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시 동부전선에서 전투를 치른 소련의 스나이퍼들은 전장의 킬러로서 당당하게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최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의를 꺾고 적의 지휘관과 참모는 물론 포병과 공용화기사수, 무전병, 운전병, 헌병 등 주요 표적을 골라 쓰러뜨렸다.
소련군의 대추격전에서 최고의 스나이퍼들이 그 살인의 기록을 크게 갱신했다. 시도렌코(I. Sidorenko)가 500여 명을 사살했고, 야코플비치(N.Yakovlevich) 496명, 쿨베르티노프(Kulbertinov) 486명 등 많은 저격수가 독일군에게 복수했다. 실제 이들의 전과는 자이체프의 명성을 능가하는 끔찍한 기록이었다.
과거 나폴레옹 군대를 곤경에 빠뜨린 러시아 코사크족의 명예와 용맹성이 저격술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국토를 불태워 버린 적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전장에 투입돼 훌륭한 전사로 싸웠다. 소련군은 특히 산악지방에서 동원된 여성들을 훈련시켜 여군 저격부대를 편성, 전장에 투입했다.
이들은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저격전을 벌여 수많은 독일군을 사살했다. 여군 저격부대장이면서 독일군 300여 명을 사살한 로사 사니나는 “조국을 피로 물들게 한 원수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전쟁 동안 그들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됐다. 독일군의 폭격과 추위, 배고픔, 지옥을 방불케 하는 가혹한 전쟁터에 여성들이 내몰렸기 때문이다.
또 독일군 저격수들의 이른바 ‘소련군 사냥’도 만만치 않았다. 전쟁에 참여한 2000여 명의 소련 여군 스나이퍼 중에서 후일 살아남은 자는 겨우 500여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전투는 여성들에게 참혹했다. 소련군의 최전선에 투입돼 저격전을 벌이고도 다행히 생존한 여군 스나이퍼 칼루지나(Kalugina)는 독일군과 싸운 저격전의 실상과 그 지옥과 같았던 전장의 모습을 회상했다.
“살인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참호 위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죽어가는 병사들과 화약냄새만 온종일 진동했다. 그날 나는 친구 타냐·마르샤와 같이 전선을 지켜보기만 했다. 너무 무섭고 힘들어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동무들은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복귀해 그들의 자랑스러운 경험담을 들었다.
마르샤와 나는 밤새 자아 비판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겁쟁이! 겁쟁이! 겁쟁이! 왜 우리가 전선에 온 거야? 독일놈들에게 복수를 하자!’우리는 너무 부끄러웠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다음날 우리는 다행히 독일군 한 명씩을 쏘았다. 이제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끔찍한 대가가 곧 뒤따랐다.
마르샤와 내가 교대하고 위치를 바꾸기 위해 몸을 살짝 일으키는 순간이었다.‘퍽!’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총소리와 함께 마르샤가 쓰러졌다. 피투성이가 된 채…. 나는 마르샤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이때 장교들이 달려와 소리쳤다.“조용히 하라! 독일놈들이 박격포를 쏜다! 우리는 그곳에 마르샤를 묻고 돌아왔다.”
독일군과의 저격전에서 명성을 날린 전설적인 소련 여군 스나이퍼들은 전쟁사에 공포의 살인 기록을 남겨 놓았다. 루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Pavlichenko)가 309명을 사살했고, 저격부대장인 니나 알렉세이 로코프스카야(Nina Alexe Lobkovskaya)가 308명을 사살했다. 그 외에 나탈리 마리아, 로사 예고로브나 사니나 등 많은 여성 저격수가 활약했다.
소련 최고의 여군 저격수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는 미모의 키에프 주립대학 대학생이었다. 그녀는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 입대해 소련군 제25보병 사단의 저격수가 됐다. 학생시절 사격선수였던 그녀는 오데사 지역에서 두 달 반 동안 187명을 사살했고, 1년 후 세바스토플 전투에서 박격포탄으로 부상당하기 전까지 10개월 동안 독일군 309명을 사살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했다.
그가 부상당하자 소련 군당국은 영웅적인 여성 스나이퍼를 구조하기 위해 흑해의 잠수함까지 동원해 후송시키는 데 성공했다. 루드밀라는 소련군의 사기를 올려주는 최고의 상징적 인물이면서 병사들의 우상이었다. 루드밀라는 부상이 완쾌되자마자 소련 시민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백악관을 방문했다.
만일 그녀가 부상당하지 않고 종전시까지 작전했다면 최소한 500~1000명의 독일군을 사살했을 것으로 추정됐다.최고의 살인 기록을 수립한 그녀는 1974년 10월 58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치열한 전장에서는 독일군과 연합군의 저격전이 불붙었다. 독일군 저격수들은 국가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독일군 스나이퍼들에게 영예스러운 저격수 자격 휘장이 제정됐는데 이 휘장은 타원형으로 떡갈나무 잎과 독수리 머리로 장식했다.휘장은 3등급으로 구분해 적 20명을 사살한 저격수에게는 초급, 40명을 사살하면 중급, 그리고 60명을 사살하면 상급의 휘장을 수여하도록 했다.
