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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국형 재난영화 흥행과 역설적 희망

Bawoo 2016. 9. 3. 22:08



‘부산행’ ‘터널’ 관객 1750만명
실제 역사 다룬 작품들 넘어서
영화 속 재난은 두 시간짜리지만
강퍅하고 답답한 현실은 끝 몰라


예상을 넘어섰다. 영화 ‘부산행’의 흥행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의미다. 9월 1일 시점, 부산행은 1100만 명이 훌쩍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부산행’에 이어 ‘터널’까지 650만 관객을 넘어섰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재난’을 다루고 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경쟁했던 작품들, 즉 ‘덕혜옹주’나 ‘인천상륙작전’이 실제 역사를 다뤘다는 점이 더 눈길을 끈다. 있었던 일보다 있지도 않은 재난을 다룬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의 지지를 받았다. 말하자면 있지도 않은 일을 다룬 허구적 재난이 기록과 역사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인 셈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말처럼 흥행에 성공한 영화엔 사회적 맥락이 있다. 그것을 가리켜 사회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냉혹한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무자비한 스릴러영화에 관객이 몰린다면 그건 그 이야기를 소비하는 관객이 동정 없는 세상과 교감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재난 역시 마찬가지다. 좀비가 실재하지 않고, 하도터널은 있지도 않지만 영화에서 일어나는 재난이 단지 허황한 일로 여겨지지만은 않는 것이다. 좀비가 판치고, 터널이 무너지는 ‘허구’에 동의를 표한 셈이다.

묵시록의 어원에는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재앙과 재난은 현실 속에 숨겨진 무엇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동의한 숨겨진 무엇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우선 극단적 이분법으로 나뉜 세상이다. ‘부산행’은 감염자와 비감염자라는 이분법 위에 존재한다. 열차는 그 구조 자체가 계급적 차등으로 설계돼 있다. 지불하는 금액에 따라 특실과 일반실이 나뉘고, 편안함과 서비스도 차별된다. 지불금액의 차이는 차별의 정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좀비가 열차에 탑승하자 이런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특실에 타고 있던 대기업 간부도 표도 없이 무임승차한 노숙자도 모두 같은 칸에 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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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비감염자가 좀비보다 더 인간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비감염자들은 생존을 논리로 이기심을 합리화한다. 각자도생이 절대 명제로 등극하고, 살아남기 위해 나 아닌 타인을 배제한다. ‘부산행’에서 선한 배역들은 모두 동료를 갖고 있다. 딸아이와 함께 있는 아버지, 아내와 함께인 남편, 여자친구를 지키고 싶은 남자친구처럼 누군가 동반자가 있는 이가 선한 자들이다. 역설적인 것은 그렇기에 그들이 한편 약자가 된다는 점이다.

왜곡된 정보와 기획된 언론은 재난을 더욱 키운다. 재난을 통제해야 할 권력자들은 정보를 통제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런 이분법과 무능력은 ‘터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터널’의 세상은 터널 안에 갇힌 한 남자와 터널 밖의 사람들로 나뉜다. 처음엔 생존자 구조라는 윤리에 동의하던 사람들이 점차 경제·돈의 논리로 생존 가능성을 외면하려 한다. 이쯤 되면 터널 밖 사람들 역시 ‘부산행’의 비감염자들과 다를 바 없다. 숫자와 확률에 공감과 연민이 밀리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재난은 화려한 스펙터클과 영웅적 승리를 위한 뻔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의 화려한 영화 기술이 재난의 스펙터클로 펼쳐진다. 하지만 한국형 재난영화에서 재난은 볼거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재앙이다. 지진·태풍·혜성과의 충돌 같은 인간의 힘을 넘어선 재난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비롯된 재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재난을 재앙으로 키우고 마는 것일까? ‘터널’의 주인공 정수는 자신이 가진 물을 다른 생존자와 나눈다. 하지만 터널 밖 사람들은 경제 논리를 선택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쫓는다. ‘터널’의 650만 관객은 우리 모두가 다 정수처럼 터널 안에 갇힌 무력한 생존자가 될 수 있음에 대한 소극적 동의다. ‘부산행’의 1100만 관객 역시 결국 가족이 최소한의 울타리일 수밖에 없다는 공감적 지지다. 총체적 부실과 정보의 왜곡 및 독점, 통제의 부재라는 허구 가운데서 오히려 선명한 사실성을 만나는 것이다.

좀비가 나타날 리는 없지만 그런 재난이 발생한다면 그때 서울역 풍경은 ‘부산행’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터널 속에 갇힌 사람은 허구지만 만약 누군가 갇힌다면 ‘터널’의 권력자들이 보여 주는 행태가 현실과 크게 다르진 않을 듯싶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지금 돌아봐야 할 현실이 있다. ‘부산행’과 ‘터널’에서 발생한 재난의 현실을 우리가 매우 사실적으로 공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말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공간을 희망이 아닌 파국의 서사로 대응하고 있다. 그래도 ‘부산행’과 ‘터널’은 영화이기 때문에 부산행 열차는 결국 부산에 닿고, 터널에는 어딘가 출구가 있다. 오히려 영화보다 현실이 더 강퍅하고 답답하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그나마 영화의 결말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면 이미 그 자체로 재난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6년 한국 영화에 등장한 재난들은 절망적 희망이라는 역설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기사 이미지

[출처: 중앙일보] [시론] 한국형 재난영화 흥행과 역설적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