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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오의 난을 일으킨 인물]오시오 헤이하치로[Oshio Heihachiro , 大塩平八郞 ]

Bawoo 2017. 2. 20. 22:57


오시오 헤이하치로[Oshio Heihachiro , 大塩平八郞 ]



출생일1793, 일본 오사카[大阪]

사망일

1837. 3. 26, 오사카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양명학자.


1837년 오사카에서 도쿠가와 바쿠후[德川時代]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헤이하치로는 통칭이며 호는 주사이[中齊]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으며 꽤 일찍부터 요리키[與力:에도 시대에 하급관리를 지휘하던 직책]로 종사했다. 무술에 뛰어났으며 거의 독학으로 중국의 왕양명(王陽明)을 비롯하여, 일본의 양명학자 나카에 도주[中江藤樹],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 등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820년 긴미야쿠[吟味役:피의자의 조사와 심문을 담당한 직책]에 발탁되어 사교를 단속했으며, 뇌물을 받은 긴미야쿠를 처벌하고 그 은닉금을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금기를 어긴 파계승들을 처벌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1830년부터는 긴미야쿠 직을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했으며, 특히 양명학의 전통을 잇는 데 힘썼다.


한편 1830년대 초기부터 시작된 기근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심해져 전국적인 민중반란을 초래했다. 오시오는 빈민구제를 위해 위정자들에게 여러 대책들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분노하여 자신의 사숙(私塾)인 센신도[洗心洞]에서 반란계획을 세웠다. 그는 모든 장서를 매각하여 그 돈을 빈민들에게 분배하고 1837년 2월 19일 수십 명의 동지와 함께 거사하여 호상(豪商)의 집을 불태우고 창고를 파괴했다.

반란 결과 오사카 시내의 1/4 이상이 불에 탔고 물가가 폭등했으며 따라서 아사자는 더욱 증가했다. 또한 반란 모의가 사전에 누설되어, 반란 후 즉각 근방의 여러 한[藩]이 진압군대를 동원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반란군측에는 승산이 없었다. 오시오는 진압군과의 싸움에 패배함으로써 반란군을 해산시키고 자신은 한 상인의 집에 몸을 숨겼으나 발각되어 자살했다.


오시오의 난은 연이어 일어난 수많은 농민 봉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덴포 개혁[天保改革]의 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쿠가와 바쿠후 말기의 지사(志士)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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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중기의 양명학자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한문으로 기록한 독서 감상록이다. 상권은 108개 조, 하권은 138개 조로 구성된 수상록이며, 1833년에 간행되었다. 저명한 학자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을 수록한 부록을 포함해 전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35년에 재간행되었다. 이 책이 간행되고 2년 뒤에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이 일어났다.

양지에 이르는 길

‘센신도(洗心洞)’는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서재 이름이자 서당 이름이며, ‘차기(箚記)’는 독후감 따위를 적은 감상록이라는 의미이다. 수상록이므로 각 조 사이에 연결되는 점이 없고, 내용도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러나 책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태허(太虛)’, ‘치양지(致良知)’, ‘기질(氣質)을 변화시킨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한다’, ‘허위를 벗어 버린다’ 등 5개 항목을 통해 선인들의 가르침을 강조한 양명학에 기반을 둔 주사이의 학문적 열정이다. 다음은 그 대략적인 내용이다.

주사이는 독서를 논할 때 주자(朱子, 1130~1200, 남송의 유학자)가 한 “성인의 말씀을 읽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몸에 익히지 못한다면 책방에 놓여 있는 책이나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읽는 것이 성인의 글이 아니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라는 말(하권 129조)과 육상산(陸象山, 1139~1192, 남송의 유학자)의 “문장의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단지 문장의 의미 정도만 알면 된다는 말은 마치 어린아이의 공부와 같은 것이다”(하권 132조)라는 말을 인용했다. 주사이에게 독서는 ‘양지에 이르는 길[치양지(致良知)]’(하권 14조)이었다.

‘양지(良知)’란 태허영명(太虛靈明)한 것이다(상권 34조). ‘태허’란 태극과 거의 같은 의미이지만, 우주 생성의 법칙 또는 우주 그 자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영명’이란 그 같은 태허가 두루 미치며 거리낌이 없는 융통무애(融通無擬)한 활동을 가리킨 것이다. ‘치양지’는 왕양명(1472~1528, 명나라의 유학자)이 제창한 수양론이지만, 마음이 태허에 합치된다는 것 역시 왕양명이 주장한 ‘천지 만물로서 하나가 된다’는 학문을 가리킨다.

