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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장으로 추앙받은 일본제국 장군 ]이마무라 히토시

Bawoo 2017. 5. 8. 22:32

 

이마무라 히토시
Hitoshi Imamura.jpg

 

 

(일본어: 今村 均, 1886년 6월 28일 ~ 1968년 10월 4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의 육군 대장.

 

 

생애

이마무라 히토시는 미야기 현센다이 출신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문학을 전공해 재판관인 아버지의 신망을 잃어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원래 지망했던 인문 고교로 진학할 수 없게 돼 어머니의 권유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마음을 돌리게 된다.

일본 육사 시절

처음에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했지만, 어느 날 일본 천황의 행차를 호위하는 육군의 위용을 보고 바로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해 후보생으로 합격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야뇨증으로 고생해 청년기에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으로 고생했는데, 이 때문에 수업 도중 조는 일이 많아 교관에게 혼나는 일이 많자, 그는 동기생에게 자기가 졸 때면 칼로 허벅지를 찔러달라고 하고, 민가에서 고추 가루를 구해와 눈에 넣는 등 노력을 인정받아 교관에게 더 이상 혼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마무라는 육군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마무라는 여기서도 조는 것을 반복했지만,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의 일을 교관도 알았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1915년, 이런 장애를 딛고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은사의 군도를 수여받게 된다.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초기, 제16군 사령관으로 자바 섬 공략을 지휘해 9일만에 10만의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을 항복시켰다. 공략 당시에 네덜란드 군에 의해 유배당했던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의 지도자 수카르노와 핫타를 정치범에서 해방시키고, 자금과 물자를 원조, 현지민의 관리등용 등을 지원했다. 군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적이 파괴한 석유 정제 시설을 복구, 석유 가격을 네덜란드 통치 시대의 절반으로 내려 보급하고 약탈을 금지해 치안을 유지시켰다.  이런 조치는 현지인들의 호감을 얻었다.[1]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에서는 피복이 부족해 배급이 이뤄지자 일본 정부는 자바에서 생산되는 목면의 대량 수입을 고려했지만 이마무라는 이 요구를 거절한다.  목면을 징발하면 현지인들이 장례에서 죽은 자에게 목면옷을 입히는 종교 전통을 손상하게 되고, 목면이 주수입원인 기본 생활을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군부에선 그를 비난했지만,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정부 관계자의 배려로  계속 자바 섬을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육군 대본영에서는 그를 불충하다고 판단해 1942년 3월,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참모장에게 자리를 넘기고 바타비아로 보내졌다. 일본 군부는 "중앙에선 자바 섬 공략으로 만족할 지 모르지만, 한편으론 비판도 있다는 걸 주의하기 바란다"라며 질책했다.

그는 제8방면 군사령관으로 뉴브리튼 섬에 위치한 라바울에 부임해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 대장과 회견했다.

(라바울 방면의 지도)사관생도 시절 야마모토와는 서로 간담상조하는 사이여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죽은 뒤에 아주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마무라 자신도 비행기로 시찰 도중 미군기의 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위험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의 섬들이 미군에게 함락되자 이마무라는 보급이 되지 않아 굶어 죽은 과달카날 주둔 병사들의 비극을 전해듣고, 섬에 대규모로 전답을 만들어 손수 밭을 갈고 작물을 수확해 병사들을 먹여살렸다.

운이 좋게도 미군은 라바울을 공략할 생각이 없었다. 라바울의 해군, 공군을 무력화 시키면 해상주도권이 미국에게 있는 한 라바울의 일본군은 나오지 못하고 미군은 마음 놓고 전진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라바울이 본토를 공략하는데 전략적 가치가 있는것도 아니고 필리핀처럼 자원이 풍부하거나 정치적 중요도가 높은것도 아니어서 미군은 큰 피해를 무릎쓰고 점령할 가치가 없는 섬이었다.

