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무문의 변
[요약]
당 고조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할 때 가장 공이 컸던 것은 둘째 아들 이세민이었다. 그러나 첫째 이건성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형제 사이에 권력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에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제를 살해함으로써 위협을 제거한다. 며칠 후 이세민은 고조 이연의 뒤를 이어 태종 황제로 등극한다. 태종의 23년 치세는 연호를 따 '정관의 치'라고 일컫는다.
당 고조 이연은 황후 두씨와의 사이에 네 아들 이건성(李建成), 이세민(李世民), 이현패(李玄覇), 이원길(李元吉)을 두었다. 고조 이연은 당 건국 후 종법 제도의 법칙에 따라 장남 이건성을 태자에 책봉했다. 그러나 만약 당을 건국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를 기준으로 태자를 삼았다면, 그 자리는 진왕 이세민의 몫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의 창업자는 이연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창업을 주도한 것은 이세민이었기 때문이다.
당 건국에 가장 공이 컸던 이세민은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태자 책봉에 밀려나자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태자 이건성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조 이연이 이세민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생소한 칭호를 내리고, 태자의 동궁에 버금가는 홍의궁(弘義宮)을 짓게 한 것이다. 이로써 이건성과 이세민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게다가 막내아들 이원길까지 황위에 욕심을 품자 한 핏줄의 삼형제는 서로 죽이고 죽는 운명에 처했다. 역사는 이를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이라 한다.
618년, 이연이 수 공제에게 형식상으로 양위를 받아 황제로 등극하여 국호를 당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당시 당의 지배 영역은 장안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각지에는 여전히 군웅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에 당 고조 이연은 반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통일 전쟁을 수행했고, 이 시기에 이세민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먼저 이세민은 618년에 금성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설거(薛擧), 설인고(薛仁杲)의 진(秦)을 멸망시켰으며, 619년에는 하서 5군을 차지하고 있던 이궤(李軌)의 양(涼)을 멸망시켰다. 또한 유무주(劉武周)가 남하하여 산서 남단에 이르렀을 때는 자진 출정하여 유무주의 선봉장 송금강을 격파하고 돌궐로 쫓아냈다. 게다가 621년에는 당의 최대 적이었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여 왕세충과 두건덕(竇建德)을 모두 사로잡는 전과를 올리며 위세를 떨쳤다. 왕세충은 낙양을 중심으로 정(鄭)을 세우고, 당시 최대의 유력 군웅인 이밀을 격파한 후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정벌에 나선 이세민이 낙양을 포위하자, 왕세충은 두건덕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세민은 왕세충과 두건덕의 연합으로 동서에서 협공을 받았지만, 낙양을 포위한 채 지구전을 펼쳤다. 결국 식량이 부족해진 두건덕이 퇴군 기미를 보이자, 이것을 기회 삼은 이세민은 총공세를 펼쳐 두건덕을 생포했다. 또한 왕세충은 두건덕의 생포 소식에 스스로 항복했다. 이후에도 이세민은 당의 통일 전쟁에 앞장서서 622년에는 두복위(杜伏威)를, 623년에는 유흑달(劉黑闥)과 서원랑(徐圓朗)을 항복시켰다. 이처럼 당의 천하 통일을 위한 반란 세력 진압은 이세민이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 고조 이연도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 그에게 천책상장의 칭호를 내렸다.
그런데 이세민은 단순히 공적을 쌓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당 고조 이연을 부추겨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자신만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당 건국 후에는 할거 세력들을 평정하여 그 층을 더욱 두텁게 했다. 그리하여 그의 수하에는 위지경덕(尉遲敬德), 진숙보(秦叔寶), 정교금(程咬金) 같은 장수들과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우세남(虞世南) 등 18학사(十八學士)라 불리는 문관 인사들이 모였다.
