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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육군 - 호사카 마사야스

Bawoo 2016. 10. 6. 23:29

쇼와 육군

[소감: 웬만한 책 두세 권 분량에 달하는 무려 1,100여 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자국민만도 최하 300만 여명, 최대 500만 여명을 죽게 만들고 이웃 아시아 국가 국민들에게 온갖 몹쓸 짓을 다한 제국주의 일본의 주축인  육군 수뇌부의 부정적인 측면을 집중 조명했다. 두 전쟁의 이면사라고 보아도 되겠다. 또 패전후에 일어난 문제까지 다루고 있어 기왕에 나와있는 전쟁사와는 내용이 조금 다르다. 분량이 많지만 읽기는 수월한 편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이 조금 있는 편이서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내용 자체가 일반 독자가 읽기 쉽게 편하게 쓰여졌다. 3주만에 읽어냈으니 하루 평군 50여 쪽씩 읽은 것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주목한 것은 당연히 최일선에서 싸운 일본군들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그리 만든 지휘부에 있는 인간들은 어떤 자들이었는가였다. 내가 그 시절에 일본에 태어났다면 당연히 똑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1920~30년생이 주축인 이들은 전투중에 죽기도 하지만 전투를 위한 행군이나 준비 중에 보급이 안돼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병사가 태반이었다. 거기에다가 항복이 없는 군대로 만들어 놓은 탓에 옥쇄라는 이름의 자살행위가 당연하게 이루어진다. 모두가 천황이란 존재를 앞세워 자신들의 권력만을 탐한 군부 소수 지도자들이 한 짓이었다. 자신들은 대본영에 앉아 지도를 놓고 보면서 명령만 내리면서.


태평양 전쟁의 발발 원인에 미국의 전쟁 유도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의 근거가 되는 것이 "헐 노트"라는

미국무장관 헐의 대일 최후 통첩이다.  내용이 일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그런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는 소요 석유의 8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눈에 나는 행동을 계속한 일본 군부의 어리석은 행동-인도차이나 침공-이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을 터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일개 작은 섬나라에 지나지 않는 일본이 아시아 전역을 자기 영향력 -식민지- 아래 두겠다는데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 내가 미국의 지도자일지라도 절대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미국이 아닐지라도 러일전쟁에서 패한 복수를 하려고 벼르고 있을 러시아도 수수방관 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자멸의 길로 들어가는 악수를 둔 것이다.  


의아스러운 점은 미국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을 어느 정도는 짐작했을 터인데-자기들이 유도한 것이나 다름없으니-진주만 피습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진주만에 항공모함이 한 척도 없었다는 것으로 미리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전쟁 초기에 일본에게 무참히 깨진 것을 보면 미리 준비는 안 했던 것 같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면 금방은 아닐지라도 국력면을 보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유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미국인들도 많이 죽었으니 전쟁은 이를 어떤 이유에서건 획잭하는 자리에 있는 인간들이 아닌 전쟁터에 나가서 직접 싸워야 되는 평범한 국민들에게는 비극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튼 전쟁에 이기기는 했지만 미국은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너무 혼나  일본이라면 넌더리를 냈다는 것인데 이때문에 승전후 일본의 궁핍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는가라는 책 참고]. 그러나 공산국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 부득이 이를 취소하게 되었고 일본의 부흥을 위하여 한번도 전쟁을 유도했다는 -애치슨 라인의 설정에서 한반도를 뺀 일 등-설의 근거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한반도 전쟁은 패전국 독일의 부흥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긴 해도 신빙성이 전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그나저나 이런 시련을 극복하고-미국이 군정을 7년간이나 실시한 나라는 일본뿐이 없다-경제대국이 되어 있는 일본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항상 당하고만 살았는데 이런 우리나라의 동족상잔 전쟁을 바탕으로 하여 초단기간에 전후 복구 사업이 이루어졌고 그런 나라를 모델로 삼아 지금만큼이라도 사는 나라가 되어 우리나라는...




[아래는 이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 글}

 

쇼와 연구의 일인자’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연구 결정판!

A급 전범 등 일본 군부의 주요 인사들을 독자적으로 인터뷰, 취재하고 태평양전쟁 관계자들의 증언을 기록해 일본 근대사의 실증적 연구를 이어오고 있는 호사카 마사야스는 일본제국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왜 일본이 철저히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쇼와 육군의 병리적 체질이란 관점에서 그 조직과 그들의 역사에 새겨넣은 만행들을 철저히 검증해나간다.

