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노믹스 기본 철학의 밑바탕에는 ‘엔저(円低)’가 있다. 나랏돈을 풀고, 금리 등을 낮춰 엔화 값을 낮추는 것이다(환율 상승). 엔화 값이 낮아지면 수출이 늘어난다. 수입물가도 올라간다. 이 결과 고용이 늘고, 물가가 올라 경제가 활력을 띄게 한다는 철학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두 개의 화살인 재정확대, 금융완화 효과가 나타나는 듯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3년간 일본의 주가는 2.1배 올랐다. 실업률은 3.1%까지 떨어졌다. 물가는 신선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 기준으로 1%로 개선됐다. 당시에는 ”구조개혁만 이루어지면 일본 경제가 상승세를 탈 수 있다“라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올들어 기류가 바뀌고 있다. ‘엔저’ 대신 ‘엔고’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 8일 달러당 엔화 값은 108.7엔을 기록, 1년 6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 들어 엔화 가치는 10.6%나 상승했다.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세 달 여만에 10% 넘게 올랐다는 것은 심상찮은 일이다. 이 기간에 한국 원화는 1.8% 오름세에 그쳤다.
엔화 가치 상승은 즉각 일본 기업 실적을 위협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8일 SMBC닛코증권의 250개 기업 실적 예측을 전하며 ”엔화가치 상승으로 올 들어 5조엔(약 53조원)에 달하는 기업이익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미 지난해 4분기 일본의 소비(소매판매)와 수출은 전년 동기대비 각각 0.2%, 4.6% 줄었다. 일본 닛케이지수는 올 해들어 지난 8일까지 18.8%나 빠졌다.
글로벌 경기침체, 유가 하락, 중국 성장세 둔화가 엔화 값 상승의 복병 역할을 했다. 세계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리자 엔화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투자처로 여겨졌다. 일본은행은 양적완화를 통해 3년간 200조 엔을 뿌렸고, 지난 1월에는 마이너스 금리까지 도입했는데도 역부족이다. 블룸버그는 “일본은행(BOJ)의 통화정책이 시장에서 무시되고 있다”고 전했다.
중앙은행의 신뢰가 깨지는 건 위험한 일이다.
일본은행은 과거에도 아픈 경험이 있다. 89년부터 94년까지 BOJ를 이끌었던 미에노 야스시(三重野康)는 물가안정 속 성장을 내세우며 ‘서민의 중앙은행 총재’로 불렸다. 그는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자 물가를 잡기 위해 긴축을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1년도 안 되는 사이 기준금리는 4.25%에서 6%대로 치솟았다. 물가는 잡히는 듯했지만 복병이 나타났다. 세계 시장의 큰손인 미국이 91년 마이너스 성장을 하면서 타격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부동산 투자자들은 금리인상 부담에 부동산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92년에는 부실채권을 못 견딘 124곳의 금융회사들이 파산을 선언했다.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이었다. 일본은행의 오판으로 장기 침체를 불러왔고, 그 중심에는 미에노가 있었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아베노믹스 돌격대로 불리는 현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도 비슷한 처지다. 아사히신문은 최근 사설에서 “급진적 통화 완화의 부작용이 일본 경제의 건전성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구로다가 동원할 수 있는 화살은 제한적이다. 그는 지난 7일 “물가안정 목표 실현을 위해 필요한 시점까지 마이너스 금리와 양적ㆍ질적 금융완화 정책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이달 말 열릴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양적완화 규모(연간 80조엔)를 더 늘리거나, 마이너스 금리를 확대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바추카포로 아베노믹스의 엔진이 다시 점화될 것으로 보는 시각은 드물다. 구로다는 미에노와는 정반대로 통화 완화정책에 전력하고 있지만 결국 그도 미에노처럼 실패한 총재로 불릴 공산이 커지고 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