이마무라는 섬에 미군의 공습을  대비해 지하 요새도 건설했다.  라바울 주둔 일본군은 경작한 전답에서 나오는 식량으로 보급이 없어도 자급이 가능했기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소유로 남아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이마무라는 지휘관으로서 호주 전범재판에 소환되었다.ㅡ 호주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포로들을 처형하는 걸 용인하고 2만여명의 인도인들을 강제로 인도국민군에 배속시켰다는 혐의로 B급, C급 전범으로 10년형을 선고 받게 된다.[2] 그는 재판에서 부하들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인정했으며 죄를 저지른 자신의 부하들에게 제대로된 처벌을 받을수 있도록 자신의 재판을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마무라 휘하 라바울 주둔군에서는 390명이 포로학대와 학살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 중 266명이 유죄 판결을 받아  87명이 사형당했다. [3] 이는 이마무라가 휘하 장병들의 전쟁범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근거가 되었는데,  만일 지휘관의 제대로된 조치가 있었더라면 포로학대와 전쟁 범죄를 막을수 있었을 것이라는 논거였다. 특히  라바울은 다른 일본군 기지에 비해 식량난이나 미군의  대대적인 공격도 없었던 탓에  포로학대와 학살이 일본군의 열악한 현실 때문이라는 변명은 성립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판에서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는 이 모든 전범들을 몰랐다며 선처를 요청했다. 이마무라가 실제로 이 많은 포로학대건을 몰랐는지 알수 없지만 재판부는 그 의견을 받아 들였다. 하지만 수많은 전범케이스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했는데 이 책임은  라바울의 참모장 아다치 하타조 중장에게 돌아갔다. 아다치 중장의 변호사가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와 비슷한 주장을 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다치 중장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이마무라는 학살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부하 장교들을 위해 탄원서를 써준적이 있다.

그 후, 제16군 당시 책임 문제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4] 1949년, 이마무라는 스가모 구치소로 이송될 예정이었지만, 현지 계류중인 부하들을 두고 자신만 도쿄로 돌아갈 수 없으니  일본군 병사들이 수용된 마누스 섬 수용소에 입소하기를 희망하였고 이를 맥아더에게 알리게 했다.

 

형기를 마친 이마무라는 귀국한 뒤  자택에서 두문불출하고 근신하며 전쟁의 책임을 반성하는 등, 소박한 생활을 했다. 이후에는 이마무라는 회상록을 출간, 거기에서 나온 수익금을  모두 전사자 유족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 일로 인해 이마무라는 성장(聖將)으로 추앙받았다.

이마무라는 1968년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일본국립도서관 헌정자료과실에는  그의 육성이 담긴 정치 담화 녹음이 남겨져 있다. 

 

각주

  1. 이동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86쪽
  2. 이동 http://www.austlii.edu.au/au/journals/AUIntLawJl/2009/4.pdf
  3. 이동 https://www.ocf.berkeley.edu/~changmin/documents/Sissons%20Final%20War%20Crimes%20Text%2018-3-06.pdf
  4. 이동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241쪽[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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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휘하 장병들의 안위를 끝까지 걱정한 덕장.

미야기 현의 센다이 출신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일본 천황의 행차를 호위하는 육군의 위용을 보고 바로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한다. 판사였던 아버지가 영 군인을 탁탐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지병으로 고생했지만[1] 친구의 도움으로 육군유년학교-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교를 모두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었다.

2. 2차대전시기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제16군 사령관으로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공략을 지휘, 불과 9일만에 약 9만 3천의 네덜란드군과 5천명의 영국군·미군·호주군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의 가장 중요한 전략 목표였던 팔렘방의 유전지대를 확보했다.

이 인도네시아 공격 당시 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일본 육/해군 간의 심각한 팀킬이 있었다. 제2차 자바 해전 당시 육군 병력이 탄 수송선단이 이동 도중, 미 해군 순양함과 호위함이 교전을 벌이다가 오인사격으로 수송선을 여럿 격침시켜 버렸고, 히토시 본인도 물에 빠지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난리가 날게 뻔했지만 두루뭉술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수송선단의 호위 임무를 지휘하는 오자와 지사부로가 본래 계획보다 호위 전력을 대폭 증강해 주어서 인도네시아 공략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 때문에 해군 측에 감사를 표하던 이마무로 본인이 수송선의 격침은 연합군 해군에게 공격받은 것으로 치자며 넘어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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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이마무라 히토시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호감을 얻었고, 포로학대와 학살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전범재판에서 관대한 형을 받는 이유중에 하나가 된다. 당시 자바섬에 목면은 생필품으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는데, 목면을 징발하면 현지인들의 장례식에서 죽은 자에게 목면옷을 입히는 종교 전통을 손상시키고, 목면이 주수입인 기본 생활을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중일전쟁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태도가 문제가 되어 결국 1942년 11월에 현지를 떠나게 되었지만, 공훈이 공훈이라 좌천을 포함한 처벌은 거의 없이 영전이라면 영전인 제8총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3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1942년 말부터 8방면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마무라의 후임 사령관인 바바 마사오는 전후에 민간인 학대와 전쟁범죄로 사형당했다. 여기에 네덜란드 민간인 위안부 강제동원 사건도 터지는 등 다른 곳보다는 여전히 낫기는 해도 꽤 막장화되었다.