쇼와 육군의 퇴폐적 부분을 고발하는 병사들이 많은 것은 “이 전쟁이 너무도 더러웠”기 때문이다. 고참병 중에는 ‘살인의 프로’, ‘도둑질의 프로’, ‘방화의 프로’를 자칭하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모든 결론은 그때그때의 선택지 중에서 최악의 선택을 한 결과물이었다. 이 책은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 같은 쇼와 육군의 핵심 조직을 해부할 뿐만 아니라, 부사관과 일반 사병들의 눈빛, 손짓, 목소리 하나하나까지 담아내고 있다.


   

‘쇼와 연구의 일인자’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연구 결정판!

A급 전범 등 일본 군부의 주요 인사들을 독자적으로 인터뷰, 취재하고 태평양전쟁 관계자들의 증언을 기록해 일본 근대사의 실증적 연구를 이어오고 있는 호사카 마사야스는 일본제국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왜 일본이 철저히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쇼와 육군의 병리적 체질이란 관점에서 그 조직과 그들의 역사에 새겨넣은 만행들을 철저히 검증해나간다.

쇼와 육군의 퇴폐적 부분을 고발하는 병사들이 많은 것은 “이 전쟁이 너무도 더러웠”기 때문이다. 고참병 중에는 ‘살인의 프로’, ‘도둑질의 프로’, ‘방화의 프로’를 자칭하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모든 결론은 그때그때의 선택지 중에서 최악의 선택을 한 결과물이었다. 이 책은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 같은 쇼와 육군의 핵심 조직을 해부할 뿐만 아니라, 부사관과 일반 사병들의 눈빛, 손짓, 목소리 하나하나까지 담아내고 있다.



저자소개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

저서(총 2권)
A급 전범 등 일본 군부의 주요 인사 4000여 명을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15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다치바나 다카시, 사노 신이치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꼽힌다. 일본 근대사, 특히 쇼와사昭和史의 실증적 연구에 뜻을 두고, 각종 사건에 관계된 이들을 취재하면서 역사 속에 묻힌 사건과 인물에 관한 르포르타주를 썼다. 1939년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태어나 도시샤대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편집자로 일하다가 33세 때 논픽션 작가로 홀로서기를 시도해 그의 출세작이 된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가 나오기까지 6년간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자성自省사관’이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저작은 일본 사회의 치부를 정면으로 파고들어간다.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우익 세력의 군국주의적인 망언이 나올 때면 이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철저히 비판하는 그의 코멘트가 유력 언론에 소개되는 등, 그는 일본 현대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개인 잡지『쇼와사 강좌』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쇼와사 연구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작으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지치부노미야』『요시다 시게루라는 역설』『쇼와사의 일곱 가지 수수께끼』『쇼와: 전쟁과 천황과 미시마 유키오』『저 전쟁은 무엇이었는가』『정치가와 회상록』 등이 있다.
역서(총 3권)
역자 정선태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개화기 신문 논설의 서사 수용 양상』『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그 외부』『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번역·문학·사상』『한국 근대문학의 수렴과 발산』『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등이 있으며, 역서로『동양적 근대의 창출: 루쉰과 소세키』『일본 문학의 근대와 반근대』『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일본어의 근대』『지도의 상상력』『생활 속의 식민지주의』『창씨개명: 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일본 근대의 풍경』『삼취인경륜문답』『일본 근대사상사』『조선의 혼을 찾아서』『검은 우산 아래에서』『기타 잇키』등이 있다.