상황이 이쯤 되자 태자 이건성은 이세민에게 큰 위협을 느꼈다. 그는 직접 통일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장안에 남아 고조 이연을 도와 정사를 처리했다. 하지만 이세민이 당의 최대 적인 왕세충 정벌의 공을 인정받아 고조 이연에게 천책상장으로 책봉되자, 그에게도 무공이 간절해졌다. 이에 태자 이건성의 측근인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은 태자 이건성에게 두건덕의 잔당을 이끈 유흑달을 토벌할 것을 진언했다. 이것으로 이건성은 약간의 군공을 쌓을 수 있었지만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건성은 재상 배적의 지지를 받았고 수많은 인재와 용장들이 그를 따랐지만, 스스로 자신의 능력이 이세민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세민을 경계하고, 점점 비대해지는 이세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 동생 이원길이 이세민을 제거하자는 제안을 함으로써 태자 이건성과 이원길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양측의 암투가 시작되었다. 먼저 이건성과 이원길은 고조 이연의 비빈들과 가깝게 지내며 아첨을 하고, 뇌물을 주고, 이세민의 험담을 했다. 그리하여 이세민의 흉이 고조 이연의 귀에 들어가게 했으며, 고조 이연이 점차 이세민을 멀리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이세민 휘하의 사람들을 매수하고, 중상모략으로 배제시킨 뒤 먼 곳으로 배속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을 썼다. 그들은 위지경덕에게 뇌물을 주어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그를 살해하려 했고, 이마저 실패하자 모반죄로 그를 몰았다. 또한 고조 이연에게 이세민 휘하의 방현령과 두여회를 진왕부에서 쫓아내고 멀리 강주 자사로 보내라고 했다.
626년, 양측의 암투가 한창 치열할 때 변방에서 돌궐의 침입 소식이 전해졌다. 태자 이건성과 이원길은 이때가 이세민의 군사력을 분할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건성은 고조 이연에게 이원길을 수장으로 삼아 진왕부의 군사를 이끌고 돌궐을 정벌할 것을 진언했다. 이는 곧 이세민의 귀에 들어갔으며, 이세민은 장손무기(長孫無忌)와 방현령, 두여회, 위지경덕 등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고 이들을 먼저 없애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의 계획은 고조 이연이 부른다고 꾸며 이건성과 이원길을 궁으로 불러들인 뒤 모두 주살하는 것이었다.
626년 6월 3일, 이세민은 입궐해 고조 이연을 알현한 뒤 태자 이건성과 이원길이 후궁들과 음란한 관계에 있으며 아무런 죄가 없는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고했다. 이에 고조 이연은 이튿날 아침에 둘을 불러 진상을 조사하기로 했다. 6월 4일 새벽, 이세민은 장손무기, 위지경덕과 함께 수하 부대를 이끌고 장안성 태극궁(太極宮)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에 매복했다. 현무문은 황궁을 출입할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으로, 이미 현무문의 수비대장인 상하(常何)를 매수한 상태였다. 태자 이건성과 이원길은 고조 이연의 부름을 받고 입궐해 현무문에 당도했다. 그들은 이세민과 한창 암투 중이었기 때문에 호위 무사들을 대동했으나, 황제가 있는 궁까지 군사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현무문을 지나 임호전에 다다랐을 때 이세민과 그의 부하들이 나타났다. 이세민은 말을 달려 도망치는 태자 이건성에게 활을 쏘아 죽였고, 이원길에게도 활을 쏘았으나 비껴 나갔다. 이원길은 이세민의 활은 피했으나 곧 위지경덕에게 추격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이세민은 태자 이건성과 이원길의 호위 부대와 싸워 모두 진압한 뒤 위지경덕을 시켜 고조 이연에게 상황을 거짓으로 보고했다.
"태자와 제왕이 모반을 꾀했으나, 진왕이 이들을 모두 죽여 진압했습니다. 진왕은 황제께서 놀라실 것을 우려해 저를 보내 어좌를 보존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현무문의 변이다.