이마무라 히토시는 라바울과 뉴기니 섬 인근 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운이 좋게도 라바울은 농사를 짓기에 용이한 기후와 토양을 가져 태평양 전쟁 때 라바울에서 직접 농사까지 지어가며 종전까지 버텨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일본군 중 거의 유일하게 식량 보급으로는 곤란을 겪지 않은 곳이었다. 그와 반대로 트럭섬에 있는 일본군은 미군이 해상봉쇄를 가하자 농사를 짓지 못했고 많은 수가 굶어 죽었다. 미군은 애초부터 라바울을 공략할 생각이 없었다.[2]라바울의 해군, 공군병력을 무력화 시키면 해상주도권이 미국에게 있는한 라바울에 있는 일본군은 고립될것이고 미군은 마음 놓고 전진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더군다나 라바울의 방어 시설과 보급도 잘 되어있는 데다가 병력도 8~13만명이 주둔하고 있어서 만약 미군이 상륙했으면 (2만여명의 일본군이 주둔했던) 이오지마는 놀이터처럼 보일정도로 대격전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래서 미군에게 라바울은 피해를 무릅쓸만큼 점령할 큰 전략적 가치가 없었다.

3. 전쟁 이후[편집]

전쟁 이후 이마무라 히토시는 휘하 장병들의 본국 조기 송환을 위해 호주 군 당국과 공조하였다. 일이 마무리되자 1946년 7월 독약을 마시고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호주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포로들을 처형시키는걸 용인하고 2만여명의 인도인들을 강제로 인도국민군에 배속시켰다는 혐의로 B급, C급 전범으로 10년형을 선고 받게 된다.출처 그는 재판에서 부하들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인정했으며 죄를 저지른 자신의 부하들에게 제대로된 처벌을 받을수 있도록 자신의 재판을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호주 전범재판에서 라바울에서만 이마무라 대장을 포함한 390명이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았고 266명이 유죄를 선고 받고 무려 87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단순 전범들의 숫자만 봐도 다른 일본군 점령지를 훨씬 상회한다. 출처.
라바울의 일본군의 상황이 얼마나 개판인지 알수있었던 상황. 만약 일본군이 열악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느정도 이해가 갈수도 있지만 라바울은 다른 일본군 기지에 비해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식량난도 없었고 대대적인 적군의 공격도 없었다. 호주 전범재판에서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는 이 모든 전범들에대한 무지로 선처를 요청했으며 실제로 재판부는 그 의견을 받아 들였다. 다만 라바울의 참모장 아다치 하타조 중장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그 이유로는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물론 아다치 중장의 변호사가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와 비슷한 주장을 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마무라의 유죄 여부와는 별개로, 적어도 휘하 장병들에게는 존경받는 덕장이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이마무라가 전후에도 휘하 장병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 점에 대해서는 더글라스 맥아더조차 "일본에 온 이래 처음으로 참된 무사도 정신을 접한 것 같다"며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3]

일본군 장성으론 드물게 최소한의 개념자체는 있는 인물이었다. 그 예로 강간죄로 사형을 선고 받은 장교에게 항소를 금지한적이 있다. 물론 그 장교는 항소를 하던 말던 사형이란건 변하지 않지만 이마무라중장의 최소한의 도덕성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부하들에게 그런건 아니고 사형선고를 받은 몇몇 장교들에게 탄원서를 써주기도 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e/e0/Imamura_Hitoshi.JPG/170px-Imamura_Hitoshi.JPG


1955년의 모습

이후 출소하여 일본에 귀국한 뒤 은둔 생활을 하면서 회고록을 출판했으나, 인세는 전부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위해 쓰고 본인은 군인 연금만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전쟁의 책임을 반성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필리핀 공격 지휘관이었던 혼마 마사하루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19기 동기이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에히메현의 호국신사에 이마무라의 이름이 '순국 22열사의 비'에 새겨져있다. 참고로 이 비석에 새겨진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다치바나 요시오다.

도쿄의 국립국회도서관에 그의 육성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무타구치 렌야의 육성도 남아있다고 한다.


