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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국 마지막 황비]Elisabeth von Wittelsbach (1837~1898)

Bawoo 2016. 3. 25. 22:22

Elisabeth von Wittelsbach

 

Elisabeth of Austria


Elisabeth von Wittelsbach. 오스트리아의 황후이자 헝가리의 왕비.
1837.12.24 ~ 1898.09.10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문장



 


 

1. 개요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공작 막스와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의 차녀. 애칭은 시씨(Sissi).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되었다가, 후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이중국가 체제를 이루게 되자 오스트리아의 황후인 동시에 헝가리의 왕비가 된다. 그녀가 정치에 개입한 것은 단 한번이었는데, 1867년 헝가리가 독립 내각을 구성하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한 것이다. 이는 일전에 헝가리 방문했을 때 헝가리인들에게 큰 감명을 받아 헝가리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원래 프란츠 요제프의 아내가 될 이는 그녀의 언니 헬레네(애칭은 네네(Nene).)였다. 그러나 정작 네네와 맞선을 보던 날 프란츠 요제프는 어머니와 언니를 따라온 어린 시씨를 보고 사랑에 빠져 시씨에게 구혼한다.엄마 반응은 충공깽 그리고 결국 시씨는 이 청혼을 받아들여 2년 뒤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바이에른에서 자유롭게 생활해온 시씨는 오스트리아의 엄격한 황실 예법[1]에 잘 적응하지 못해 방황했다. 여기엔 시어머니이자 이모인 조피 대공비와의 갈등의 영향도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그녀는 17세에 결혼했다.) 조피에게 반발하지 못했지만,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홀로 여행을 다니거나 정신병원을 시찰하기도 하는 등 이런 저런 다양한 활동들을 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실의 공식적인 행사에는 참여하려고 하질 않아 황후답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아내에게 약했던 프란츠 요제프는 아내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2] 아이러니한 것은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에게 미움 받던 그녀 역시 루돌프 황태자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벨기에의 공주 스테파니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이는 조피 대공비의 사랑을 받으며 시씨와 갈등을 빚던 동서 샤를로테(벨기에의 공주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가 스테파니의 고모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 외모

당시에 가장 아름다운 왕족 여성으로도 이름이 높았던[3] 시씨는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일에도 열의를 보였으며,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다이어트를 감행하기도 했다. 거의 거식증 환자 수준으로 적게 먹고 운동에 열중해 평생 키 173cm, 몸무게 46~49kg를 유지했다(…) 하루에 오렌지 6개만 먹는 날도 있었다고.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카락 무게를 빼면 실제 무게는 그것보다도 가벼웠다. 루트비히 2세의 친척[4]이었고 윗대에서 오랫동안 근친혼이 반복된 탓인지 그녀의 거식증이나 아들 루돌프의 자살이유를 유전적인 요인에서 찾는 설도 있다.


이 때문에 문제가 있었는지, 나이를 먹으며 늙기 시작하자 시씨는 모든 개방된 장소에서 자기 얼굴을 감추기 시작한다. 현재 남아있던 사진과 그림 대부분이 시씨의 가장 아름다웠던 리즈시절의 것인 것도 모두 그러한 까닭이다. 그녀가 나이를 먹고 찍힌 사진은 거의 다 흐릿하거나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들이다.

3. 가족 관계

시씨는 프란츠 요제프와의 사이에서 네 아이 - 조피,[5] 기젤라, 루돌프, 마리 발레리 - 를 낳았다. 첫째 조피는 여행 중 어린 나이로 죽었으며,[6] 유일한 아들이었던 루돌프는 성인으로 성장해 황태자위에까지 올랐지만 세간에 '마이어링 사건'으로 알려진 밀월여행 끝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기젤라와 마리 발레리만이 시씨의 사후까지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양육한 막내 마리 발레리에겐 다소 지나칠 정도로 애정을 쏟았지만 조피가 양육한 기젤라와 루돌프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이러한 편애는 아들 루돌프가 자살하게 된 원인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딸 기젤라를 자신을 위해 멋대로 정략결혼의 도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7] 어머니의 편애 때문인지 기젤라와 루돌프는 매우 사이가 좋은 남매였다.