[목차]

제1장 장쭤린 폭살 사건과 관동군의 음모
제2장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와 만주사변
제3장 만주국 건국과 육군의 착오
제4장 황도파와 통제파: 2·26 사건의 두 얼굴
제5장 2·26 사건 판결은 어떻게 유도되었는가
제6장 중국 국민당의 눈으로 본 ‘항일 전쟁’
제7장 팔로군에 가담한 일본 병사의 중일전쟁
제8장 일본 병사는 왜 만행으로 치달았는가
제9장 장고봉 사건과 일본인 포로의 인생
제10장 노몬한 사건, 어처구니없는 군사 행동
제11장 트라우트만 공작의 놀라운 이면
제12장 왕자오밍 추대 공작과 그 배경
제13장 일독이추축체제를 향한 무모한 길
제14장 위험한 도박,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제15장 미일 수뇌 회담은 왜 결렬되었는가
제16장 「헐 노트」가 도착한 날의 육군성
제17장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도조 히데키
제18장 워싱턴 해군 주재무관의 회상
제19장 진주만 공격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제20장 싱가포르 공략과 그 뒤틀린 그림자
제21장 어느 사병이 체험한 전쟁의 내실
제22장 과달카날, 병사들의 통곡
제23장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한 미일 병사들의 현재
제24장 선박포병 제2연대의 끝나지 않은 비극
제25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와 육해군의 대립
제26장 정보 없는 전쟁 지도의 무책임 체제
제27장 레이센 조종사들의 싸움
제28장 제25군 적성국인 억류소의 나날
제29장 뉴기니 전선의 절망과 비극
제30장 참모본부 참모들의 체질과 그 결함
제31장 아직 기록되지 못한 전장 두 곳
제32장 육군대신이 참모총장까지 겸임하는 사태
제33장 사이판 함락과 병사들의 절규
제34장 임팔 작전, 고위급 지휘관과 생존 병사들의 분노
제35장 정보가 경시된 필리핀 결전의 내막
제36장 특공대원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제37장 오키나와 전투의 결전 태세와 그 의미
제38장 본토 결전과 최고전쟁지도회의
제39장 비밀리에 진행된 원자폭탄 개발 계획
제40장 시종무관의 일기가 들려주는 패전 전후
제41장 구소련의 자료가 말하는 ‘사실’의 내용
제42장 홋카이도 점령인가, 시베리아 억류인가
제43장 다이쇼 세대 예비역 장교의 눈에 비친 쇼와 육군
제44장 최후의 육군대신이 남긴 수기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제45장 패전 시에 지도자는 어떻게 처신했는가
제46장 참모들의 쇼와 육군 재건 움직임
제47장 스가모 형무소의 군사 지도자들
제48장 전우회라는 조직과 쇼와 육군의 체질
제49장 이상한 군인은급 조작
제50장 시베리아 억류자 보상 요구의 단면
제51장 남겨진 ‘전후 보상’ 문제를 주시하며

