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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4세 초상화를 그린 화가]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Bawoo 2016. 10. 19. 22:28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Autoportrait au turban (Perpignan).jpg

 [Self-portrait in a turban, 1698, Perpignan, Musée Hyacinthe Rigaud]

(18 July 1659 – 29 December 1743)

 French baroque painter of Catalan origin whose career was based in Paris.

    Hyacinthe Rigaud selfportrait


    프랑스 루이 14세 시대의 초상화가. 초상화 고객은 상류계급이었으며,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아생트 리고, 〈루이 14세의 초상〉, 1701년

     화풍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대가들의 영향으로 사실과 함께 색채 ·명암 등의 변화에 유의하여, 18세기 회화에 새로운 방향을 열었다.

    Hyacinthe Rigaud - Louis de France, duc de Bourgogne (1682-1712)


      
     
    "Gaspard de Gueidan playing the musette" (Gaspard de Gueidan en joueur de musette, 1738), Musée Granet, Aix-en-Provence.
     
     


    고향인 페르피냥을 비롯하여, 몽펠리에 ·리옹 등지에서 수업을 계속, 21세 때 파리로 나가 르블랑의 아틀리에로 들어갔고, 1682년 로마상()을 받았다. 그러나 스승의 권고로 로마로 가지 않고 초상화 주문에 응하였다. 고객은 상류계급이었으며, 마침내 루이 14세의 초상화베르사유궁전 옥좌실()에 걸릴 정도로 국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것으로 명성은 전 유럽으로 퍼져, 각국의 왕후() ·귀족 ·성직자 ·문인 들의 주문이 쇄도하였고, 그의 아틀리에는 여러 사람이 분업을 하는 공장처럼 되었다. 화풍은 아카데미즘에 빠져들지 않고, 플랑드르네덜란드

    의 대가들의 화풍을 배워, 사실과 함께 색채 ·명암 등의 변화에 유의하여, 18세기 회화에 새로운 방향을 열었다.

     

    Christ expiant sur la Croix, Hyacinthe Rigaud, 1695


    The Lafitte family


    Paintings

    [그림자료 출처: 영어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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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내린 절대 권력의 소유자, 루이 14세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는 칭호처럼 72년간 군림한 무소불위의 왕이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 출신으로 재상제를 폐지하고 파리고등법원을 격하시킨 절대왕정의 대표군주다.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후 자신을 지상에서의 신의 대행자라 일컬으며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장했다.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종교'를 표방하면서 신교도를 박해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상공업에 종사하던 신교도들이 국외로 이주하면서 프랑스 산업은 타격을 받았다. 또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의 결핍을 초래했다. 이러한 절대왕정의 모순은 훗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도판〉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루이 14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279×190㎝, 1701, 파리 루브르미 술관 소장
    한편 루이 14세는 프랑스가 유럽의 정치·문화적 중심이 된 절대왕정 문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으로 일컬어지는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고, 특히 발레에 관심이 많아 직접 발레를 하면서 무용감독을 하기도 했다. 17세기의 발레는 지배자인 왕족과 시민계급 사이의 불화를 잠식시키며 절대왕권에 대한 찬미와 '왕권신수설'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적절히 활용됐다. 국왕이 직접 춤을 만들어 지도하고, 백성들 앞에서 춤을 추면서 그의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충성과 복종을 유도한 것이다.

    ◆정치와 예술의 공생관계

    음악, 미술, 문학, 무용 등 모든 예술이 권력과 정치적인 성향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있었을까? 선뜻 있었다고 대답하기 힘들다. 지배자들은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어 연주하거나 연극공연을 열었다. 자신의 삶을 영웅서사시로 묘사하는 등 문학작품으로 각색하거나 화가들의 능숙한 붓 놀림을 빌어 위풍당당한 모습을 과시하기도 했다.

    미술 역사상 가장 출세한 화가가 있다면 단연 루벤스를 꼽을 수 있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그는 살아서 최고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까지 누린 화가였다. 그는 왕족처럼 생활했으며 정치적으로도 출세해 외교관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유분방한 고집 센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귀족적인 생활을 즐겼고, 문화적인 교양과 인문학적인 학식이 풍부했다. 여기에 정치적인 수완과 사교술까지 겸비해 강한 정치적 권력을 가진 예술가였다. 그는 전쟁이나 비참한 현실을 그리기 보다 당시의 정치권력을 비유적으로 다룬 작품들을 그렸는데 정치를 통해 예술을 실현시킨 화가로 평가 받고 있다.

    예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예를 하나 더 살펴보자. 나치의 선봉장인 아돌프 히틀러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신처럼 숭배했다. 특히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바그너의 오페라는 '예술의 정치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그너의 모든 오페라들은 신화나 중세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지만 당시 유행한 인종주의에 따라 국수주의와 민족주의를 표명하고 있기에 히틀러가 그의 음악을 나치의 선전음악으로 사용했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 틀었던 음악이 바로 바그너 음악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음악이 연주되지 못한다. 독일에서조차 바그너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면 정치적인 성향을 의심 받는다고 한다.

    이처럼 예술은 국가의 정책에 부합되도록 통제 받으며 선전도구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예술도 당연히 정치를 반영한다. 위에서 본 사례들은 '지배자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된 예술'의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와 무관한 예술은 없다. 예술과 권력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인 예술, 예술적인 정치가 탄생한다. 이 둘의 공생관계에서 문제는 과연 정치와 예술이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 점이다. 예술이 정치에 종속돼서는 참다운 예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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