루돌프는 남매 가운데 시씨와 가장 닮은 아이였으나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한 어머니 탓에[8] 두 사람 모두 살아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1889년 루돌프가 자살하자 시씨는 실의에 빠져서 이전보다 더욱 더 도피성 성격이 짙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루돌프의 죽음에 더해 시씨는 1888년 아버지, 1890년에는 언니, 1892년에는 어머니, 1893년에는 막내 동생을 연달아 떠나보냈다. 일련의 사건 이후의 여행은 경호원을 대동하지도 않았고, 가명을 사용했으며 소수의 시녀들만을 데리고 다니는 여행이었다.[9] 그리고 이러한 조치들이 결국 시씨의 죽음을 부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후술하듯 암살당할 당시에도 시씨는 경호원은 커녕 시녀 한 명만 대동하고 있었다.

4. 암살


죽기 전 날 마지막으로 사진에 잡힌 시씨. 오른쪽의 여인은 시녀인 헝가리의 여백작 이르마 슈타라이Irma Sztáray(읽는 법 확실치 않음)로 평생 결혼하지 않고 시씨를 모셨다.



암살 당시 사용된 흉기


1898년 9월 시씨는 비밀리에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원은 노출당했고, 이 사실을 안 스위스의 한 신문에서는 오스트리아 황후의 여행 이야기를 실었다. 이 기사를 읽은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1873-1910)[10]는 엘리자베트에게 접근했고 그녀를 암살한다.[11] [12]루케니는 가는 줄(needle)[13]로 시씨의 가슴을 찌르고 도망쳤는데, 시씨는 찔리고 나서도 한참동안 그 사실을 몰랐다. 단지 소매치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루케니는 암살 훈련을 받아 작은 상처를 통해 치명적인 출혈을 유도했던 것이다. 시씨의 가슴에 난 작은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녀가 입은 검은 옷 때문에 자신도 시녀인 이르마 슈타라이 여백작도 눈치채지 못했다. 시씨는 루돌프를 잃은 후 아들을 애도하기 위해 계속해서 검은 옷만을 입어왔던 것이다. 시씨는 스위스를 떠나는 배에 승선하고 나서야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곧 혼절했다. 응급 처치를 받으면 살 수 있었겠지만, 그 배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단 한명 도 승선하고 있지 않았다. 죽어가는 황후는 뒤늦게서야 호텔로 옮겨졌지만, 단 한 번 정신을 차렸다가 단 한마디만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였다. 유언마저 남기지 못한 죽음이었다.

시씨의 죽음은 그날 전보로 부쳐졌는데, 그 날도 어김없이 집무실 책상에 앉아있던 프란츠 요제프는 아내의 죽음을 듣고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나마 그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부분은 시씨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것으로 프란츠 요제프는 항상 시씨가 루돌프를 따라 자살할까봐 두려워했다. 신앙심이 깊은 프란츠 요제프로서는 자살한 이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 믿었고, 시씨가 자살한다면 그녀 또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무튼 그녀가 죽은 이후 프란츠 요제프는 더욱 실의에 빠져 지낸 나날이 많았으며, 사적인 자리에서는 측근들에게 종종 "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프란츠 요제프와 시씨는 평생 애증이 뒤섞인 미묘한 결혼 관계를 유지했는데, 루돌프의 죽음 이후로는 프란츠 요제프와 화해를 하였으나, 다 늙어서 좀 사이가 좋아지려고 하니 암살당한 비극적인 여인.

5. 기타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에서는 그녀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엘리자베트'가 공연되었다. '죽음(사신이나 죽음의 신이 아닌 말그대로의 죽음이다.)이 엘리자베트를 사랑했다'라는 내용인데 부정적인 부분까지 살려가며 꽤 고증이 잘 되어있다. 2012년 2월부터 5월까지 '엘리자벳'이라는 이름으로 라이센스판 한국 공연도 올라왔다.



오스트리아를 관광할 때 모차르트와 더불어 지겹도록 접하게 되는 인물이다. 불행한 삶을 살았다지만 냉정하게 보면 부족한 황후이며 나쁜 어머니로 자신의 책임을 모두 방기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특히 비엔나의 왕궁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시씨 박물관까지 있으며 그 안에는 시씨가 생전에 입던 드레스나 사용하던 물건들, 심지어 그녀를 살해한 도구까지 전시되어 있다. 시씨에 대해 잘 모르는 관광객들은 주로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현지인들은 상당히 진지하게 관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쇤브론 궁전에 가 보면 시씨가 거주하던 방과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기념품점에서는 시씨와 관련된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다. 예를 들면 드레스를 입은 시씨의 미니 동상 혹은 흉상이라든지 그녀의 초상화라든지. 모차르트 동상, 모차르트 쿠겔,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다."는 내용이 쓰인 티셔츠와 더불어 기념품점에서 반드시 보게 되는 품목 중 하나다.