후기
문고판 후기
참고문헌
취재 대상 명단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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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이 책은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는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일이다. 그런 만큼 일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슨 까닭에 일본이 이처럼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가 철저히 일본 내부자의 시각에서, 그것도 육군만을 줄기 삼아 글을 쓴 이유다. 우선 건군建軍에서부터 육군의 전사戰史를 다루면서 그 최상위 지도부를 파헤친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대전에서 보였던 일본군의 병리적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이어붙여 나간다. 이런 역사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일본 군부의 A급 전범들과 장교, 일반 병사뿐 아니라 중국과 대만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자의 증언과 일기, 기록 등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집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 그때를 전후하여 수많은 관계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논픽션 작가답게, 호사카 마사야스는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 전후 쌓여온 시간들, 그리고 1990년경 일본 각지에서 참전 병사들이 남긴 회한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간 격차와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전쟁의 잔재를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이 어떻게 기억으로 퇴화되지 않고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참전한 이들은 쉬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인터뷰 당시 이미 70~80세의 노인이었던 참전인들은 전장에서 저지르고 당했던 일만큼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이 하나씩 모여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쇼와 육군의 체질이라는 것
청년 장교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시베리아에서 5년간 포로생활, 중국으로 이송돼 전범재판을 받고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된 바 있는 우노 신타로. 전쟁 후 무역회사 회사원이 되어 처자식과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1945년 3월, 사사 신노스케 전 중장 휘하에서 후베이성 마을의 주민 90여 명을 살해하는 데 가담한 전력이 있다. 이들 부대는 또 난장 현 우안옌 부근에서는 부인, 어린이, 노인 등 20명을 잔혹하게 교살했다. 나아가 샹양 성 부근 왕자잉 촌에서는 주민 18명을 손바닥에 철사를 꿰어 줄줄이 묶은 다음 판청의 교회당 옆에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샹양 시에서도 주민 30여 명을 철사로 묶은 다음 강으로 밀어넣었다. 그 가운데 후자오샹 등 5명은 물에서 빠져나왔지만, 저우광짜오 등 20여 명은 전부 익사했다. 더욱이 샹양 시에서는 부하가 부인을 강간하는 것을 방임하고 심지어는 윤간 끝에 죽임에 이르게 했다. 1990년 도쿄에서의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사실을 털어놓은 우노는 당시 자신이 중국에서 저지른 것은 학살이나 만행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행위인 줄로만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 “일본군은 왜 중국 대륙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노 신타로) “하나는 일본 육군의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뭔지를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쇼와 육군의 지도부에 속한 고위급 군인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종종 ‘대선大善’과 ‘소선小善’으로 표현했다. 1882년 메이지 천황이 군에 하사한 「군인칙유」만 좇는 것은 ‘소선’이며, 천황을 위해서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적 기정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대선’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서없는 논리에 감춰져 있는 독선적 주관주의로 지탱되었던 조직이 바로 쇼와 육군이다. 그리하여 부녀자와 노인, 소년, 유아를 반쯤은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수단으로 살해할 만큼 망가졌던 쇼와 육군 지배하의 병사들 중 자신들의 퇴폐적인 경험을 고발하는 이가 많이 나오는 것은 “이 전쟁이 너무나 더러웠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은 대개 메이지 10년대(1877~1886) 중기부터 20년대 후기에 걸쳐 태어났다. 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등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다. 정원이 50명인 육군대학의 졸업생이라는 것만 해도 이미 엘리트임을 인정받은 것인데, 그중 상위 10퍼센트는 군 지도부에 들어가 행정과 작전 계획을 담당했다. 문제는 성적지상주의의 기관들에서 우등생이었던 이들은 실전 체험이 드물었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의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란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즉 근대 일본 부국강병 정책의 충실한 자식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인물들은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지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 육군이 일본에 초청되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했다. 더욱이 육군유년학교에서는 독일어, 러시아어 등이 중심이 되고 영어 교육은 철저히 경시되었다. 나아가,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었다. 철학적·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기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모토 군은 심신이 모두 불가사의할 정도로 유연하고 강인하며 굴신자재屈伸自在할 뿐만 아니라 결코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지극히 소심하면서도 아주 대담하며, 세밀하게 생각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 운운.”

이 글의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라는 표현에 쇼와 초년대 군인의 성격이 응축되어 있다. ‘대의(천황의 뜻)를 내세우면 무슨 짓을 해도 관계없다는 심정과 패턴이야말로 쇼와 육군과 그 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것은 병사를 무기질無機質의 병기로 육성하는 데 결사적이었다는 것, 보급과 병참 사상을 가볍게 여기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병사들에게 옥쇄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충절이라는 명분 아래 죽음을 명령했던 것)를 명하고, 그것에 대한 자기반성도 없이 잇달아 그런 종류의 작전을 명한 것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장교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쇼와 육군의 체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우노 신타로는 연대본부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의 소장을 겸한 바 있는데, 그는 이곳의 중국인 포로들이 죽어나갈 때 특별히 인간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만약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광스런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장교에게는 식사도 충분히 제공되었고 게다가 위안시설까지 있었다. 그곳에서 울적함을 풀었다. 반면 일반 병사에게는 조악한 식사에다 위안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토벌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종종 농촌을 습격했다. 장교가 병사들의 강간을 묵인하고 약탈을 눈감아준 것도 그러한 일본군의 ‘장교 주도의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군 관료들은 하급 병사를 동원하는 데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오로지 서로를 감싸는 체질만을 드러냈다. 노몬한 사건을 지도하여 2만 명에 가까운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고 전상자나 전병자로 만든 관동군 참모인 쓰지 마사노부나 주임참모 핫토리 다쿠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요직에 복귀했고, 태평양전쟁 개전 때에는 가장 과격한 개전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때도 과달카날에 과도한 병력을 투입하고 싱가포르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등 그들은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든 책임을 지지 않고 전쟁의 과오를 계속해서 반복해갔다.