[1] 현대의학으로 분석한다면 가벼운 기면 발작이 있었다. 전공시간만 되면 갑자기 졸음이 쏟아젔다고.[2] 정확히 설명하면 과달카날 전역 이후 1943년 전 기간동안 남태평양의 미군(홀시+맥아더)이 라바울 점령을 목표로 카트휠(수레바퀴)작전을 펼쳤으나 작전 중반 개구리 뛰기의 작전술(?)을 발견하고 라바울을 우회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는 1944년 3월까지 라바울 외곽의 섬 거점들을 점령하고 종결..[3] Tsunoda Fusako, Sekinin Rabauru no shogun Imamura Hitoshi (Tokyo: Shincho-sha, 1984), p.357[나무 위키]
 
 

Early career

A native of Sendai city, Miyagi Prefecture, Imamura’s father was a judge. Imamura graduated from the Imperial Japanese Army Academy in 1907 and was commissioned a second lieutenant in the infantry on 26 December of that year. He was promoted to lieutenant in November 1910 and attended the Army War College (Japan) in 1915. He was promoted to captain in 1917, and was sent to England as a military attaché the following year. He was promoted to major in August 1922 and to lieutenant-colonel in August 1926. In April 1927, he was appointed as a military attaché to British India. Promoted to colonel on 1 August 1930, he held a number of staff positions in the Operations Section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General Staff from 1931-1932.

Wars in China

With the January 28 Incident of 1932, he was sent to take command of the IJA 57th Infantry Regiment. on his return to Japan, he became Commandant of the Narashino Army School from 1932-1935.[1]

In March 1935, Imamura was promoted from regimental commander to brigade commander of the IJA 40th Infantry Brigade with the rank of major general. He was assigned as Deputy Chief of Staff, of the Kwangtung Army in Manchukuo in March 1936. He was recalled to Japan to assume the post of Commandant of the Toyama Army Infantry School from 1937-1938.

Promoted to the rank of lieutenant general in March 1938, Imamura was given command of the IJA 5th Division, then based in China, which he continued to command in the early stages of the Second Sino-Japanese War to 1940.

From 1940-1941, he was Deputy Inspector-General of Military Training, deputy to one of the most powerful officials in the Japanese Army. He was subsequently appointed Commander in chief of the Twenty Third Army.

The Pacific War

Imamura became the commander of the Sixteenth Army in November 1941, and was directed to lead that army in the invasion of the Dutch East Indies. As his fleet approached Java, during the invasion, his transport, the Shinshu (Ryujo) Maru, was sunk by torpedoes, probably by friendly fire, in the Battle of Sunda Strait and he was forced to swim to shore.[2]

 

Imamura adopted an unusually lenient policy towards the local population of the former Dutch East

Indies (present-day Indonesia), which was often in conflict with general opinions and plans of the senior staff of the Southern Army and Imperial General Headquarters. However, his policies won much support from the population (particularly in Java, where he and the 16th Army, placed under his command, was based at) and helped to mildly reduce the difficulties of the Japanese military occupation. In late 1942, he assumed command of the new Eighth Area Army, responsible for the Seventeenth Army in the Solomon Islands Campaign and the Eighteenth Army in the New Guinea Campaign. Imamura was then based at Rabaul in New Britain.[3]

 

Imamura was promoted to full General in 1943. Along with the naval commander at Rabaul, Vice Admiral Jinichi Kusaka, Imamura surrendered the Japanese forces in New Guinea and the southern Pacific Islands to Australian forces, representing the Allies, in September 1945. Imamura was detained at Rabaul by the Australian Army, as he and troops under his command were accused of war crimes, including the execution of Allied prisoners of war (one infamous example being how Allied POWs that his troops captured in eastern Java were locked up in bamboo cattle cages that were thrown overboard into shark-infested waters[4]), and were held for a military tribunal.

 

In April 1946, Imamura wrote to the Australian commander at Rabaul, requesting that his own trial

for war crimes be expedited in order to speed the prosecution of war criminals under his command.[5] Imamura was charged with "unlawfully [disregarding and failing] to discharge his duty...to control the members of his command, whereby they committed brutal atrocities and other high crimes...".[6] He was tried by an Australian military court at Rabaul on May 1–16, 1947; convicted, and

sentenced to imprisonment for ten years. Imamura served his imprisonment at Sugamo Prison, in Tokyo, until he was released in 1954.[영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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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보-책

일본군의 패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