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敵의 아이를 가진 소녀

Bawoo 2016. 5. 24. 19:58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웃 마을 언니 집에 가는 길에 납치된 이후의 생활은 입에 담기도 싫었다. 그저 무사히 집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하지만 납치범들 손에서 풀려나 집에 왔을 때 소녀는 싸늘한 시선들과 마주쳤다. 그제야 달거리가 멈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보도한 나이지리아 루카이야 양(13)의 이야기다. 이 나라에선 극단주의 무장반군 보코하람(Boko Haram)과 정부군의 대립이 8년째 계속되면서 여성들의 인권 유린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보코하람은 ‘서구식 교육은 죄악’이라는 뜻이다. 인구의 절반은 기독교도, 절반은 이슬람교도인 이 나라에 이슬람 신정(神政)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2009년부터 마구잡이 테러를 자행해왔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을 끌고 가 자살폭탄 테러에 이용하거나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성폭행했다. 유엔아동기금에 따르면 2012년 이래 보코하람에 납치된 여성은 약 2000명. 최근엔 정부군의 소탕 작전이 성공해 납치됐던 소녀들의 기적 같은 생환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쁨의 귀향은 절망의 시작이다. 전쟁 피해자들은 아군과 또 다른 무언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적군과 함께 살다 온 여성은 적군만큼 위험한 존재로 간주된다. 부모들은 “딸을 포기하라”는 협박을, 정부는 “평생 여자애들을 가둬놓으라”는 압력을, 성폭행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개들 속의 하이에나’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보코하람의 여자’라는 낙인은 조선시대 전쟁 피해자들인 환향녀(還鄕女)를 떠올리게 한다. 역사학자들은 속환녀(贖還女)라고 부른다. 병자호란을 기록한 인조실록엔 “오랑캐에게 정조를 잃은 며느리에게 조상 제사를 받들게 할 수는 없다”며 이혼을 요구하는 시아버지 얘기가 나온다. 반대로 딸이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왔는데도 사위가 새 장가를 들려고 한다며 이를 막아달라는 친정아버지의 사연도 있다. 당시 좌의정 최명길은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왔다는 이유로 이혼을 허락해선 안 된다고 했다가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린 자”로 역사에 기록됐다(인조실록 36권). 인조는 마을마다 ‘회절강(回節江)’을 지정해 몸을 씻는 여인들은 받아주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적잖은 속환녀들은 그 이후로도 이혼당하고 버림받았다.  

이제는 환향녀도, 속환녀도 입에 올릴 일이 없다. 그렇다고 부당한 낙인찍기가 사라진 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에서 착공식을 마치고도 마포구 성미산 자락으로 쫓겨나 건립된 이유는 일본이 반대해서가 아니다. 일부 단체에서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 훼손”이라며 들고일어났기 때문이다.
보코하람에 납치된 소녀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우리 딸을 돌려 달라’(#BringBackOur Girls)는 해시태그 캠페인에 동참했던 이들은 이제 소녀들의 ‘슬픈 귀향’에 분노하고 있다. 2012년 5월 문을 연 후 4주년을 맞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문제를 넘어 이름 그대로 전시 성폭력이라는 보편적 여성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공간으로 진화하면 어떨까. 전쟁의 만행뿐 아니라 전쟁에서 소녀를, 국민을 지켜내지 못한 이들이 오히려 적군과 함께 그 희생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 뒤에 숨어버리는 비겁함을 일깨우는 곳 말이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놓듯 지은 건물은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 여전히 횡행하는 피해 여성에 대한 낙인찍기 관행을 역설적으로 선명히 드러내줄 것이다.

동아일보 - 이진영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