도조 히데키, 쇼와 육군 패망의 상징적 존재
쇼와 육군 붕괴의 원인이 된 태평양전쟁은 지도자의 체질이나 전략에 따라 수행되었다. 거기에는 붕괴하는 것이 당연한 조직 체계, 인간사상, 전쟁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3년 9개월 중 2년 9개월 동안 수상, 육군상, 참모총장까지 겸하고서 전쟁을 지도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이러한 공통점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었다. 가령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의 법정을 묘사하며 당시 일본 지도부의 무능함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헐 노트」에 관한 일본의 입장을 확인하며 도조 히데키를 신문했다. 「헐 노트」는 1941년 11월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작성한, 일본의 제안에 대한 미국의 답변이었다. 사실상 일본이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지를 점령하며 벌인 정치 공작을 중단할 것과 삼국동맹의 백지화를 주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아울러 「헐 노트」에는 교섭의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일본 측은 이를 묵인했다. 도리어 승산이 낮더라도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여 메이지 시대 이래 육군 선배들이 중시해온 ‘의義’를 지켜야 한다는 강경 노선을 택하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헐 노트」에 담긴 기본 방침을 무시하지 않고는 미국과 전쟁을 벌일 명분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취재 중 입수한 ‘도조 일기’를 바탕으로 당시 일본을 움직인 도조 히데키의 생각을 최초로 공개한다. 도조는 “「헐 노트」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전부였다. 한마디로, 쇼와 육군은 미국에 대하여 처음부터 ‘객관적인 사실’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관측’에 따라 대처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개전에 관해 쇼와 천황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당시 천황의 측근들은 구실을 만들어 천황의 면책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측근들은 도조를 비롯한 쇼와 육군의 지도자에게 전쟁의 책임을 모두 떠넘기려고 생각했던 듯하다. 재미난 것은 도조에 관한 양가적인 평가인데, 그 결과 ‘도조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지만, 인사 관리나 헌병의 장악 등에서 서툴렀다’와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저자가 취재 과정에서 입수하여 처음 공개하는 ‘도조 일기’ 앞부분에 나타난 자계自戒를 꼽을 수 있다. 자계의 첫 번째 항은 “전쟁의 모든 책임 앞에 설 것. 특히 성상 폐하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데 대해서는 전력을 다하고, 또 다른 각료 및 다른 사람의 책임을 극력 경감하는 데 노력할 것”라고 쓰여 있다. 도조 히데키는 전후 도쿄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다.

