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라스 전투
탈라스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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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탈라스 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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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아바스 왕조 | 카를루크 | ||||||
지휘관 | |||||||
지야드 이븐 살리흐 | 고선지 | ||||||
병력 | |||||||
30만이 넘는다는 가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당군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많은걸로 추정. 당군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군과 중앙아시아 이민족 군대가 섞여있던것으로 예상. | 약 7만명 추정(이 중 절반이 당나라군, 나머지는 토번을 비롯한 이민족 군대, 아랍쪽 기록에는 10만명이라고 주장하나 근거 없음.) | ||||||
피해 규모 | |||||||
미상 | 전사자 3만, 도망자 4만명 | ||||||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는 751년 7월 ~ 8월 사이에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당나라군과 동맹군 카를루크가 압바스 왕조, 티베트 연합군을 상대로 지금의 카자흐스탄 영토인 탈라스 강 유역에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싸운 전투였다.
배경
태종 때(628~649년), 당나라는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목적은 당과 중동,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8세기에 당은 힌두쿠시 산맥까지 뻗친 1,610㎞ 가량의 지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새로이 이슬람화된 아랍인도 나름의 확장 계획을 품고 있었고, 710년 그들은 커다란 캐러밴 도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다.
750년, 고선지(高仙芝)가 이끄는 당나라군이 타슈켄트(석국)를 점령하고 투르크인 군주를 포로로 잡아 당나라 수도 장안에 압송했는데, 후궁 양귀비에 빠져 분별력이 없어진 당의 현종은 투르크 군주를 처형시키고 말았다. 이에 타슈켄트 왕의 아들은 당나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아랍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요청에 응해 747년 우마이야 왕조 세력을 메르부에서 몰아낸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아브 무슬림'은 부하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파견시켜 지야드가 이끄는 아바스 왕조군과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은 텐산 산맥 서북쪽 기슭의 탈라스 강에서 격돌했다.
751년 4만 명의 아랍-투르크 군대가 당 영토로 진격했으며,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탈라스 강에서 고선지의 군대와 맞섰다. 당나라군은 주로 보병이었으며, 아랍-투르크군의 주력 또한 보병이었다. 끊임없이 파도처럼 아랍-투르크군에 맞서 당나라군은 훌륭하게 방어를 수행했으나, 아군의 희생을 무시하며, 도망자들을 가차없이 즉결 처형시키는 아랍-투르크군의 공세를 견디다 못한 채 도주하였고, 겨우 몇 천 명의 당나라 군사만이 당나라로 돌아왔다.
전투 중 당나라군에 속해있던 텐산 북쪽에 유목생활을 하는 유목민 카를룩족이 아바스 왕조로 돌아섰기 때문에 당나라군은 괴멸하고 전투는 패배했다. 고선지를 비롯한 지휘관 및 소수의 병사만이 탈출했다.
결과
아바스왕조는 이 전투의 승리로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세력의 기반을 굳히게 되었고,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이슬람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상당수의 병사가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고, 그들 중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는 기술자가 포함되어 있기에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퍼지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나라는 이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쇠퇴해 더이상의 서역경영은 어렵게 되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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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전투는, 751년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탈라스 평원에서 당시 세계의 두 강대국이던 이슬람의 압바스 제국과 중국의 당나라가 맞붙은 고대 최대 규모의 세계대전이다. 7일 밤낮으로 계속된 평원 전투에서, 기습과 매복 전략에 익숙한 이슬람 군대가 뛰어난 무기를 앞세워 대승을 거두었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이끈 당나라 군대는 2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하면서 크게 패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문화 교류와 기술 전파는 전쟁을 통해 빠른 시간에 널리 확산되곤 한다. 특히 탈라스 전투를 통해 중국의 제지 기술이 이슬람으로 전해진 것은 큰 의의를 갖는다. 당나라 군인 2만 명은 포로나 노예가 되어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를 비롯한 압바스 제국의 여러 도시에 흩어져 수용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제지 기술자가 상당수 있었다. 당시 중국의 선진 기술이 필요했던 압바스 제국은 제지 기술자들을 우대하면서 종이 생산에 전념했다.
이슬람 세계는 초기에 이집트에서 생산한 파피루스를 사용하다가 압바스 시대부터는 양피지에 기록을 남겨 왔다. 나무껍질, 아마포, 대나무로 만든 중국 종이는 가볍고 질겼다. 또한 표면이 매끈할 뿐만 아니라 대량 생산이 가능해 이슬람 사회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전쟁 직후인 751년경 중국 종이가 사마르칸트에 소개되었고, 그곳에서 사마르칸트지라는 일종의 면지(綿紙)가 개발되었다. 사마르칸트지 제조 산업은 날로 번창하여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이후 아랍 각지로 보급되어 새로운 지식 혁명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종이 수요가 급증하자 아랍 여러 지역에 제지 공장들이 경쟁적으로 생겨났다. 파피루스와 양피지는 더 이상 중국 종이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 통치 시대인 794년에는 재상 자파르가 호라산 총독인 파즐의 후원으로 바그다드에 대규모 제지 공장을 세웠다. 압바스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종이가 대량 생산되면서 값싼 종이가 이슬람 전역에 퍼져 가게 되었다. 바그다드에 이어 다마스커스, 900년경에는 카이로와 북아프리카의 페즈, 12세기 중엽 이후에는 에스파냐의 발렌시아와 톨레도에서도 종이가 생산 보급되었다.
