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 고조 석경당(後晉高祖 石敬瑭, 892년 3월 30일[1][2] ~ 942년 7월 28일[3][2])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후진의 초대 황제이다. 후진은 오대십국 시대 중반기의 세 왕조를 이룬 사타 계열의 세 세습 왕조(후당・후진・후한) 중에서 두번째 왕조였다.
[생애]
출신은 사타족(沙陀)으로 타이위안(太原)에 거주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아버지 석소옹(石紹雍)은 이극용(李克用)의 정벌한 공에 의해서, 명주자사(洺州刺史)로 임명되었다.
어린 시절에 이사원(李嗣源, 후당 명종)에 인정받아 사위가 되었다. 동광 4년(926년)의 위주(魏州) 방위를 맡았고, 석경당은 이사원과 함께 변주(汴州)로 이동하였고, 그 후 낙양을 공격했다.
이사원이 즉위한 후, 석경당은 보의(保義), 선무(宣武), 하동(河東) 지방의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이종가(李從珂)가 이종후를 폐위하여 황제로 즉위하면서, 석경당의 세력을 경계하게 되어, 천평군 절도사(天平軍節度使)로 좌천되었다.
그 후, 국내의 반란에 틈을 타서 거란족을 이용하여 황제를 자칭한 후에, 거란족의 군사를 이용해 936년에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晉)을 건국했다.
즉위 후에 연운십육주를 요나라에 바치고 매년 30만필의 비단을 조공하는 조약을 맺어, 석경당보다 10세 연하의 야율덕광을 「아버지 황제」라고 칭하고, 스스로를 「아들 황제」라고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방식에 불만을 가진 안중영(安重榮)과 경연광(景延廣)등의 세력과 굴욕적이지만 현 상태를 유지하여 그 동안 국력을 안정시켜 이어가자는 상유한(桑維翰)의 세력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후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인 유지원(劉知遠)이 토욕혼(吐谷渾)에게 투항을 하였기 때문에, 자주 거란으로부터 문책을 받아 942년에 분사하였다.
후세의 평가
석경당은 황제의 지위를 얻기 위해 연운 16주를 거란(요나라)에 영토를 주었고, 한층 더 요나라의 종속한 것부터, 후세에 특히 민족주의가 높아진 근대에 매국노의 전형으로 삼아 남송의 진회(秦檜)등과 함께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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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중귀(石重貴, 914년 ~ 974년)는 오대십국시대 후진(後晉)의 제2대 황제(재위 : 942년 ~ 946년)이다.
시호는 없지만 출제(出帝)로 칭해지고 있다.
생애
석경당의 조카로서 타이위안(太原)에서 태어났다. 936년에 석경당을 따라서 낙양에 들어갔고, 북도유수(北都留守)를 지내고, 후에 제왕(齊王)으로 임명되었다.
942년 석경당이 사망하자 즉위를 하였고, 연호를 개운(開運)으로 개원하였다. 재위 중에 메뚜기때가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피해를 입은 백성이 많아졌다. 또한 경연광(景延廣)의 건의에 의해 요나라에게 요나라의 신하로 하지 않겠다고 하여, 요나라에 대하여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이 일로 후진에 침공한 요나라군을 2번을 걸쳐서 침공을 막았지만, 946년 요나라의 3번째 침공으로 개봉(開封)이 함락되어, 석중귀는 요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후에 건주(建州)에서 사망하였다.
출전, 주해 및 참고 자료
- ↑ 이동: 가 나 다 《구오대사》, 권75.
- ↑ 이동: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대만 중앙연구원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 ↑ 이동: 가 나 다 라 《자치통감》, 권283.
- 이동 ↑ 《자치통감》, 권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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