1억 명의 옥쇄
쇼와 육군의 ‘정신주의’에는 오직 천황을 위한 군대가 있었을 뿐으로, 일반 병사 개개인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 중 하나가 바로 전쟁 때 군대의 소모품이 되어버린 병사들의 실태(이는 일반 국민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그런 정책의 배후에 있던 육군의 ‘정신’을 다루는 것이다.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오키나와에서 정치적 선택의 잘못된 지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내몰린 병사(국민)가 있다. 그 대척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하고 비인도적인 작전을 펼친 군 관료의 실체가 있다. 그 대비되는 각각의 국면을 세밀히 살펴나가다보면 분노와 놀라움, 슬픔에 사로잡히게 된다. 특히 필사적으로 육탄 공격 작전을 펼치며, 가미카제 특공대뿐만 아니라 보병들에게 병기가 되어 스스로 산산이 부서지라고 명령했던 육군 지도부의 명령은 2차 대전 때 일본군 병사들을 거대한 참상 안으로 밀어넣었다.
가령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가장 끔찍하고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곳 중 하나인 과달카날 전투의 상황을 보자. 군사과장 사나다 조이치로는 전쟁 당시의 일들을 일기로 남겼는데, 그 기록을 보면 사나다는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에게 “과달카날의 제17군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라지도록 항전하게 한다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마무라는 “절대 반대”라고 말하고, ‘그런 것이 제일선에 알려지면 즉석에서 전원이 할복하고 말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 내용을 보면 적어도 사나다의 마음속에는 과달카날 참전 병사들을 ‘옥쇄’시킬 방안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이어진다.
미군은 대동아회의 전후부터 일본이 절대 국방권이라고 명명한 요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3년 타라와에서는 일본군 4800명 가운데 20명을 제외하곤 전원 옥쇄했다. 도조가 참모총장에 취임한 뒤 작전참모에 의한 일본군의 작전은 더욱더 옥쇄형玉碎型으로 바뀌었다. 1944년 7월 5일 사이판 전투에서 제43사단 사령부는 “우리는 옥쇄함으로써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고자 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대본영으로 보내고, 7월 7일 3000명의 생존 병사와 함께 옥쇄했다. 무기와 탄약은 남아 있지 않았고, 돌멩이를 갖고 싸운 병사도 있었다고 한다. 몇몇 병사는 산속에 틀어박혀 1945년 12월까지 게릴라전을 펼쳤다. 사이판 전투에서는 일본 병사 약 4만1000명이 전사했고, 2만5000명의 일본인 주민 가운데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판 섬이 미군에 제압당함으로써 ‘절대국방권’은 무너졌고, 실제로 서태평양은 모두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 후 일본군은 일본 본토로 쫓기는데, 각지에서 사이판에서와 같은 옥쇄전이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를 겹겹이 쌓아올려 본토 공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는 것이었고, 군 관료들의 책임이 밝혀지는 날을 하루하루 미루는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일본군이 오로지 전쟁 지도라는 길을 일직선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이오 섬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1250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섬이다. 보급도 끊어지고 장비도 부족했던 일본군은 우세한 물량을 앞세운 미군에 압도되어 2만1000명의 수비대가 고작 2천여 명을 남긴 채 궤멸하고 말았다. 약 한 달간 치러진 혹독한 전투로 인해 이오 섬은 그야말로 ‘옥쇄의 섬’으로서 태평양전쟁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무렵 몸이 약했기 때문에 이오 섬으로 가는 멤버에서 제외되었습니다만, 옥쇄한 동료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생환한 사람들이 이오 섬으로 유골을 모으러 갔는데, 캄캄한 동굴에 유골이 딱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병사는 부대가 전멸하고 난 후 혼자 동굴에 틀어박혀 저항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돌을 쌓아 방어벽을 만든 다음 그 뒤에 숨어 있다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아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45년 3월 17일 전투의 막바지에는 전원이 옥쇄전법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살아남은 몇몇 병사에게 집합 장소와 시간이 통고되었다. 더 이상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병사는 청산가리가 든 주사를 맞고 죽어갔다. 굶어 죽은 병사 중에는 사망한 미군 병사의 군복을 입고 미군 속에 섞여서 식량을 얻으려 한 이도 있었다. 이오 섬의 전투는 그야말로 ‘지옥도’ 그 자체였다. 모든 부대가 “전원 적진으로 온몸을 던져 돌격을 결행하여 옥쇄”하거나 “총반격에 참가하여 옥쇄”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옥쇄는 물론 지구전을 도모하는 작전을 펼친다는 대본영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였다.
그리하여 이오 섬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좀처럼 당시 상황에 대해 입을 떼려 하지 않는다.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감춰져 있는 생각은 후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것이다.
1945년 8월에는 살아남은 1만여 명이 옥쇄 작전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종전 연락이 왔다. 남아 있는 무기는 기관총 몇 정, 소총 9500자루였고, 탄약은 총 한 자루당 20발 정도, 포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들
일본군이 아시아 전역에서 벌인 전쟁 중의 야만스런 행위들은 아직 그 추산이 집계되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하게 자행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안들이다. 이 책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참상을 고백하고 있는 참전 장교나 사병들은 전쟁 당시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전후에도 일상으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이어가다가, 은퇴 후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만행을 털어놓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중일전쟁 때의 자기 경험을 털어놓은 우노 신타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국 대륙에 40만 규모의 대군대를 보냈다. 이때 파송된 병사 중에는 결혼하여 아내가 있는 자가 많았다. 우노의 말에 따르면, 아내가 있는 자들은 독신인 병사보다 성적 만행에 적극적이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이윽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대륙의 정예 부대는 남방으로 파송되었고, 병사들의 질은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이와 함께 만행에 익숙해졌고 너나없이 즐기는 분위기였다.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참병 중에는 살인의 프로, 도둑질의 프로, 방화의 프로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났고, 그것을 제지하는 군의 규율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들 만행은 평상시라면 광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군의관이 다음 전임지가 결정되었다면서 제39사단 제232연대 연대본부의 포로수용소장 겸 정보장교인 우노에게 온다. “오늘밤 한잔할까요?”라며 유혹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노는 알고 있다. 해골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이튿날 항일적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포로 한 명이 참살된다. 머리를 자른다. 그것을 햇빛에 말린다. 중국인 포로에게 안면의 살을 벗겨내라고 한다. 물론 포로는 울면서 이 일을 한다. 그런 다음 며칠 동안 말렸다가 다시 포로에게 두골을 닦아 윤을 내라고 한다. 그 해골을 상자에 넣어 선물이라며 군의관의 짐 속에 넣는다. 이 해골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빛이 난다. 인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노는 당시 군의관이었던 사람과 45년 만에 만났다. “그것은 일본에 가지고 돌아와 어떻게 했습니까”라고 묻자, 그 군의관(이때는 개업의)은 “진료실에 진열되어 있지요”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그런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서도 45년 동안 의료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니, 우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책에 던지는 몇 가지 질문
이 책은 철저히 일본 제국 육군이 저지른 오류를 밝히기 위해 집필된 책이기 때문에 일본 내 우익 세력들로부터는 ‘자학사관’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역사관을 ‘자성自省사관’이라 하며,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직시해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 드러내는 전국전우회연합회 소속 참전 병사들의 증언은 특히 참전인들의 고통도 묻어 있지만 그들의 자성이 묻어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들은 지금도 전장에서 사망한 동료 군인들의 돌아오지 못한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유골수집단을 꾸려 필리핀 등지로 떠나곤 한다. 만주사변 이후 패전까지 일본에서 전화로 사망한 사람은 5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일본 국민 수 대비 6퍼센트가 넘는 수치다. 저자는 지역별 전사자 수, 부대별 생환자 수를 분석하면서 일본이 자국의 국민과 병사들을 끝까지 챙기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그리고 이후 치러진 전범 재판 과정을 공개하면서 전쟁을 망쳐놓은 고위급 군인들이 책임을 피하려 한 눈꼴사나운 언동을 그려간다. 게다가 패전 직후에는 옛 대본영 참모들이 모여 쇼와 육군을 재건할 움직임마저 보이기도 했다. 쇼와 육군이 소멸한 뒤, 그것을 지탱한 의식이나 행동의 핵심도 과연 진정으로 극복했는가? 호사카 마사야스는 『쇼와 육군』이라는 전사戰史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본영 참모의 자화자찬에 가까운 전쟁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병사들이 어렵사리 들려주는 괴로움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전사를 다시 쓸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나에게 부여된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듣고 쓰기’가 없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교훈이다. 그러한 교훈을 얻고서 나는 정치적·사상적 측면에서 쇼와 전기 일련의 전쟁을 분석하는 것이 잘못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그러한 시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밝혀두고 싶다.