현무문에서 태자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한 이세민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들의 아들 10명을 모두 죽였다. 그러나 이건성과 이원길 휘하의 사람들을 최대한 수용함으로써 궁에 피바람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며칠 후 이세민은 태자가 되었고, 약 두 달 후 고조 이연의 뒤를 이어 태종 황제가 되었다. 그는 형제를 살육하여 황제가 되었다는 도덕적 불명예를 얻었으나 황실 내부 투쟁에서 패배하면 곧 생존 박탈로 이어지던 시대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태종 이세민의 23년 치세는 연호를 따라 '정관(貞觀)의 치세'라고 일컬어진다.
ㆍ 621년 : 이세민이 당나라의 최대 적인 왕세충과 두건덕을 사로잡아 위세를 떨치다.
ㆍ 623년 : 당 고조 이연이 이세민에게 천책상장의 칭호를 내리다.
ㆍ 626년 : 이세민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이고, 고조 이연에게 상황을 거짓으로 보고하다.
도서
중국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당대의 사건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분야까지 한눈에 볼 수 있게 종합적으로 구성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부터, 타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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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은 626년 7월 2일에 발생한 당 고조 이연의 후계자를 두고 장남 이건성(李建成)과 차남 이세민의 다툼이다. 이에 승리한 차남 이세민이 제2대 황제인 당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이세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이건성은, 이세민으로부터 예우를 받던 모신(謀臣) 방현령과 두여회, 울지경덕 등을 중상모략으로 배제했다. 그 후 이건성의 신하 위징과, 이연의 사남인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이 이세민 암살을 건의하였으며 계속 이세민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건성은 이원길에게 이세민을 죽이고 난 뒤에는 황태제(皇太弟)로 삼겠다 약속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아버지 이연에게 서로를 음해하고 모함하였다. 이건성은 이연의 후궁 윤덕비를 움직여 이세민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그 때문에 이연은 이세민을 매우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을 사전에 파악한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와 방현령, 두여해, 울지경덕 등을 도사로 변장시킨 뒤 자택에 불러 대책을 협의, 황태자 이건성의 부하로 장안성 태극궁(太極宮)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의 수비대장인 상하(常何)를 매수, 무덕(武德) 9년(626년) 7월 2일에 정변을 일으켰다.
그날 이건성은 궁중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긴박한 정세 중 태자의 동궁 시위군(侍衛軍)과 사병(私兵)에 지켜지고 있었던 이건성과 이원길이었으나, 궁중에까지 사병을 들일 수는 없었다. 결국 현무문 안에 들어오고 전각인 임하전(臨河殿)에서 이세민 측의 군사의 습격을 받았다. 이세민이 수하 장수들과 병사들을 대동하고 이건성, 이원길 형제에게 나타났다. 이원길은 이세민에게 화살을 세 발이나 쏘았으나 맞히지는 못하였다. 이세민은 형 이건성을 한번에 화살로 쓰러뜨렸다.
맏형의 죽음을 본 이원길은 겨우 도망갔으나 울지경덕에게 추격당하였다. 이원길은 바로 숨었으나 들통이 나 울지경덕에게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세민은 대전으로 가 부황 이연을 알현하였고 형과 아우가 반란을 일으켜 선참후보(先斬後報)하였고 이리 된 것은 모두 부황의 잘못이라 협박하였다. 이연은 너무나 놀라며 이세민에게 모든 병권을 내어주고 별궁에 유폐당하였다.
정변 이후
그 후 황제 이연은 할 수 없이 거의 강제적으로 3일 뒤인 7월 5일에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에 그에게 양위하였다. 이세민은 626년 9월 4일에 황제에 올라 당의 제2대 황제 당 태종이 된다.
이건성과 이원길의 가족들은 모두 이세민이 보낸 군사들에게 몰살당하였다. 아들 이세민에게 강제적으로 황위를 내준 태상황 이연은 635년에 죽을 때까지 거의 유폐된 채로 지냈으며 이연에게 이세민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윤덕비도 처형당하였다.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죽이라 했던 위징은 오히려 이세민에게 중용되어 명재상이 되며, 신료들 중 가장 높은 직위인 승상에까지 오르게 된다.
같이 보기
[위키백과]
[출처: 정보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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