학문이란 도를 배우는 것이다. 주사이는 “도가 되는 것은 태허뿐이다. 그러므로 배워서 태허로 돌아가게 되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는 것이다”(상권 15조)라고 했다. 또한 “생명이 있는 것에는 죽음이 있다. ‘인(仁)’은 태허의 ‘덕’이므로 영원불멸하다. 영원불멸한 것을 버리고 죽음이 있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미망이다. 그러므로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들이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인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상권 19조)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사이는 ‘덴보(天保, 1830~1844)의 의거(義擧)’라고 불리는 반란을 일으켜 행동으로써 자신이 앞서 했던 말을 그대로 실천해 보였다.

독서만이 학문은 아니다라는 주장은 원래 왕양명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 근거한 것이다. 지행합일이란 지식과 행동을 합치시킨다는 뜻으로 왕양명은 “‘지’는 ‘행’의 시작이며 ‘행’은 ‘지’의 완성이다. 성인이 학문을 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지행’을 나누어 이룰 수는 없다”라고 기술했다. 그리고 ‘치양지’의 ‘양지’란 지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양지에 이른다’라는 의미는 행함이 있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양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 지닌 본질이 양지이고, 그 양지의 본질이 인(인간관계에서 사랑에 기초한 최고의 도덕. 주사이는 태허의 덕이라고 했다)이며, 양지는 지극히 선한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또한 양지는 도(道)이므로 성인과 현자의 마음은 물론 보통 사람의 마음에도 존재한다. 더욱이 양지는 천리(우주의 원리)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인격이 높은 사람은 천지 만물과 일체가 되는 사람’이라는 사고방식이 나왔다.

청나라 때의 학자는 거의 대부분이 양지를 존중하지 않았다. 당시의 정부 방침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양지를 배척한 것도 아니다. 양지는 효제(孝悌, 부모와 연장자를 받드는 것으로 인의 기초이다)이므로 백성이 정말 효제의 마음을 다하고자 해도 자신과는 맞지 않는 일들이 계속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 하권 76조


양명학에 내재된 혁명 에너지

『대학(大學)』에 이런 글이 있다.

지식은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인식한 후에야 모든 면에서 활동하게 된다. 지식이 모든 면에서 활동한 후에야 사물에 대한 생각이 성실해진다. 사물에 대한 사고가 성실해져야 마음이 올바르게 되고, 마음이 올바르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인격의 수양이 가능하다. 인격의 수양이 가능해야 가정이 원만해지고 가정이 원만해져야 국가 정치가 잘 돌아가고, 국가 정치가 잘 돌아가야 세계가 평화로워진다. 그러므로 천자에서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각자의 인격을 수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중국에서는 ‘위정자란 이러한 명덕을 천하에 널리 밝히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위정자에게 명덕이 없으면 그 지위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혁명이다.

주사이는 청나라 정부가 양지를 배척한 이유를, 백성이 양지를 갖추면 정부에 명덕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비판할 것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주사이는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양지와 양명학 속에 혁명의 에너지가 감추어져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주사이에게 세상의 학자들은 그리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주사이는 그들을 이치만 따지고 활기가 없다(상권 24조)고 평했다. 그리고 “사람은 갓난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으면 양지를 얻고 순수하고 청명해진다”고 하고, 근래의 학자들은 갓난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양지로 나아갈 수 없다고 했다.

주사이는 다른 곳에서도 갓난아이의 마음을 거론했는데, 이는 『맹자』에 나오는 “대인(大人)은 그 갓난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라는 대목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갓난아이의 마음을 강조한 것은 양명학의 좌파라고 불리는 명나라 이탁오(李卓吾, 1527~1602)의 ‘동심(童心)’ 설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이탁오는 자연 속의 순수한 마음을 동심이라고 하고, 동심을 근거로 정치와 학문 속의 위선을 심하게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결국 관료들의 박해를 받아 옥중에서 자살했다.

주사이는 자신의 학문을 ‘공맹학(孔孟學)’이라고 했으나 양명학적인 경향이 뚜렷하다. 하지만 주자학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에 대해서도 “정자[程子,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 두 학자를 가리킨다]와 주자가 일찍이 양지를 부정했을까?”(하권 6조)라고 말하며 “주자의 글은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왕양명 이전의 주자학파의 글을 읽는 편이 더 낫다”(상권 66조)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주자 이후 주자학파 학자들에 대해서는 “입으로는 주자학을 외치고 있으나 실제로는 문외한에 불과하다”(하권 129조)라고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거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일어난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각주1) 은 일본에도 전해졌다. 1974년 5월 호 『인민화보(人民畵報)』(베이징, 국제서점)의 비림비공 운동에 관한 기사에 『장자』의 「도척편(盜篇)」에 나오는 도척의 공자 비판이 소개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9,0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도척이라는 도적 두목을 공자가 만나러 갔을 때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도척은 공자를 노나라의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공자가 사람들에게 엉터리를 가르치며 일도 안 하면서 자기 생각만 마음대로 주장해 천하의 군주들을 현혹하고 학자의 본심을 잃게 했다고 비난했다. 또 제멋대로 효제의 길을 주장해 제후의 힘을 빌려 좋은 자리에 나아가려고 획책하는 자라고 잘라 말하고는 공자와 논전을 벌여 공자를 꼼짝 못하게 몰아붙였다는 내용이다.

