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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칭 대학살(肅清大虐殺)[싱가포르 화교 학살 사건]

Bawoo 2016. 9. 29. 21:01

 

   

숙칭 대학살
Sook Ching Centre site.JPG
우차우에 세워진 추모비
날짜 1942년 2월 18일 ~ 3월 4일
위치 싱가포르
참여자 야마시타 토모유키
사상자
싱가포르계 중국인 화교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화교
사망자 4~5천 (일본)
10만 (싱가포르 화교)
2만 5천~5만 (학계)

 

숙칭 대학살(肅清大虐殺,

중국어간체:

肃清大屠杀,

정체:

肅清大屠殺)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2월 18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숙칭 대학살 사건 이후, 학살은 말레이시아계 중국인 화교들로 확대됐다. 이 학살로 희생된 사람 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일본 정부 측에서는 약 4 ~ 5천 명이 학살에 의해 희생됐다고 추산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화교 측에서는 약 10여만명이 학살됐다고 추산하고 있다. 전후 학계에서는 약 2만 5천 명에서 5만 명 사이의 중국인 화교들 및 싱가포르인들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숙칭'(중국어: 肅清)의 의미는 '일본인의 중국인 숙청'을 의미한다.

같이 보기

  • 제2차 세계대전
  • 싱가포르
  • 일본의 전쟁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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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가포르 화교학살사건] 

     

     

    1942년 2월 15일에 일본군은 영국의 식민지이던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이 때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장군의 책임하에 중화민국 국민정부(장제스 정권)측으로 싱가포르를 지배하고 잇던 영국 및 연합국을 지지했던 중국계 주민을 게릴라 혹은 반일분자로 여겨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배경에는 1937년 7월의 노구교 사건이후 일본과 중국의 전쟁상태가 지속되던 가운데 동남아시아 각지의 화교들에 의한 항일운동이 빈번했는데 싱가포르의 화교가 그 중심이 된 것과 영국의 요청을 받고 성주화교항적동원총회(星州華僑抗敵動員總會)를 발족하는 등 싱가포르의 화교를 반일적이라고 일본군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각지에 검문소를 설치한 후 18세~50세의 성년 남자를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여 아래의 사항에 해당하는 자를 적성분자로 취급하여 대거 처형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명시한 적성분자는 다음과 같았다.

     

    1. 일본군 및 일본계 주민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한 자.

    2. 국민정부로 재정지원을 한 자.

    3.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항일활동을 하거나 반일행동을 한 자.

    4. 레지스탕스 관계자 및 지지자

    5. 영국 식민지 시대의 공무원, 법관, 입법회 의원.

    6. 흑사회 등 비밀조직과 반사회적 조직에 관여된 자.

    7. 중일전쟁 이후 이민한 자.

    8. 하이난성(海南省) 출신자. (일본군은 이들 대다수를 공산주의 활동가로 보았다)

    9. 검문시 저항하는 자 및 도망하는 자. 

     

    도쿄재판에서 약 6천명의 화교가 살해되었다고 증언되었지만 실제로는 이 보다 더 많은 3만 이상의 숫자가 희생된 것으로 본다.

    영국군은 사건 책임자로서 제 25군의 작전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의 체포에 나섰지만, 츠지는 이 때 국외 잠복중이어서 결국 그의 체포는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학살사건은 화교뿐만 아니라 말레이인과 인도네시아인 등에게도 일본군의 공포와 불신감을 안겨주게 되었다.

    싱가포르 방면군이었던 제 25군의 간부회의에서 화교학살명령이 토의된 기록이나 증언이 없기 때문에 많은 증거로 유추시 츠지의 독단을 군사령관인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묵인했거나 인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츠지는 숙청의 각 현장에서 혼자 출두하여 <싱가포르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기분을 가져라!>라고 병사들에게 공공연히 명령했다고 한다. 츠지는 전후 국회의원을 몇 개월간 역임했는데 국회에서 싱가포르 학살사건에 대해 몇 번이나 토의하려고 했지만 이러한 토의는 모두 츠지가 1961년에 라오스에서 실종되면서 무산되었다.

     

    대신 국회에선 싱가포르 학살을 실제로 목격한 호리 마사오의 증언이 참고되었다. 결국 최고책임자였던 츠지의 행방불명으로 사건의 책임자로 처형된 것은 쇼난 경비사령관이던 가와무라 사부로(河村参郎)중장이었다.

     

     

    출처 : 하타 이쿠히코 <일본의 전쟁범죄>,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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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 - 책 쇼와육군

    쇼와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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