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원(李嗣源, 867년 ~ 933년)은 오대십국 시대의 후당의 제2대 황제이다. 이극용의 양자로
본명은 막길렬 (邈佶烈), 묘호는 명종(明宗)이며, 시호는 성덕화무흠효황제(聖德和武欽孝皇帝)이다.
생애
대북(代北, 산시성 지역)의 유목 민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용이 뛰어나고 신망이 두터웠는데, 이극용의 양자가 되어, 이사원(李嗣源)으로 이름을 고치고 절도사와 중서령 등을 지냈다.[1] 거란족 토벌이나 후량 토벌 등에 있어 활약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이윽고, 이극용의 친자 장종(莊宗)이 술에 빠져 점차 정치를 돌아보지 않게 되자, 각지에서 반란이 발발하였다. 무장들이 장종을 살해하고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사원은 처음에는 이를 사양하였으나 세 번을 청하자 926년 6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2][3] 이사원은 수도를 개봉에 정하였다. 그는 아는 글자가 거의 없어서 모든 상주문을 모사 안중회(安重誨)에게 읽어 달라고 하였으며 고문 겸 재상으로 풍도(馮道)를 등용하였다.[4] 이사원은 환관을 죽여 세력을 억제하였고,[5] 지배지에 대규모 측량을 행해 세제의 정비를 행하였다. 또 자신도 사치를 금지하고 검약에 노력해 궁녀 수를 줄이고 공물을 받지 않았다.[3] 또한 탐관오리는 엄벌에 처하고 청백리는 후한 상을 내리기도 했다.[3] 삼사도(三司徒)를 창설하는 등, 이사원의 대에 국내는 안정되었고, 오대십국 시대의 굴지의 명군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이사원은 늦은 나이에 즉위한 탓에 분별력이 흐려져 자신의 측근이었던 안중회와 임환을 죽였다.[3] 또한 본인이 무장에게 추대된 터라 즉위 이후부터 무장들을 우대하여 권력을 주었다. 이것은 무장들의 오만과 전횡을 불러일으켜, 933년에 명종이 죽은 후 3년 뒤에 후당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가족
부모
- 아버지:이예(李霓) - 사후 927년 덕조(德祖) 효성황제(孝成皇帝)로 추존
- 어머니:유씨(劉氏) - 사후 송국부인(宋國夫人)으로 추봉, 927년 효성의황후(孝成懿皇后)로 추존
- 양부:이극용
부인
- 화무헌황후(和武憲皇后) 조씨(曹氏) - 930년 책봉, 진국공주(晉國公主)의 생모
- 선헌황후(宣憲皇后) 위씨(魏氏) - 사후 노국부인(魯國夫人)으로 추봉, 후에 선헌황후로 추존, 이종가의 생모
- 소의황후(昭懿皇后) 하씨(夏氏) - 사후 진국부인(晉國夫人)으로 추봉, 후에 소의황후로 추존, 이종영・이종후 형제의 생모
- 숙비(淑妃) 왕씨(王氏) - 후에 태비(太妃)의 존호를 받음. 이종익의 양모
자녀
※ 이밖에 진국공주(晉國公主) 위로 나이가 많은 딸 2명이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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