그는 또 세상의 일반 사람들이란 무사와 같은 힘이나 학자와 같은 그럴듯한 논리도 없이 그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명예나 행복을 추구하면서 치욕과 재난을 피하고자 할 뿐(상권 242조)이며, 천지 우주의 이치를 버리고 인욕에 머무는 것이 세상 일반 사람들의 인정(상권 162조)이라고 했다.

이러한 현실 파악은 주사이가 흔히 보는 금욕주의적인 도학자가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이 역시 유교 도덕을 비난했던 이탁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센신도 차기』 부록에는 라이 산요(賴山陽, 1780~1832, 에도 시대 후기의 유학자이자 한시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산요는 그 시에서 “그대를 이름하여 소양명(小陽明)이라 불러야겠소”라고 읊었다. 주사이에 대한 적절한 평이 아닐 수 없다.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이름은 고소(後素), 자는 시키(子起)이며, 헤이하치로는 통칭이다. 교양을 갖춘 지식인인 군자는 중용(中庸, 과부족이 없는 상태)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호를 주사이(中齊)라고 지었다. 1793년 1월 22일 오사카에서 태어나 1837년 3월 27일에 45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집안은 대대로 오사카의 히가시마치부교(東町奉行, 행정 · 사법 담당 관리)의 구미요리키(組與力, 부교 아래의 하급 실무 관리자)였다. 헤이하치로가 28세 되던 해에 히가시마치부교로 새로이 부임한 다카이 사네노리(高井實德)가 주사이를 중용했다. 다카이 사네노리는 주사이가 38세 때 사직했는데, 이때 주사이도 관직을 물러나 은거하면서 센신도(洗心洞, 주사이의 개인 서당)에서 유학을 가르쳤다.

주사이가 44세 되던 1836년에는 흉작과 경제 정책의 실패로 오사카 시내의 쌀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주사이는 오사카의 히가시마치부교인 아토베 요시스케(跡部良弼)에게 헌책하고 부유한 상인들을 설득해 빈민 구제를 위한 기부를 요청했으나 어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듬해 1837년에는 상황이 한층 악화되었고, 결국 주사이는 2월 2일 자신의 장서를 모두 팔아서 마련한 약 1,000냥의 돈을 어려운 가정 약 1만 세대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2월 19일 새벽에 서민들을 괴롭히는 관리들과 오사카의 악덕 상인들을 토벌하기 위해 병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고작 800명에 불과한 병력에다 주사이를 배신한 사람마저 있어 3일 밤낮으로 싸웠으나 패주하고 말았다. 3월 27일 아침, 주사이는 몸을 숨기고 있던 집이 포위되자 스스로 그 집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이것이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이다.

주사이의 거병 의의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비하다. 당시의 지배자 계층과 지식인 사이에서는 그의 거병에 관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하는 사람, 귀신에 홀린 것 아니냐고 놀라는 사람, 주사이와의 교류를 부정하는 사람 등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부정적 시각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오사카의 일반 시민들은 전투로 인해 집과 가재도구가 전부 불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시오 님이 힘을 써 주셔서 좋은 세상이 되었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미토 번의 유학자 후지타 도코(藤田東湖, 1806~1855, 막부 말기의 유학자)처럼 뜻있는 사람들은 주사이가 거병을 위해 쓴 격문[취의서(趣意書)]을 손수 베껴 간직했을 정도로 뒤에서 그의 행동에 공감했다.

주사이의 거병은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 소설가)의 소설 『오시오 헤이하치로』(1913)에 그 내용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또한 훗날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 소설가이자 극작가)는 오시오 주사이에게 경도되어 「혁명 철학으로서의 양명학」(『행동학 입문』, 1970년 간행)이라는 평론에 주사이의 태허설(太虛說)을 자세히 소개했다. 하나 더 밝혀 둘 것은 주사이가 거병한 지 30년 후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주사이는 일반인들에게는 반란의 주인공으로 유명하지만, 실은 한학자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주사이의 저술이 대부분 뛰어난 한문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저서로 『고본대학괄목(古本大學刮目)』, 『증보효경휘주(增補孝經彙註)』 등이 있다. 양명학의 입장에서 논한 주장이나 박식한 방증 자료 등에 보이는 학문적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시오 헤이하치로(大鹽平八郞)

[글-마쓰무라 아키라]

[출처:정보-책 '일본 군사사'/수집-다음백과/ 절대지식 일본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