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ón Bolív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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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볼리바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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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 콜롬비아의 제1대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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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819년 12월 17일 ~ 1825년 5월 4일 |
부통령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
후임: 도밍고 카이세도(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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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국적 | 스페인령 베네수엘라 → 그란 콜롬비아 |
출생일 | 1783년 7월 24일 |
출생지 | 스페인령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
사망일 | 1830년 12월 17일 (47세) |
사망지 | 그란 콜롬비아 산타마르타(현재의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배우자 | 마리아 테레사 로드리게스 델 토로 이 알라이사 |
부모 | 후안 비센테 데 볼리바르 이 폰테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온 데 팔라시오스 이 블랑코 |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라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이 블란코(스페인어: Simón José Ant
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Palacios y Blanco, 1783년 7월 24일-1830년 12월 17일)는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리베르타도르, El Libertador)로 불린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그란 콜롬비아로 독립시켰다.
생애
성장기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에 스페인령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에서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Juan Vicente de Bolívar y Ponte)와 마리아 콘셉시온(Maria de la Concepción de Palacios y Blanco)사이에서 2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바스크 태생의 에스파냐 출신 가문으로 그의 5대조 할아버지 돈 시몬은 베네수엘라 총독의 비서로 근무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시몬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남편이 별세한 뒤 건강이 더 안좋아져서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시몬은 흑인 여종인 이폴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는데, 이러한 성장환경은 시몬이 노예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갖게 하였다. 1792년 어머니가 별세한 뒤, 고아가 된 이들 남매들은 넉넉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당시 시몬은 외할아버지댁에서 살다가 외삼촌 카를로스 팔라시오스의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환경과 엄격한 성격의 외삼촌과의 갈등은 시몬의 정서를 불안하게 하여 반항아가 되게 하였다.
교육
결국 열두살때 외삼촌 집에서 나와버린 후, 결혼한 큰 누나 마리아 안토니아와 같이 살면서 시몬 볼리바르가 살던 시대에는 진보적 가치였던 정치적 자유주의의 신봉자인 시몬 로드리게스(Simón Rodríguez, 1769년-1854년)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 로드리게스는 장 자크 루소와 몽테스키외의 사상을 심어주면서 시몬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당시 남아메리카에서는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들인 크리오요(Criollo)들을 비롯한 여러 인종들이 에스파냐의 식민통치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크리오요들은 농장을 경영할 정도로 뛰어난 경제력과 높은 교육수준을 갖고 있는데도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젊은 크리오요들은 자유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자신들을 차별하는 에스파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열정적인 투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로드리게스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에,시몬도 자연스럽게 많은 학식과 자유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가 투쟁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누나 내외의 소개로 인문학자이자 교육가인 안드레스 베요(스페인어: Andrés Bello,1781년-1865년)의 지도를 받게 된다. 교육, 문학, 법학에 해박한 지식이 있던 베요는 시몬에게 에스파냐어와 웅변술을 가르쳤으며, 시몬이 14세가 되자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하였다. 후에 그는 칠레에 국립대학교를 설립하여 남아메리카 교육사업 발전에 공헌하였다.
유럽생활
1년 뒤인 1798년 준위가 된 시몬은 이듬해인 1799년부터 1802년까지 멕시코와 유럽을 여행하였다. 멕시코여행은 같은 크리오요들과의 만남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하였으며, 유럽(에스파냐와 프랑스)여행은 남아메리카에서만 살던 청년 시몬에게 교양과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에스파냐의 지식인 우스타리스 후작과의 만남은 그 자신이 "우스타리스는 나의 지식의 후견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시몬을 풍부한 학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시켰다.
마드리드에서 살던 외삼촌 페드로의 딸 마리아 테레사(María Teresa Rodríguez del Toro y Alaysa)와 1802년 결혼하여 잠시 고향에서 살았으나 1803년 아내가 황열병으로 죽은 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유럽에서 사는 동안 시몬은 1805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을 보면서 절대권력에 대한 멸시의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망명생활하던 로드리게스의 영향으로 1807년 고향으로 돌아가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기전 시몬은 미국에 들르는데, 미국에서의 짧은 생활은 그에게 남아메리카가 독립할 경우 미국처럼 합중국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게하였다.
