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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대십국 시대에 걸쳐 활약했던 중국의 정치가]풍도(馮道)

Bawoo 2017. 2. 11. 20:52



풍도(馮道, 882년[1] ~ 954년 5월 21일[1][2])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에 걸쳐 활약했던 중국의 정치가이자 고급 관료이다. 그는 오대의 후량 이후 4왕조 중 3왕조(후당후진후주)에 걸쳐 재상을 지냈고, 후한 때는 재상을 역임하지 않았으나 당시의 정부 요인이기도 하였다. 사후 영왕(瀛王)에 추증되었으며, 문의왕(文懿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가도(可道).

군벌 정권의 혼란 시대에 후당·후진·(遼:契丹)·후한·후주의 5왕조 11군주를 차례로 섬겨서 항상 재상의 지위를 유지했으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무절조·파렴치한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난세에 처하여 민중 생활의 안정을 잘 보살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관후한 어른이라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또 경서(經書) 인쇄로는 최초로 『구경(九經)』의 간행 사업을 벌였는데, 이것은 문화사상의 공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출전 및 주해

  1. 이동: 구오대사》, 권126.
  2. 이동 대만 중앙연구원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풍도에 관한 책]참모의 진심

란즈커 지음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 다섯 왕조 11명의 황제 섬긴
- 5대 10국 시대 처세 대가
- 적 만들지 않고 장수한 비결은
- 청렴, 말과 감정 다스리기…

   
풍도

풍도는 중국 역사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서기까지 약 70년, '5대 10국'이라 불린 혼란기에 무려 다섯 왕조에서 열한 명 황제를 섬기며 고위 관리로 30년, 그중 재상으로 20여 년을 지낸 인물이 풍도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그의 양면을 기록했다. "풍도가 재상으로 다섯 왕조 여덟 성을 섬긴 일은 나그네가 객방을 스쳐가는 일과 매한가지다. 설사 그가 몇 가지 선한 일을 했다 한들 어찌 괜찮다 말하겠는가". 동시에 자치통감은 그가 행한 선한 일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참모의 진심, 살아남은 자의 비밀은 냉엄한 시기에 관리로서 열한 명의 황제를 섬기기까지 풍도가 걸었던 길을 이야기한다. 풍도가 적을 만들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방법, 난세에도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오래 편안했던 비밀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말과 감정을 다스리는 태도이다. 풍도는 아버지의 젊은 부인을 간음하고 인육을 먹는 리더 유수광 앞에서 결코 속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로 살아남았다. 유수광은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의 입을 막고 살을 발라냈다. 누구도 간언하지 못할 때 풍도가 나섰다. "관용의 마음으로 도량을 보여달라"는 한마디를 했다. 표정과 억양을 유지하면서 감탄사를 쓰지 않고, 속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는 풍도를 유수광은 차마 죽이지 못했다. 잠시 감옥에 가뒀다가 풀어줬다. 풍도의 태도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리더들은 그의 의견을 곧잘 받아들였다. 이런 처신으로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자리를 지켰다.

풍도는 상대의 그릇을 읽을 줄 알았다. 황제의 그릇을 살핀 뒤 바뀔 여지가 없다면 더는 강요하지 않고 물러났다. 한번은 잔혹한 황제 야율덕광이 "천하 백성은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무식했으나 중원의 문화만은 중시하던 야율덕광의 특성을 파악한 풍도는 "지금은 부처도 구할 수 없고 오직 황제만 구할 수 있다"고 답했다. 명예욕이 많은 야율덕광의 성향을 읽고 '당신은 부처와 같은 권능을 지녔다'고 말했다. 야율덕광은 즉시 약탈과 살상을 금했다. 권력 앞의 아첨 같아 보이지만, 많은 백성을 구한 처신이다.

   

평생 한 직장에서 일하던 시대는 지났다. 여러 직장에서 여러 리더를 만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만의 무기가 필요하다. 풍도의 무기는 '청렴'이었다. 눈앞의 이익보다 자기 원칙인 청렴을 내세워 위상을 높이고, 리더의 부름을 받으며 30년간 천하를 누볐다. 나의 무기는 무엇일까.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