그러나 저격수들이 이 휘장을 단 채로 연합군에게 생포된다면 신분이 노출돼 끔찍한 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1944년 독일 정부는 기울어져 가는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스나이퍼들에게 특별한 상품을 내걸었다. 적 50명을 죽인 나치 친위대 저격수에게는 손목시계를 주고, 100명을 죽이면 사냥용 소총을 선물로 준다고 했다.
그러나 150명을 죽이면 히틀러로부터 직접 사슴 사냥에 초대받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당시 독일군의 저격용 소총은 7.92㎜ 카라비너(karabiner) 98K로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병부대가 사용한 게베르(Gewehr) 98 모델보다 약간 더 짧은 스타일이었다. 구식인 이 카라비너 98K 소총은 6배율의 망원 조준경을 장착해 정확하고 믿을 만했기 때문에 저격수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 외에도 보병 소총수의 화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독일군은 7.92㎜ 탄의 속도를 내는 자동식 게베르 43(G43) 소총을 새로 도입했다. 이 총은 구형 게베르 41소총을 개량하고 소련 토카레프 소총의 장점을 따서 망원 조준경을 부착했기 때문에 전투시 저격용으로도 쓰기 편리했다. 그러나 스나이퍼들은 구식 소총을 더 선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 소련군 345명을 사살한 독일군 최고의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 Hetzenauer)도 카라비너 98K 소총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한 발로 반드시 한 명씩 죽인다’(One Shoot, one Kill)는 확고한 스나이퍼의 살인 법칙을 고수하는 자였다. 헤체나우어는 적을 단지 한 명씩 골라서 사살할 수 있는 진정한 저격수라면 결코 반자동식 무기가 필요치 않다고 강조했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독일군은 저격수 훈련을 최고 수준으로 강화시켰다. 소련군의 저격술은 물론 전장의 위장술과 전술적 행동을 숙달시키고 적의 허를 찌르는 기만작전과 투지력을 강조했다. 그들은 늑대같이 거칠고 사나운 스나이퍼들을 제조하기 위해 총잡이들을 긁어 모으고 전문적인 살인 교육을 실시했다.
저격수 헤체나우어와 독일 제3 산악사단 소속 동료이며 연합군 257명을 사살한 알레르베르거 (S. Allerberger)는 성공적인 저격수의 자격요건으로 인내심과 불굴의 투지, 그리고 예리한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연합군의 저격술까지 터득한 헤체나우어도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저격수의 기본 자질을 특별히 강조했다. “전투에서는 더욱 꼼꼼하고 생각이 깊으며 두뇌가 우수한 사람이 적과 대결해 승리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 저격수는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무서운 전장의 비밀무기로 군림했다. 저격수가 보병중대와 소대급으로 배치되는 소련군 체제와는 달리 독일군 저격수들은 보병대대급으로 편성돼 직접 대대본부의 통제를 받으며 중요한 목표를 공격했다. 전장에서 고수들의 저격능력을 비교해 보면 헤체나우어는 대개 700~800m의 거리에 서 있는 사람을 명중시킬 수 있고, 알레르베르거는 600m 정도라고 했다.
독일군 저격수들은 통상 적을 혼란시키기 위해 장거리에서 결정적인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훈련했다. 이것은 적의 전술적인 행동을 방해하거나 최소한 행동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중요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저격전에서 헤체나우어는 1100m 떨어진 거리에서 서 있는 표적을 명중시켰다고 하지만, 700~800m 이상 사거리에서는 쌍안경의 정확한 판독이 어렵고 또한 명중을 확신하기도 어려운 장거리가 분명했다.
독일군들은 통상 저격수와 관측수가 한 팀으로 활동했다. 목표물의 탐색과 포착, 그리고 주요 표적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이들 저격팀의 세심한 주의와 협조가 필요했다. 관측수는 쌍안경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살펴 표적을 탐색하고 이를 저격수의 조준경 속으로 유도했다. 저격전의 성공은 종종 또 다른 저격팀의 협조와 박격포·기관총 등 보병 지원화력의 도움도 필요했다.
그러나 헤체나우어는 특별한 지원없이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전선의 은폐된 진지에서 연합군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었다고 증언했다.“아군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날 밤, 포병이 공격준비사격을 했지만 우리는 수적으로 열세했고 탄약도 부족해 오히려 적의 대 포병 사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단독으로 적 지휘관과 포병만을 골라 장거리 저격을 가했다. 결국 적은 잠잠해졌고 아군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상황은 전술적 기동이 중요했고 대규모 강력한 지원 화력들, 특히 박격포와 경기관총(LMG) 등의 출현으로 소총병의 역할은 위축됐다. 그러나 영국군에서는 잘 조준된 소총의 진가를 보여주기 위해 경기관총 사수와 저격수를 놓고 실험을 실시했다. 각각 6개의 철판 표적을 향해 제한된 시간 내 사격해 철판을 쓰러뜨리도록 했다.