 

[1] 사족이지만 허례허식을 혐오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때까지만 해도 쇤부른의 예법은 이웃나라 프랑스프로이센에 비해 무척이나 자유롭고 편안했다.[2] 시씨가 남편을 자기한테서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정부를 소개시켜줬다흠좀무한 이야기도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항목 참조.[3] 미녀 왕족들이야 많았지만 시씨와 비교하면 영... 그나마 시씨와 견줄만할 정도의 미녀 왕족으로는 에드워드 7세의 아내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왕비와 그녀의 동생인 러시아마리야 황후 정도. 그리고 시씨의 집안인 비텔스바흐 가문은 대대로 키 크고 미남 미녀가 많은 집안이었다. 이 사람의 친척뻘인 루트비히 2세도 미남으로 유명했다.[4]

 

시씨의
어머니비텔스바흐 가문의 일원인 루도비카 빌헬미네로 루트비히 1세의 동생이었다. 루트비히 1세의 손자가 루트비히 2세이며 루도비카의 딸이 시씨이므로 루트비히 2세와 시씨는 오촌지간이다. 시씨가 루트비히의 당고모뻘 된다.
[5] 조피 대공비가 첫 손녀가 태어나자마자 데려가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6] 사실 이것도 어린 아이를 고집부려 여행에 동행시킨 시씨의 잘못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7] 아이러니하게도 기젤라는 못생긴 외모에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남편인 바이에른의 레오폴과 금혼식까지 치를 정도로 시씨의 자녀들중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8] 다만 이것은 그냥 며느리인 스테파니 공주가 보기싫어서 일부러 안 볼 가능성도 있다.[9] 이 때부터는 모로코, 이집트, 터키, 알제리 등 유럽 세계를 벗어난 곳들로도 여행하게 된다.[10]

 

루이지 루케니는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사형을 요구했다. 결국 사형당하는 것이 좌절되자 1910년 감옥 안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11] 사실 루케니가 노렸던 건 엘리자베트가 아니었다. 루케니는 후일 재판을 받으며 타겟이 왕족이면 누구든 상관없었다고 증언했다.[12] 보수주의 왕족을 혐오하여 일으킨 범행이었지만, 막상 당한건 보수 성향이 아닌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시씨라는게 아이러니다.[13] 시씨 박물관에 가 보면 전시되어 있는데 위에서 보다시피 흔히 보는 과일 깎는 칼보다도 훨씬 작다.


Royal Assassination....
They were walking along the promenade when the 25-year-old Italian anarchist Luigi Lucheni approached them, attempting to peer underneath the empress's parasol. According to Sztaray, as the ship's bell announced the departure, Lucheni seemed to stumble and made a movement with his hand as if he wanted to maintain his balance. In reality, in an act of "propaganda of the deed", he had stabbed Elisabeth with a sharpened needle file that was 4 inches (100 mm) long (used to file the eyes of industrial needles) that he had inserted into a wooden handle.


A former mason, railway laborer and former valet to the Prince of Aragon, Lucheni originally planned to kill the Duke of Orléans, but the Pretender to France's throne had left Geneva earlier for the Valais. Failing to find him, the assassin selected Elisabeth when a Geneva newspaper revealed that the elegant woman traveling under the pseudonym of "Countess of Hohenembs" was the Empress Elisabeth of Austria.


After Lucheni struck her, the empress collapsed. A coach driver helped her to her feet and alerted the Austrian concierge of the Beau-Rivage, a man named Planner, who had been watching the empress' progress toward the Geneve. The two women walked roughly 100 yards (91 m) to the gangway and boarded, at which point Sztaray relaxed her hold on Elisabeth's arm. The empress then lost consciousness and collapsed next to her. Sztaray called for a doctor, but only a former nurse, a fellow passenger, was available.

 

The boat's captain, Captain Roux, was ignorant of Elisabeth's identity and since it was very hot on deck, advised the countess to disembark and take her companion back to her hotel. Meanwhile, the boat was already sailing out of the harbor. Three men carried Elisabeth to the top deck and laid her on a bench. Sztaray opened her gown, cut Elisabeth's corset laces so she could breathe. Elisabeth revived somewhat and Sztaray asked her if she was in pain, and she replied, "No". She then asked, "What has happened?" and lost consciousness again.

