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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관우를 잡아 처형한 오나라 장수]여몽(呂蒙

Bawoo 2016. 7. 4. 21:49

여몽(呂蒙, 178년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명(子明)이며 여남군 부피현 사람이다.




생애

매형이 손책(孫策)의 중신 등당이었으므로, 젊은 나이로 손책을 섬기게 되었다. 등당이 죽은 후, 장소의 추거로 등당을 대신하였고 별부사마에 제수되었다. 200년, 손책이 죽은 후 그 동생인 손권(孫權)역시 섬겼다. 여몽은 용장으로서 그 무용으로 손권에게 수많은 공훈을 세웠으며, 황조(黃祖)와의 전투에서는 적의 도독인 진취(陳就)를 직접 베었다. 그리고 208년 적벽(赤壁)의 전투와 강릉(江陵)의 전투에서도 공훈을 세워 편장군 심양현령으로 임명되었다.


여몽은 황조(黃祖) 토벌을 시작으로 적벽(赤壁)의 싸움, 그 후의 주유(周瑜)의 형주(荊州)를 어우르는 일련의 싸움에서 대장을 맡아 전공을 올리는 활약을 했으나, 교양적인 면모는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주군인 손권에게서 교양의 중요성을 훈계받은 후에 학문에 길을 세웠다. 강표전(江表傳)에 의하면, 손권으로부터 “특별히 박사가 될 필요까지는 없고, 그저 과거의 일을 많이 알고 있었으면 한다.”라고 들었다고 하나, 여몽은 결국 유학자로서 성공할 정도로 많은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그 후, 죽은 주유를 대신하여 육구에 주둔하게 된 노숙(魯肅)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을 때, 면학에 심취해있던 여몽은 무엇이든 막힘 없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노숙(魯粛)은 여몽을 ‘오군의 아몽에 비할 수 없다’ (아몽은 어릴적의 여몽을 부르는 말, 옛날 오군에 있을 시절의 여몽을 일컬은 것)라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여몽은 ‘선비(士)는 3일만 떨어져 있어도 주목하며 상대하게 된다.’고 말했다 (매일매일 공부하는 자는 삼일만 만나지 않아도 크게 변화하여 있다라는 의미로, 상대를 볼때 선입관에 빠져서 대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보라하는 의미).

손권은 성인이며 학문에 심취한 장군으로서 여몽과 장흠(蔣欽)을 들었다. 또한, 진보가 없는 인물을 ‘오의 아몽’이라 하는 것은 여몽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유비가 유장의 세력을 아우른 후에도 형주를 내어주지 않자, 손권의 명을 받들고 편지를 보내 장사군, 영릉군, 계양군 3군을 취하려고 했다. 장사군과 계양군은 여몽에게 응했으나 영릉태수 학보만은 여몽에게 저항했다. 여몽은 군사를 이끌고 영릉을 강제로 빼앗으려 했는데, 유비가 공안까지 와서 관우를 지원하자 손권은 여몽에게 영릉을 포기하고 귀환하여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하고 있는 노숙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몽은 학보에게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에게 포위당했고, 관우가 지키던 남군은 이미 손권이 점거했다는 거짓말로 학보를 협박했다. 학보는 두려워하여 여몽에게 투항했는데, 여몽은 학보에게 편지를 보내 그것이 거짓임을 그대로 알려 주었다. 여몽은 곧바로 익양으로 돌아갔고, 유비가 손권에게 맹약을 요청하여 손권은 상수 이동을 얻고 영릉은 유비에게 돌려주었다. 손권이 합비를 치다 철수 도중 장료의 습격을 받아 위태해지자 능통과 함께 목숨을 바쳐 손권을 지켰으며, 유수 싸움에도 종군했다.


노숙이 죽자 육구에 주둔하였고 노숙이 거느리던 군대 1만을 물려받았다. 여몽은 대국인 위(魏)나라를 공격하여도 효과가 적을것을 염두에 두어, 촉(蜀)이 점거하고 있는 형주(荊州) 남부의 전역을 삼킨 후, 그곳을 발판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와중에 관우가 손권의 영지인 군량고에 가서 군량을 훔쳐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손권에 의해 그 지역으로 파견나갔는데 이 때 여몽은 관우가 세운 관측소를 모조리 철거했다. 219년, 형주를 지키고 있는 촉의 명장 관우(關羽)와 대항하던 중 병에 걸리게 된다. 후임으로써 명장 육손(陸遜)을 임명하였다. 촉의 남군태수 미방(麋芳)이 손권 측과 내통을 약속하여 진격, 관우의 퇴로를 끊어버리고, 12월 겨울에 당양현(當陽縣)의 남쪽에 있는 장향(障鄕)에서 관우를 포획, 임저(臨沮)에서 그의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처형했다. 이로써, 여몽은 관우를 쓰러뜨리고 형주를 되찾은 큰 공훈을 얻었다.

사후 평가

그러나 이전부터 병이 낫지 않았던 여몽은 결국 사망하게 된다. 향년 42세였다. 아들 여패(呂覇)가 작위를 이었으며, 여패가 죽고 그의 형 여종(呂琮)이 작위를 이었다. 여종이 죽은 후, 여종의 동생 여목(呂睦)이 작위를 이었다.

진수는 여몽을 평가하면서 용맹하면서도 지략에 능하였으니, 무장으로써 그만한 인물은 없었다고 평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여몽

삼국지연의에서, 10월 14일에 관우를 쓰러뜨리고, 12월 17일에 관우의 망령이 나타나 여몽의 멱살을 잡으며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고 말한뒤 “나는 관우다”라고 외치자,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피를 뿜어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인기 높은 관우를 죽였기 때문에, 후세에 촉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창작물에서 악역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 '오하아몽', '괄목상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여몽의 친족관계

  • 여종(呂琮) (장남) (196-255)
  • 여패(呂覇) (여종의 동생)(197-235)
  • 여목(呂睦) (여종의 동생)(201-272)
  • 여주 (누이) (18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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