단 30초 동안 경기관총이 하나를 명중시키기도 전에 저격수는 6개의 철판을 모두 넘어뜨렸다. 이 결과는 양적인 사격보다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는 증거였다.북아프리카 사막의 탱크전이나 고속기동전 상황에서는 저격수의 역할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튜니지 산악전투와 시칠리 섬, 이탈리아 전투에서는 일단 전쟁의 속도가 둔화되자 저격수가 필요했다.
탁 트인 산악 고지에서는 종종 400m를 훨씬 넘는 장거리 사격의 가치가 증대됐다. 저격전에서는 지능적이고 인내심 있는 감시·관측만이 성과를 가져오는 열쇠이며, 이는 적이 방심하거나 저격수의 존재를 무시할 때 효과적이었다. 이탈리아 전투는 이러한 원칙이 성공한 사례로서 영국군 부대가 진지를 선정하기 위해 세니오(Senio) 강을 따라 전진하고 있을 때 전사작가 쇼어 대위가 당시 상황을 목격했다.
“전방 소대가 강에서 200m 떨어진 작은 마을을 포위했다. 저격수들이 높은 지붕에 올라가 독일군이 점령한 고지를 관찰했다. 독일군들은 조심스럽게 매 시간 초병 교대를 했다. 아군 저격수들은 사격을 자제하고 독일군들이 방심해지기를 기다렸다. 온종일 기다린 끝에, 오후 늦게 마침내 희망이 이루어졌다. 잠복 12시간 만에 적군 6명의 허리 윗부분이 보였다.
배치된 아군 저격수 4명은 준비한 다음 각자 한 명씩 독일군을 골라 동시에 사격했다. ‘탕!-’ 4발의 총성이 울리며 그중 3명이 쓰러졌다. 그러자 곧 뒤쪽에 숨어 있던 동료들이 재빨리 시신을 언덕 위에서 끌고 내려갔다. 독일군의 초병 교대가 다시 매우 조심스러워졌고, 저격수들은 더 이상 사격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잠복 16시간 만에 그곳에서 2명의 독일군이 또다시 공동묘지로 보내졌다.
저격수들은 28시간 동안 오직 두 차례의 ‘동시 사격’만을 해야 했던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이날은 아군의 피해 없이 한 장소에서 5명의 독일군을 사살할 수 있었다.” 프랑스 노르망디 전투는 독일군 스나이퍼에게 특히 유리했다. 내륙의 전원지대와 주변을 둘러싼 관목 숲은 좋은 은폐 장소와 대피처를 제공했다.
이곳에서 방어전의 이점을 가진 독일군 저격수들은 매우 효과적으로 표적을 쏘았다. 영국과 미국 병사들에게는 저격수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다가왔고 그 공포심 때문에 대부분의 소총화력이 무기력해졌다.미군의 종군기자인 어니 파일(Ernie Pyle)은 노르망디의 위기상황을 이렇게 본국으로 송신했다.
“독일군 저격수들이 도처에 있다. 나무와 건물 그리고 수많은 잔해와 잡풀 속에 저격수들이 숨어 총을 쏘고 있다. 모든 소로나 관목지대·울타리 등에도 그들이 있다.” 영국군 저격수 쇼어 대위는 극도의 공포와 긴장 속에서 어떻게 사격이 이루어지는 가를 알아보기 위해 부대원들에게 실험을 실시한 결과, 저격수나 소총수는 박격포·포병사격·기관총 등의 집중사격을 받으면 큰 혼란에 빠진다는 것을 알았다.
독일군 저격수들은 적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소총만으로도 그러한 혼란과 두려움을 초래했고, 이는 목격자들의 증언에서도 나타났다. “독일군 스나이퍼들이 진지를 기어 오르고 증원부대가 뒤따라온다. 치열한 사격전이 전방 진지에서 일어났다.저격수는 어느 곳이나 숨어 있다. 그들이 선택하는 먹이들! 장교들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든 특징적인 마크를 가리고 권총 대신 부하들처럼 소총을 들고 다닌다. 지도나 쌍안경을 멀리하고 어깨의 계급장 표지는 눈에 안 띄게 소매에 붙이고 있다. ”
부하들 앞에서 군대의 상징인 자신의 계급장 표지를 숨기는 비겁한 장교와 부사관의 태도는 적어도 연합군 지휘관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그러나 저격수 쇼어는 노르망디 상륙시 부사관들의 계급장과 장교들의 넥타이를 가리도록 당부했다. 적어도 저격수의 세계에서는 우선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만 지휘관들의 태도는 강경했다. 부사관들에게는 즉시 계급장을 드러낼 것을 명령했고, 장교들은 반드시 넥타이를 매야 하며, 부하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만약 죽더라도 명예로운 장교의 길을 택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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