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를 조장하는 글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렵다고 떠들어대면 개인·기업의 심리가 더 위축되기 때문이다. 악순환 속에 진짜 위기가 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쉬쉬하는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다. 현실을 호도할 수 있다. 때로는 냉정한 진단이 필요하다. 요새가 그때인 것 같다.
1997년 외환위기와 비교해보자. 당시 위기의 원인이 수년간 누적됐다. 무리한 원화 절상, 경상적자 누적, 차입경영 확대, 단기자금을 장기로 운용 …. 그래도 96년까진 그럭저럭 괜찮았다. 96년 성장률이 7.2%에 달했다. 한보 사태가 터진 97년 초만 해도 그해 말에 국가부도 사태를 맞을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외환위기는 급성으로 왔다.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회복도 빨랐다. 98년 -5.7% 성장을 딛고 99년 10.7%로 반등했다. 극적인 V자형 회복.
지금은 만성으로 진행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당수 전문가들은 외환위기를 떠올리며 V자형 회복을 자신했다. 신중한 이들은 침체를 이어가다 상승세를 타는 U자형을 예상했다. 가장 비관적인 의견이 침체를 두 번 겪는 W자형(더블딥)이었다. 이 모든 예상이 틀렸다. 제대로 된 회복은 나타나지 않았다. L자형의 길고 답답한 침체가 8년째 이어지고 있다.
97년과 가장 큰 차이는 세계경제다. 당시는 동아시아 일부 국가만 병에 걸렸다. 통화위기가 97년 7월 태국·인도네시아, 10월 홍콩·대만, 11월 한국으로 번졌다. 산업의 문제라기보다는 해외투자자의 자금 회수로 촉발된 신용의 위기였다. 선진국 경제는 나쁘지 않았다. 그해 미국은 4.5% 성장했다. 일본도 괜찮았다. 개방이 덜 된 중국도 위기를 피해 갔다. 세계 교역량이 매년 4~5%씩 늘던 시절이다. 외환위기로 원화가치가 떨어지자 우리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생겼다. 수출이 크게 늘며 경제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숨에 살아났다.
지금은 다르다. 세계 각국이 크고 작은 병에 걸려 있다. 상대적으로 괜찮다는 미국도 세계경제 침체의 덫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다. 지난해 세계 교역량은 11.8% 감소했다. 우리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사실상 첫 경제위기를 맞았다. 중동 산유국은 저유가로 고전 중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우리 제품을 사줄 곳은 마땅찮다. 원화가치가 떨어져도 수출은 줄고 있다.
국내 여건도 좋지 않다. 기업의 파이팅이 눈에 띄게 줄었다. 97년 기업들은 과도하게 일을 벌이다 궁지에 몰렸다. 외형을 늘리기 위해 돈을 많이 빌린 게 화근이었다. 유통·레저처럼 생소한 분야에 진출했다가 쓴맛을 보기도 했다. 무리한 경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뭔가 해보려는 기업가정신이 넘쳤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기업들이 위축돼 있다. 의사결정도 느리다. 신성장 동력을 개발하거나 유망한 업태로 전환하는 데 한 발씩 늦고 있다.
정부도 부실해졌다. 외환위기 때는 탄탄한 재정이 버팀목이 됐다.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기회복의 불씨를 살렸다. 97년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11.9%에 그쳤다. 재정만 놓고 보면 국가부도가 나는 게 이상할 정도로 튼실했다. 그 비율이 2004년 22.4%, 2009년 30.1%, 2014년 35.9%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올해는 40% 선에 달할 전망이다.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이 나설 여력이 줄고 있다는 의미다.
더 심각한 건 개인이다. 가계부채가 1200조원을 넘어섰다. 곳곳에 버블이 있다. 양극화로 20년 새 중산층 비중이 75%에서 65% 수준으로 줄었다. 중산층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대부분 빈곤층으로 추락했다.
