Alfred Newman)이 담당한 웅장하고 아름다운 배경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화려한 귀족사회의 파티와 의상들도 또다른 볼거리이다. 이 영화가 개봉됨으로써 아나스타시야의 생존에 대한 미스터리를 증폭시키면서 전 세계 여성들의 신데렐라 꿈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2.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러시아어: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Анастас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1901년 6월 18일 - 1918년 7월 17일)는 로마노프 황족으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헤센의 알릭스) 황후의 4황녀이다. 그녀 위로는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라는 세 언니가 있었고 아래로는 남동생인 황태자 알렉세이가 있었다.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쫓겨나 볼셰비키에 의해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되었다가 훗날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황제파)의 진주소식을 들은 볼셰비키에 의해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밤중이라 자고 있던 니콜라이 2세 황제와 가족들을 이동이 있을 것이라면서 깨워서 모이게 한 뒤, 총살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세이 황태자만 살해당했으며 황후와 황녀들은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살해당했다는 설과, 아나스타시야 혼자 생존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야의 죽음이 DNA 조사로 증명되었다. 2008년 1월에 러시아 과학자들이 어린 남자와 여자의 시체가 8월 2007년에 발견되었다고 했으며, 그들이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와 그의 언니들 중 한 명이라고 하였다.[1] 2009년 3월에 DNA 조사의 결과가 밝혀졌으며, 로마노프 공주들은 모두 죽었다고 증명되었다.[2]

2001년, 아나스타시야 공주는 가족 및 다른 러시아 혁명시의 교회 순교자들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녀로 시성되었다.

 

인물

네 명의 공주들 중 막내로 태어난 아나스타시야는 가장 몸집이 작았지만, 밝고 활발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공주들끼리는 사이가 무척 좋았으며, OTMA(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시야)의 머릿글자를 합성한 싸인을 결속의 상징으로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항상 딱딱한 캠핑용 침상을 갖고 다니며 그 곳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아나스타시야는 동생인 알렉세이혈우병으로 고생을 할 때는 극진히 곁에서 보살펴 주곤 했다. 가족들 사이에서의 회화는 러시아어는 물론 영어로도 행해졌었기 때문에 영어에 능숙하였지만, 독일어에는 다소 서툴렀다고 한다. 취미는 사진 촬영으로, 그녀가 찍은 사진을 모은 사진집도 출판되고 있다.

전설

1918년 5월,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는 배 안에서 찍은 사진. 아나스타시야의 마지막 사진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애나 앤더슨이라는 여자가 자신이 아나스타시야라고 주장하자, 아나스타시야가 생존했었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여, 아나스타시야 전설이 태어났다. 또 이 내용을 기초로 할리우드에서 자신이 아나스타시야 공주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공주로서의 교육을 받는다는 영화 《아나스타샤》와 아나스타시야 생존설에 근거한 만화영화아나스타샤》가 제작되었기 때문에, 아나스타시야 생존설을 믿는 사람은 여전히 적지 않다.

 

또한 아나스타시야 생존설에 의하면 아나스타시야는 총살을 당할 당시 총알이 아나스타시야의 몸을 관통한 것이 아니라 아나스타시야가 입고 있던 코르셋의 철제 단추에 박혀서 아나스타시야는 살아남았고 홀로 그 곳을 탈출한 아나스타시야는 프랑스군 장교(대위)와 같이 도피행각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앤더슨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20년대에 독일에서 옛 제정 러시아 황실의 유산 상속권을 요구하는 소송을 일으켰다. 그녀에게는 귀의 형태나 다리 모양 등 아나스타시야와 흡사한 신체적 특징이 있었던 데다가, 옛 황실에 관련된 측근 밖에는 알지 못했던 자세한 내막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는 점 때문에 일부 옛 러시아 제국 귀족들을 포함한 많은 지지자를 얻었지만, 정작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한 점과 중요한 대목에서는 기억이 애매모호한 점 등 의문점도 많아, 소송은 장기화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진위 확정이 불가하다 하여 각하되었다. 그 후, 지지자들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결혼까지 했지만, 1984년에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아나스타시야라고 계속 주장하고 다녔다.

 

1991년에 아나스타시야의 남동생인 알렉세이 황태자와 아나스타시야 또는 그 자매의 한 명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유골이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다. 미토콘드리아 DNA 감정 결과, 이 유골은 확실히 로마노프 왕조의 일원인 것으로 확인되었고 유골의 주인은 각각 아나스타시야의 친언니인 황녀 올가 니콜라예브나황녀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를 포함하여 당시 살해당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 그리고 관련인물들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이들 중 사망 당시 21살이었던 타티아나는 키가 65.6 inch(166 cm)인 것까지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앤더슨이 죽은 후 보관되고 있던 그녀의 치아와 머리카락의 일부를 이용한 DNA 감정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라 황후의 언니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에딘버러 공의 외가의 조모에 해당한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에서 발견된 유골과 에딘버러 공, 그리고 로마노프 왕조의 일원이라고 추정되는 앤더슨 등 세 미토콘드리아 DNA를 비교한다는, 이제껏 없었던 과학적인 검증이었다. 그 결과, 에딘버러 공과 유골의 DNA는 정확히 일치했지만, 앤더슨의 DNA는 그 어느 쪽과도 일치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앤더슨과 아나스타시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앤더슨은 그녀가 죽는 1984년까지 끝내 자신이 아나스타시야라고 확신한 채로 죽었으며 그녀의 묘비에도 아나스타시야의 이름으로 적혀 있다. 애나 앤더슨 외에도 아나스타시야 여대공이라 주장한 여성은 유제니아 스미스(1899년 ~ 1997년), 엘레노라 크루거(? ~ 1954년), 나탈리야 페트로브나 빌리호제(1900년 ~ 2000년), 나데즈다 이바노브나 바실리예바(? ~ 1971년)가 있다.[위키백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사이에서 난 막내딸이다.

10월 혁명 뒤 볼셰비키들에 의해 감금당해 있던 지하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것 같다. 처형이 있은 뒤 외국에서 몇몇 여성들이 아나스타시야를 자칭하고 나타나 주기적으로 세인들의 억측과 소문의 대상이 되었다. 이 여인들은 저마다 처형을 모면하고 러시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고 주장했으며, 일부는 스위스은행에 있는 로마노프 왕조의 재산 상속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자신을 애나 앤더슨이라고 했던 여성이었다(감정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그는 프란지스카 샨스코프스키라는 폴란드인이라고 함).

그녀는 1968년 미국의 역사학교수 J. E. 매너헌과 결혼했으며 말년에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살다가 1984년 2월 12일 죽었다. 1970년까지 그녀는 로마노프 왕조의 법적 재산 상속자로 인정받고자 했으나, 그해 서독 법원은 그녀의 소송을 최종 기각하고 러시아 황실의 남은 재산을 메클렌부르크 공작부인에게 넘겨주었다. 그녀의 생존설을 소재로 프랑스의 마르셀 모레트(1909~72)가 〈아나스타시야 Anastasia〉라는 희곡을 썼고 이것이 1954년 초연되었다. 1956년 미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잉그리드 베리만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