이 책은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좀 다른 대안을 내놓고자 한다. 다만 그러한 시각은 여전히 피해 당사국이나 피해 여성들의 입장과 일치하진 않는다. 이 현안이 단순히 현세대에서 다음 세대에게 빚지지 않기 위해 쉽게 화해하기 힘든 복합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속으로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군사력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그 착각을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시기의 군인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심리를 낳았다. 결국 군사는 국가의 위신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유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줄곧 중국을 선택했던 셈이다. _136쪽

“마을을 불태운 다음 사살한 사람을 끌어내려고 할 때였습니다. 네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울면서 우리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울면서 곧장 다가오더군요. 장교가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아이를 처리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략 60년 전에 일어난 일을 지금도 꿈에서 보곤 한다. (…) 딸이 자식을 데리고 친정에 놀러 왔을 때 도저히 손자를 안을 수 없었다. 염주를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기억이 되살아나면 전차 안에서도 염주를 쥐고 묵도를 하곤 했다.
“나의 유일한 구원은 전우회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곳이 전우회입니다. 한번은 장교가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트입니다. 그에게 그때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나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명령한 자는 잊어도 그것을 실행한 자는 평생 잊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_478쪽

하지만 일련의 전쟁을 치른 일본사회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 일본 병사와 싸운 중국 병사나 미국 병사 또는 러시아 병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많은 증언을 들어왔다. 어림잡아 1년에 4000명이 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번이라도 말을 나눈 사람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 만나면서 나는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짓임에도 그런 정책을 추진한 것은 왜인가”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병사들은 너나없이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대본영에서 호의호식하며 작전을 가지고 노는 참모들은 그들의 괴로움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에서 패한 것은 전장 장병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낙차는 전쟁이라는 정책을 선택하는 나라의 기본적인 모순이다. _1103~1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