독립운동 지도
고향에 돌아온 시몬은 1809년 안드레스 베요, 런던 빈민가에서 빈한한 삶을 살던 독립운동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1750년-1816년)가 합류한 독립운동을 이끌어 1811년 베네수엘라를 베네수엘라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가진 국가로 해방시킨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독립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왕당파의 카라카스 점령으로 실패하였고, 시몬은 검거를 피해 네덜란드령 퀴라소 섬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망명에 필요한 서류와 여권은 시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에스파냐 사람 이투르베가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손길이 미치자 콜롬비아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로 피신하는데, 이때 카르타헤나 선언으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베네수엘라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독립전쟁을 지도하였다. 당시 시몬 볼리바르의 군대에는 에스파냐의 학정에 반감을 갖고 있던 청년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쟁은 연전연승하였고, 결국 1814년 8월 4일 카라카스에 입성하였다. 당시 베네수엘라 공화국에서 시몬에게 해방자라는 이름을 줄 정도로 그는 큰 영광과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에스파냐군은 카라카스를 다시 침공하는데 시몬의 부대는 전쟁에서 계속 지게 된다. 당시 복수심에 불탄 시몬은 포로들을 모두 총살하였다고 한다.
독립의회에서는 사병들이 경험이 부족한 신병들이었고 무기도 열악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나, 결국 전쟁에 패하여 아이티 공화국으로 망명하여야했다. 당시 아이티 대통령 알렉산드르 페숑(프랑스어: Alexandre Sabès Pétion,1770년-1848년)은 남아메리카 독립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조건으로 4개 대대 약 1200명의 군대를 지원했으나,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 부대로는 잘 훈련된 사병과 최신형 대포를 가진 에스파냐군을 이길수는 없는 일이었다. 1816년,1817년 전쟁에서도 진 시몬은 대평원지대의 군벌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Jose Antonio Paez)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전술로 에스파냐군과 전쟁을 벌여 1818년 2월 12일 승리하였다. 하지만 에스파냐군의 재공격으로 그해 3월 26일 시몬은 베네수엘라에서의 전쟁을 당분간 포기해야했다.
1819년 시몬은 2,50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5일간의 피스바 산 산행을 거쳐 콜롬비아로 건너간다. 콜롬비아에 도착한 시몬의 부대는 5,000여명의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의 병력지원과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1819년 8월 7일 콜롬비아를 해방시켰으며, 그해 12월 17일 미국의 연방정부를 본뜬 그란 콜롬비아를 선언하였다. 베네수엘라를 당시 공략한 시몬은 에스파냐군 총사령관과의 휴전을 협정한 뒤, 군인들을 훈련시켜 자신의 부대를 정예화 했다. 결국 시몬은 파에스와 함께 1821년 11월 16일 카라보보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그해 11월 21일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였으며, 아르헨티나의 독립운동지도자 호세 데 산 마르틴(1777년-1850년)의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해방에 자극받아 에콰도르를 해방시켰다. 산 마르틴이 페루와 아르헨티나의 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유럽에 망명하자 부하 수크레를 보내 1824년 12월 9일 페루 내 왕당파들을 제거하였고, 페루 왕당파들과의 전쟁을 마지막으로 남아메리카는 에스파냐로부터 해방되었다.
남아메리카 해방후의 삶
하지만 전쟁에 지친 시몬은 1825년 2월 10일 종신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그란 콜롬비아 의회에 반납했으며 거액의 연금지불제안도 거부하였다. 하지만 권력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권력투쟁과 그의 흑인노예 해방의지에 반감을 가진 지주들의 반발이 원인이 된 암살미수사건(시몬은 자신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실패하자, 주모자 국외추방 및 관련자 석방이라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에 휘말렸다. 또한 그가 선언한 그란 콜롬비아도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의 독립으로 와해되자, 시몬 볼리바르는 1830년 그란 콜롬비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의미로 콜롬비아 보고타를 떠나 그에게 호의가 있는 호아킨 미에르가 제공한 별장에서 살았다. 지병인 폐결핵과 동료 수크레의 암살로 인한 상심으로 건강이 최악에 다달은 시몬 볼리바르는 요양을 하던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의 병자성사를 받은 뒤, 별세하였다.
