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거병(중국어: 霍去病, 기원전 140년 ~ 기원전 117년)은 전한의 무제 시대의 무장으로 무제의 처조카이다. 아버지는 곽중유(霍仲孺), 배다른 형제로 대사마 대장군이 되어, 무제 사후 정권을 장악한 곽광(霍光)이 있다.
위청(衛靑)의 누이인 위소아의 아들이다. 위청의 또다른 누이이자 곽거병의 이모인 위자부가 무제의 총애를 받아 여태자를 낳아 황후에 올랐기 때문에, 친족이자 총명한 곽거병도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한나라 개국 공신인 진평의 고손자 진장은 곽거병의 어머니와 밀통해 의붓아버지가 되었다.
말에서도 활을 잘 쏘아 18세에 위청에 따라 흉노 정벌을 나섰다. 그 후 몇 번이나 흉노 정벌에서 공적을 올려, 기원 전 121년에 표기장군에 임명되고, 기원전 119년에는 흉노의 본거지를 격파해, 위청과 함께 대사마로 임명되었다. 큰 공로와 무제의 총애, 그리고 젊은 나이의 권세를 가졌던 곽거병이었지만, 기원 전 117년 불과 2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곽거병과 위청은 동시대에 활약했으며, 혈연이기도 하여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위청은 소년기에 노예로 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겸손하게 대하였고, 항상 아랫 사람을 챙겼다. 반면 곽거병이 철이 들었을 때에 이미 일족은 외척이었으며, 외숙부가 흉노 정벌에 큰 공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위청과는 대조적으로 오만하고, 병사가 굶고 있을 때에도 자신은 호화로운 막사에서 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의외로 궁정의 병사 사이에서도 곽거병 쪽이 더 인기있는 인물이었다. 위청은 겸손이 도를 지나쳤고 아부가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전형적인 '예스맨'이었고 아랫 사람들에 대해 권위가 높지 않았다. 그러나 곽거병의 오만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이것이 그를 믿음직한 용장으로 여기게 했다. 한 무제도 성격이 적극적이고 과감한 곽거병을 더 기꺼이 여기고 있었다.[위키백과]
[정보 출처-책'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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