이제 이슬람 세계는 제지 기술의 발달과 종이의 대량 생산에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문예 부흥기를 맞이했다. 종이 품질이 향상되고 가격 또한 내려가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어 학문과 문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학자는 물론 일반 서민도 글을 배워 기록을 남기는 경향이 이슬람 세계 전역에 널리 퍼졌다. 아랍의 학문적 르네상스라 불러도 좋을 시기가 시작되었다.
종이를 널리 사용하게 되면서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기록한 서적 수백만 권과 문서가 현재 중동-아랍 국가의 여러 문서국과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은 당시의 학문과 과학을 이해하는 데는 물론 궁정 생활, 사회 구조, 국제 관계를 파악하는 귀중한 1차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신라와 고려에 관한 수십 종의 기록이 발견된 것도 이런 자료 뭉치들 속에서였다.
한편 유럽은 이슬람 세계에서 종이를 수입해 오다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에스파냐와 시칠리아를 통해 제지 기술을 도입한 뒤 종이를 직접 생산하게 되었다. 1109년 북아프리카에서 인근 시칠리아로 종이가 전해졌고, 이어 이슬람이 지배하던 에스파냐에서 제지 산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중세 유럽이 종이 문화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1492년 에스파냐의 지배 세력이 이슬람에서 기독교 세력으로 넘어가면서, 무슬림 기술자와 장인들이 대거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버렸다. 그 뒤 종이의 생산량과 품질이 떨어졌다. 그러나 우수한 문화 발전의 산실이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적된 이슬람 과학과 문명의 결실들이 종이에 기록되고 라틴어로 번역되어, 훗날 유럽 르네상스가 성숙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아랍이 중국에서 받아들여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에 전해 준 많은 문화 가운데 풍차의 원리도 있다. 풍차는 원래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전해진 뒤 개발되어 아랍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었고, 1880년대까지 널리 이용되었다.
중국의 청자는 이슬람 세계의 왕족과 고위 관료층의 식기로 사용되었다. 이는 특수한 청자 식기가 음식의 독극물을 쉽게 판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칠기, 차, 공예 기술, 비단과 직조 기술 등이 서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탈라스 전쟁 포로 가운데 제지 기술자와 함께 금은 세공사와 직물공, 화가들도 압바스 치하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탈라스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 종교와 문화 또한 중국 사회에 널리 인식되었다. 고선지 아래에 있던 장수 두환은, 포로로 압바스 제국의 쿠파(바그다드 근교)에서 12년간 억류되었다가 중국으로 귀환했다.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경행기》에 묶었는데, 원문은 전해오지 않지만 당나라 정치가 두우의 《통전》에 그 내용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경행기》에는 아랍의 풍습, 지리, 특히 이슬람 종교의 원리와 신앙 체계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이슬람에 관한 중국 최초의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아랍의 풍습과 종교 생활을 《경행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대식(아랍국을 말한다.)은 일명 아구라(亞俱羅 : Ya-chu-lo)라고 불린다. 왕은 무민(Mumin)이라고 부르고 수도는 쿠파이다. 그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의상을 정결히 한다. 여인이 문 밖 출입을 할 때는 베일로 얼굴을 가린다. 귀천을 따지지 않고 매일 다섯 차례 하늘에 예를 올린다. 금식을 하고, 음주가무를 즐기지 않는다. 남자는 은대(銀带)를 차고 은도(銀刀)를 지니고 있다. 수만 명을 수용하는 예배당이 있다. 일곱째 날, 왕이 예배를 주도하고 설교대에 올라 다음과 같은 설법을 행한다.
“인생은 유한하고, 하늘의 도는 바꿀 수 없다. 선을 행하고, 거짓과 절도, 기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 살인은 대역죄이다. 그러나 전쟁에 나가 적을 무찌르고 전사하는 자는 큰 보상을 받으리라.”
《경행기》는 현지 체험을 바탕으로 쓴 내용이라 비교적 정확하고, 이후 중국 문헌의 이슬람과 대식에 관한 서술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탈라스 전투는 13세기 몽골 제국이 건설되어 동서 문화 교류가 속도를 더하기 전까지, 서아시아 이슬람 문화와 동아시아 유교, 불교문화의 상호 교류 측면에서 아시아 대륙에서 발생한 가장 극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동아시아 문화와 아랍-이슬람 문화가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게 하여 서로 다른 두 문화권이 적극적으로 교류한 결과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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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책"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157~158쪽]
* 高仙芝 (고선지)
출생일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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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 | 755년 |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
당의 서역 원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 패했다.
755년 안녹산의 난에서 토벌군을 이끌고 수도인 장안을 지켰다. 그러나 전투 중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 기술과 나침반 등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 동서 문화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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