바깥 고리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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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출신. 스페인 통치하에 있던 남아메리카 국가들을 해방시켜 '해방자'라고 불린다. 누에바그라나다(그란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를 해방시키고 그란콜롬비아와 페루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남아메리카가 내란으로 분열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유럽으로 갔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볼리비아라는 나라가 있다. 이 나라의 이름은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리베르타도르, El Libertador)였던 시몬 볼리바르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것이다. 시몬 볼리바르는 스페인 통치에 맞서 혁명을 지도했던 독립운동가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그란콜롬비아로 독립시켰다.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와 마리아 콘셉시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바스크 태생의 스페인 출신 가문이었다. 그는 일찍 부모님을 잃고 동생과 누이들과 함께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밑에서 자랐다.
그는 시몬 로드리게스와 안드레스 베요 등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로드리게스는 루소의 열렬한 추종자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볼리바르는 자유와 정의, 기본권에 대한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볼리바르는 14세에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7세가 되던 1799년 할아버지가 죽은 후 스페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던 그는 스페인의 귀족 사회에 쉽게 젖어들 수 있었고, 아내가 된 마리아 테레사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해서 카라카스로 돌아오고 몇 달 안 되어 아내가 죽자 그는 절망에 빠져 1804년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다.
파리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던 중에 그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였던 시몬 로드리게스와 재회하게 되었다. 로드리게스는 젊은 볼리바르를 철학과 정치의 세계로 끌어들였고,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등의 저서를 읽게 했다. 볼리바르는 프랑스 혁명 사상에 심취하며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이라는 이상을 갖게 되었고, 1807년 미국 여행을 하면서 라틴아메리카도 합중국을 지향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를 본국을 키우기 위한 밑거름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물품 중 본국과 경쟁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금지시켰고, 스페인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들어가는 수입 물품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매겼다.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이 이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이에 대해 스페인은 혁명 및 계몽 사상이 담긴 책들을 금서로 규정하고,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을 얽매는 전략을 구사했다.
볼리바르는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해에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해 정권이 혼란스러운 사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810년 4월 19일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스페인 총독의 권력을 빼앗고 총독을 추방했다. 임시정부가 정권을 잡았으며, 볼리바르는 망명 중이던 혁명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를 끌어들여 〈애국의회〉를 만들고 1811년 7월 5일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포했다. 볼리바르는 공화국 군대의 대령으로 참전했으나 푸에르토카베요 항이 스페인에 점령당하며 1812년 식민지 상태로 되돌아가는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투쟁하기로 결심한 볼리바르는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첫 번째 정치 보고서인 《카르타헤나 선언(El Manifiesto de Cartagena)》을 출간하고, 느슨한 연방 체제보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의 구성을 주장했다. 그는 특정 지역 하나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독립을 주장했고, 우선적으로 베네수엘라부터 스페인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겠다고 선포했다. 볼리바르는 1813년에 여섯 차례의 격전 끝에 스페인군을 무찌르고 수도를 되찾았고, 8월 6일에는 카라카스에 입성해 '해방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814년 다시 쳐들어온 스페인군에 패했고, 스페인군은 카라카스를 점령해 잔인무도한 폭정을 폈다. 볼리바르는 자메이카로 피신해서 《자메이카에서 띄우는 편지(La Carta de Jamaica)》를 썼는데, 여기서 라틴아메리카가 해방되지 못하는 이유를 식민지인들의 정치 교육의 부재, 크리오요(Criollo, 식민지 출생의 백인)들의 무관심과 수동적 태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815년 스페인은 파블로 모리요가 지휘하는 군대를 식민지로 보냈다. 볼리바르는 다시금 참전했지만, 베네수엘라에서는 도저히 독립을 이룩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콜롬비아를 먼저 독립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카우디요 파에스 장군의 군대와 5,000여 명의 영국 및 아일랜드 지원병을 모아 스페인 부왕령 누에바그라나다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의 군대는 아무도 침략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안데스 산맥을 넘어 스페인군을 기습했고, 1819년 8월 7일 성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3일 후 그는 보고타에 입성했다. 이 사건은 라틴아메리카 북부의 역사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스페인 인이 아닌 라틴아메리카 인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인디오도 아니고 유럽 인도 아니다. 우리는 원주민과 스페인 인의 중간 인종이다."