먹고살기 힘들어지면서 사회 갈등의 양상 또한 복잡해졌다. 기존의 이념·지역 갈등에 세대·빈부 갈등이 더해졌다. 금수저·흙수저 같은 수저론은 최근의 빈부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일자리와 연금을 둘러싸고 세대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
대내외 경제 여건이 97년보다 나은 게 별로 없다. 그런데도 위기를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온통 선거판에 몰두해 있다. 기득권 지키기와 정쟁이 가득하다. 총선이 끝나면 대선판으로 몰려갈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는 위기다.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떨어선 안 되지만, 절박한 마음은 갖고 있어야 한다.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출처: 중앙일보] [서소문 포럼] 1997년 vs 2016년
1997년 외환위기와 비교해보자. 당시 위기의 원인이 수년간 누적됐다. 무리한 원화 절상, 경상적자 누적, 차입경영 확대, 단기자금을 장기로 운용 …. 그래도 96년까진 그럭저럭 괜찮았다. 96년 성장률이 7.2%에 달했다. 한보 사태가 터진 97년 초만 해도 그해 말에 국가부도 사태를 맞을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외환위기는 급성으로 왔다.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회복도 빨랐다. 98년 -5.7% 성장을 딛고 99년 10.7%로 반등했다. 극적인 V자형 회복.
지금은 만성으로 진행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당수 전문가들은 외환위기를 떠올리며 V자형 회복을 자신했다. 신중한 이들은 침체를 이어가다 상승세를 타는 U자형을 예상했다. 가장 비관적인 의견이 침체를 두 번 겪는 W자형(더블딥)이었다. 이 모든 예상이 틀렸다. 제대로 된 회복은 나타나지 않았다. L자형의 길고 답답한 침체가 8년째 이어지고 있다.
97년과 가장 큰 차이는 세계경제다. 당시는 동아시아 일부 국가만 병에 걸렸다. 통화위기가 97년 7월 태국·인도네시아, 10월 홍콩·대만, 11월 한국으로 번졌다. 산업의 문제라기보다는 해외투자자의 자금 회수로 촉발된 신용의 위기였다. 선진국 경제는 나쁘지 않았다. 그해 미국은 4.5% 성장했다. 일본도 괜찮았다. 개방이 덜 된 중국도 위기를 피해 갔다. 세계 교역량이 매년 4~5%씩 늘던 시절이다. 외환위기로 원화가치가 떨어지자 우리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생겼다. 수출이 크게 늘며 경제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숨에 살아났다.
지금은 다르다. 세계 각국이 크고 작은 병에 걸려 있다. 상대적으로 괜찮다는 미국도 세계경제 침체의 덫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다. 지난해 세계 교역량은 11.8% 감소했다. 우리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사실상 첫 경제위기를 맞았다. 중동 산유국은 저유가로 고전 중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우리 제품을 사줄 곳은 마땅찮다. 원화가치가 떨어져도 수출은 줄고 있다.
국내 여건도 좋지 않다. 기업의 파이팅이 눈에 띄게 줄었다. 97년 기업들은 과도하게 일을 벌이다 궁지에 몰렸다. 외형을 늘리기 위해 돈을 많이 빌린 게 화근이었다. 유통·레저처럼 생소한 분야에 진출했다가 쓴맛을 보기도 했다. 무리한 경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뭔가 해보려는 기업가정신이 넘쳤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기업들이 위축돼 있다. 의사결정도 느리다. 신성장 동력을 개발하거나 유망한 업태로 전환하는 데 한 발씩 늦고 있다.
정부도 부실해졌다. 외환위기 때는 탄탄한 재정이 버팀목이 됐다.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기회복의 불씨를 살렸다. 97년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11.9%에 그쳤다. 재정만 놓고 보면 국가부도가 나는 게 이상할 정도로 튼실했다. 그 비율이 2004년 22.4%, 2009년 30.1%, 2014년 35.9%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올해는 40% 선에 달할 전망이다.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이 나설 여력이 줄고 있다는 의미다.
더 심각한 건 개인이다. 가계부채가 1200조원을 넘어섰다. 곳곳에 버블이 있다. 양극화로 20년 새 중산층 비중이 75%에서 65% 수준으로 줄었다. 중산층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대부분 빈곤층으로 추락했다.
먹고살기 힘들어지면서 사회 갈등의 양상 또한 복잡해졌다. 기존의 이념·지역 갈등에 세대·빈부 갈등이 더해졌다. 금수저·흙수저 같은 수저론은 최근의 빈부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일자리와 연금을 둘러싸고 세대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
대내외 경제 여건이 97년보다 나은 게 별로 없다. 그런데도 위기를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온통 선거판에 몰두해 있다. 기득권 지키기와 정쟁이 가득하다. 총선이 끝나면 대선판으로 몰려갈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는 위기다.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떨어선 안 되지만, 절박한 마음은 갖고 있어야 한다.
고현곤 신문제작담당
[출처: 중앙일보] [서소문 포럼] 1997년 vs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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