The autopsy was performed the next day by Golay, who discovered that the weapon, which had not yet been found, had penetrated 3.33 inches (85 mm) into Elisabeth's thorax, fractured the fourth rib, pierced the lung and pericardium, and penetrated the heart from the top before coming out the base of the left ventricle. Because of the sharpness and thinness of the file the wound was very narrow and, due to pressure from Elisabeth's extremely tight corseting, the hemorrhage of blood into the pericardial sac around the heart was slowed to mere drops. Until this sac filled, the beating of her heart was not impeded, which is why Elisabeth had been able to walk from the site of the assault and up the boat's boarding ramp. Had the weapon not been removed, she would have lived a while longer, as it would have acted like a plug to stop the bleeding



 

[우리말 자료 출처:namu.wiki/w/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

 


 

          바이에른 여공작, 오스트리아 황후, 헝가리 왕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파흐(1837-1898)

 

엘리자베트 아말리아 에우게니아 폰 비텔스바흐

1837년 12월 24일 독일 뮌헨에서 출생

1898년 9월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망

 

아버지는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어머니는 바이에른 왕녀 루도비카

엘리자베트는 포센호펜 성에서 자랐으며,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녀를 시씨(시시)라고 불렀다.


시시는 독일 바이에른에 있는 뮌헨에서 태어났다. 1853년 여름, 15살의 시시는 어머니와 언니 헬레네를 따라 상부 오스트리아에 있는 휴양지인 바트 이쉴로 여행을 갔다. 여기서 가족들은 헬레네가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사촌 오빠인 프란츠 요제프의 관심을 끌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때 23살의 프란츠 요제프는 헬레네 대신 시시에게 반했고, 결국 두 사람은 1854년 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합스부르크 궁정의 예법은 매우 엄격했는데, 이 때문에 시시는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와중에 황실 부부는 세 아이를 낳았다. 어려서 죽은 첫째딸 조피, 둘째딸 기젤라, 그리고 고대하던 황태자 루돌프.

그리고 10년 후, 막내딸 마리 발레리가 태어났다. 시시는 아이들에 대한 훈육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키운 것은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였다. 루돌프 황태자의 탄생 직후 황실 부부의 결혼 생활은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시시의 엉뚱한 행동과도 상관이 있었다.

(정신 불안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집안 내력이었다)

 

이 무렵 시시는 여행길에 올랐고, 마데이라, 헝가리, 영국, 코르푸(이오니아 제도) 등지를 방문하였다. 코르푸에서 시시는 성 한채를 짓도록 의뢰했고, 그녀는 그 성을 'Achilleion'이라고 불렀다. 시시가 세상을 떠난 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이 건축물을 사들였다.

 

시시는 뛰어난 패션 감각과 미모, 다이어트, 운동에 의한 섭생과 스포츠, 특히 승마에 대한 뜨거운 열정, 그리고 조지 "베이" 미들턴을 포함한 여러 애인들로 유명해졌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헝가리 인들의 반발로 합스부르크 군주국 내에는 사회적인 불안감이 생겨났다. 시시는 늘 헝가리 인들의 주장에 공감했다.

시시는 부다페스트에서 소원하게 지내던 남편 프란츠 요제프와 화해하고, 재결합하였다. 부다페스트는 그들 부부의 대관식이 열렸던 곳이기도 했다. 화해의 결과로 넷째 아이인 마리 발레리가 태어났지만, 이내 시시는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 유럽 전역을 끊임없이 여행하였다.

 

1889년 시시의 삶은 외아들의 죽음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당시 31살이었던 루돌프 황태자는 어린 애인인 마리아 베체라를 총으로 쏘고 자신도 뒤따라 자살하였다. 루돌프와 그의 애인은 저지 오스트리아에 있던 사냥꾼용 오두막집에서 발견되었고, 이 사건은 그 오두막집의 이름을 따라 '마이얼링'이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1898년 9월 10일, 당시 61살이던 시시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사망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암살자는 루이기 루체니라는 젊은이였는데 그는 원래 오를레앙 가의 공작을 죽일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작을 찾는데 실패하자, 그 대신에 황후를 공격한 것이었다. 그 때 시시는 몽트뢰로 가는 증기선을 탈 생각으로 제네바 호수의 산책로를 거닐고 있었다.

 

나중에 루체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족을 죽이고 싶었다.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이 없었다."

 

심장에 부상을 입고 출혈 과다로 죽어가면서, 시시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황후는 빈 시내에 있는 황실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시시 황후는 어찌 보면 전 영국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와 닮은 면이 있었고, 이 때문인지 종종 서로 비교되기도 한다.

 

 

-시씨 황후의 초상화-

 

                                               시씨와 남동생 카를 테오도르


 

                                                     1854년에 그려진 초상화


 


 


 

 


 


 


 

 

 

 

 

-시씨 황후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