볼리바르는 불굴의 집념으로 자신의 과업을 하나씩 이루어나갔다. 1819년 12월 안고스투라에서 소집된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인정받으며 콜롬비아 공화국을 선포했고, 베네수엘라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군인들을 따로 훈련시켰다. 결국 파에스와 함께 1821년 11월 16일 카라보보 전투에서 승리했고, 11월 21일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여 베네수엘라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에콰도르를 해방시키기 위해 떠났다.
에콰도르 해방에는 부하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의 도움이 컸다. 볼리바르가 오늘날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 북쪽 진입로 방어선에서 스페인군과 싸우고 있을 때, 수크레는 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진군하여 협공하는 방안을 시도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1822년 5월 24일 볼리바르는 에콰도르를 해방시켜 콜롬비아 공화국에 편입했다.
볼리바르는 키토에서 평생의 사랑인 여류 혁명가 마누엘라 사엔스를 만났다. 사엔스는 전쟁터에서 대통령궁까지 언제나 그의 옆을 지켰다.
이제 남은 것은 페루뿐이었다. 1822년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두 주역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이 만났다. 산 마르틴은 라틴아메리카 남부를 해방시키며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만나 페루 문제를 논의했고, 페루 해방의 임무는 볼리바르에게 맡겨졌다. 두 영웅은 공적을 놓고 서로 다투기보다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이라는 대명제에 충실했던 것이다.
1823년 9월 볼리바르는 리마에 도착해 병력을 재정비했다. 1824년 후닌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볼리바르는 간단히 승리했고, 마무리 전투를 수크레에게 맡겼다. 1824년 12월 9일 아야쿠초 전투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결국 항복했고, 볼리바르는 이제 그란콜롬비아와 페루의 대통령이 되었다. 상(上)페루에 아직 왕당파 군대가 남아 있었지만, 1825년 4월 수크레가 이들마저 물리쳤다. 이 지역에는 해방자를 기리는 의미에서 볼리비아라는 이름이 붙었다.
볼리바르는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라틴아메리카가 하나의 합중국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라틴아메리카가 조각조각 갈라지면 합중국인 미국에 끌려가게 될 거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콜롬비아의 파나마에서 범아메리카 회의를 개최했으나 불행히 이 회의에는 콜롬비아, 페루, 중앙아메리카, 멕시코만이 대표를 파견했을 뿐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단결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828년 베네수엘라의 파에스와 누에바그라나다의 산탄데르가 서로 대립하며 마침내 내전이 일어났다. 볼리바르는 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했으나 힘든 일이었고, 9월 25일 밤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음모를 꾸며 대통령궁을 습격해 그를 살해하려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결국 그란콜롬비아가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의 독립으로 와해되자 꿈이 깨진 것에 허탈해진 볼리바르는 1830년 공화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의미로 콜롬비아 보고타를 떠났다. 유럽 여행 중에 각별하게 아끼던 부하 수크레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슬픔에 잠겨 여행을 중단하고 스페인인 호아킨 마에르가 제공한 산타마르타 근처의 별장에 머물렀다. 그리고 지병인 폐결핵으로 인해 1830년 말 요양을 하던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사망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스페인의 손에서 구해낸 이름 그대로 '해방자'였으며, 라틴아메리카를 지역적으로가 아니라 거시적으로 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보면 그가 진정으로 라틴아메리카를 위했던 애국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죽음이 동맹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평온한 마음으로 무덤에 갈 수 있을 텐데."
글
출처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진시황제, 카이사르, 다 빈치, 갈릴레오, 링컨, 간디, 체 게바라, 마더 테레사 등 고대 영웅부터 현대의 성녀까지 100인으로..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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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볼리바르 전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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