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프란시스코 데 산마르틴 마토라스(스페인어: José Francisco de San Martín Matorras, 1778년 2월 25일 ~ 1850년 8월 17일)는 아르헨티나의 장군이며 페루의 정치가이다. 흔히 호세 데 산마르틴(스페인어: José de San Martín)으로 불린다. 당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성공시켰다.
[초기생애와 활동 ]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후안 데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북쪽 변경의 인디언 영토 과라니에 있던, 이전 예수회 선교단의 지역본부 야페유의 행정관이었다.
어머니 그레고리아 마토라스 역시 스페인인이었다. 가족들은 그가 6세 때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1785~89년에 마드리드에 있던 귀족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곳을 떠나 무리카 보병연대에서 사관생도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뒤 20여 년 동안 스페인 군주의 충성스런 장교로서 오랑에서 무어인(1791)·영국군(1798), 오렌지 전투에서 포르투갈군(1801)과 각각 싸웠으며 영국군과의 전투에서는 사로잡혀 1년 이상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1804년 대위로 진급했다.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정복하고 뒤이어 프랑스에 대항한 애국적 반란이 스페인에서 일어난 것은 그의 생애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산 마르틴은 감금되어 있던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를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세비야 임시정부군에서 2년 동안 복무했다. 바일렌 전투(1808)에서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었던 그가 이같이 놀라운 변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에 동조하던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영국인을 보고 고무받았을 뿐 아니라 스페인에서 싸운 적이 있는 파이프 백작 4세 제임스 더프의 후원에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더프는 산 마르틴을 스코틀랜드 밴프의 자유시민으로 만들어 준 사람임). 훗날 그는 자신이 태어난 땅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스페인에서의 경력을 버렸다고 주장했는데, 아르헨티나의 역사가들은 이런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반도(半島) 기질을 가진 스페인인들의 서인도 태생에 대한 편협한 시각 때문에 스페인에서 사는 동안 내내 그는 분명 괴로워했으며 이때문에 결국 크리올(라틴아메리카에서 나고 자란 유럽인, 특히 스페인인) 혁명가들과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에 근무하면서 그는 군인들의 훈련관이자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813년 2월 3일 파라나 강의 오른쪽에 있는 산로렌소에서 왕당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그뒤 투쿠만으로 가 페루 부왕군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빠져 있던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을 지원하고
그는 왕당군이 리마를 장악하고 있는 한 리오데라플라타는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上)페루(지금의 볼리비아)를 통하는 종전의 육로로는 부왕 세력의 심장부에 들어가는 것이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남아메리카 남부의 해방에 기여한 그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 비상한 작전을 조용히 준비해나갔다. 우선 가우초 게릴라의 도움을 받아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투쿠만 주변의 군대를 훈련시켰다. 그리고 나서 건강 악화를 핑계로 안데스 산맥을 건너가는 길목에 있는 멘도사의 주도인 쿠요의 행정관으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칠레에 있는 애국정부의 군인과 연결시킬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이어 페루를 공격하기 위해 해상으로 나아갔다.
안데스 산맥 원정
안타깝게도 그의 계획의 첫 단계가 거의 끝나갈 무렵 왕당군은 다시 칠레를 장악했으며, 칠레의 해방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는 멘도사로 도망갔다.
이로써 산 마르틴은 안데스 산맥이라는 무시무시한 장벽을 넘으며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월 12일 그는 카사스데차카부코에서 왕당군을 기습하여 산티아고를 장악했다.
다음 단계의 계획은 칠레 해군을 창군하고 군대 수송선을 모으는 것이었다.
자금이 부족했으나 1820년 8월 주로 무장한 상선으로 구성된 이름뿐인 함대가 토아므 코크라네(나중에 던도널드 백작 10세)의 지휘 아래 페루 해안을 향해 발파라이소를 떠남으로써 이 계획은 달성되었다. 산 마르틴과 자주 의견대립을 하던 코크라네는 이미 지난해에 굳건히 수비되고 있던 주요항구 카야오를 함락시키려다 실패한 바가 있었다. 카야오는 여전히 봉쇄되어 있었으므로 부대는 피스코 근처의 남쪽에 상륙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내륙으로부터 리마를 위협할 수 있었다. 신중한 성격에 걸맞게 산 마르틴은 우세한 병력이 방어하고 있던 수도를 공격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왕당군이 페르난도 7세(그 사이 스페인 왕위에 복위되었음)로부터 원조가 없는 데 실망하여 산악지대로 철수할 때까지 거의 1년 이상을 기다렸다. 그뒤 산 마르틴과 그의 군대는 리마로 쳐들어갔으며, 1821년 7월 28일 페루의 독립이 선언되고 승리한 혁명군의 사령관인 그는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불안했다. 그는 리마 공격을 계속 주장한 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지지자들과 이미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산 마르틴은 페루인들의 충성심이나 몇몇 장교들의 지지를 확신할 수 없게 되었으며 장교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가 독재나 군주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는 내륙지방에 남아 있는 왕당군을 진압할 만한 병력이 부족했다.
더구나 남아메리카 북부 지방을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가 과야킬을 합병시켰는데, 그곳은 항구로 산 마르틴이 페루에 편입시키길 원했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는 볼리바르와 담판을 짓기로 결정했다.
볼리바르와의 회담
이들 2명의 승전 장군은 1822년 7월 26일 과야킬에서 겉보기에 대등한 사이로 회담을 가졌다(과야킬 회담). 비밀회의에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산 마르틴이 낙담하여 서둘러 리마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리마에서 중병을 앓는 가운데 비난과 노골적인 반감에 부딪혀 9월 20일에 섭정직을 사임했다. 그뒤 망명길에 올라 딸과 더불어 브뤼셀·파리·불로뉴쉬르메르 등지에서 여생을 보냈다. 결국 신생독립국가들의 초기 역사를 얼룩지게 만든 무정부상태에 개입하는 것을 현명하게 피한 셈이었다.
평가
독립에 기여한 그의 업적은 군사적 기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로 들어가고 해상을 이용하여 리마 부왕령을 공격하는 과감한 계획은 시행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인내심, 결단력과 함께 남아메리카 남부에서 스페인 세력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과야킬 회담에서 그와 더불어 독립운동을 한 볼리바르가 빛날 수 있도록 일부러 개인적 야심을 완전히 단념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페루에 남아 감독하고 있는 동안에는 볼리바르가 페루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망명생활에 들어간 것인지는 풀리지 않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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