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관한 그림들입니다. 전쟁이 주는 참혹함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 순간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곳곳에서 그 참혹함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역사의 순간을 담고 있는 그림들 앞에 서면 역사가 왜 되풀이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프랑스 화가 알퐁스 드 뇌빌(Alphonse de Neuville, 1835-1885)의 이야기와 작품들입니다.
구도시의 골목길 Street in the Old Town, 1873
좁은 골목길 위로 흰 구름이 가볍게 떠 있는 작은 하늘이 열렸습니다. 날씨라도 흐렸으면 많이 답답했을 골목길에 맑고 투명한 햇빛이 가득 내려앉았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하모니카 소리를 따라 가 보니 벽에 기대 선 사내가 눈에 들어옵니다. 대낮 골목길에서 하모니카를 부는 사연이 궁금합니다. 등짐을 한 여인의 짧은 그림자와 하모니카 소리 그리고 바싹 건조된 낯선 이국의 골목길... 날은 이렇게 좋은데 왜 자꾸 슬퍼지는 거죠? 여인의 등짐에 내려앉은 햇빛이 오히려 삶의 무게를 더해주는 것 같아서일까요? 문득 여인의 등 위로 스쳐가는 제 모습을 잠시 읽었습니다.
드 뇌빌은 프랑스 노르망디 생토메르라는 곳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 했지만 부모의 주장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그는 로리앙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신에게 탁월한 미술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법률가와 군인 그리고 화가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공부가 한 사람에게서 일어난 것이죠.
파리 공략의 일화 Épisode du Siège de Paris, 1870
먹구름이 서서히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전투로 인해 지붕은 날아가 버렸고 그나마 남아 있는 지붕도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모습들을 보아하니 계속 밀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급한 대로 가로수를 베어 땔감을 대신했고 여기저기 음식을 준비하는 연기들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그럴 힘도 없는 병사들은 아예 누워버렸습니다. 한때 진격을 알렸던 악기들도 왼쪽에 패잔병의 모습으로 모여 있습니다. 말을 급하게 타고 나타난 병사가 넘어지듯 달려오고 있습니다. 다시 후퇴일까요? 아직 쏟아지는 햇빛 아래 서 있는 건물들도 이제 곧 먹구름 안으로 들어가겠군요. 독일 통일을 꿈꾸던 비스마르크의 계략에 넘어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0일 프로이센에 먼저 선고포고를 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프로이센은 프랑스로 밀고 들어왔고 불과 몇 달 만에 파리를 빼앗기고 맙니다. 리더의 판단 하나가 수많은 사람을 죽음과 공포의 세계로 몰아넣었죠.
드 뇌빌은 화가가 되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아돌프 이봉과 같은 당시 이름 있는 화가들에게 보여주었지만 그들의 평가는 싸늘했습니다. 실망한 그였지만 피코의 화실에 입학합니다. 이곳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했는데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외젠 들라크루아의 날개 밑으로 자리를 옮겨 공부를 계속합니다.
생 프리바의 공동묘지 The Cemetery at St. Privat, 1870, 235.5x341cm
마침내 마지막 문이 부서지면서 군인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한쪽 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지휘관들은 모든 것을 체념한 자세로 서 있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주검들이 보입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있는 공동묘지... 진정 살아남은 것은 누구이고 죽은 것은 누구일까요? 건너편에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화염에 덮인 집들은 포탄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전쟁을 주도한 사람들의 야욕과 야만성이 원인이기도 합니다. 생 프리바의 전투에서만 프로이센 군인 20,000명과 프랑스 군인 8,0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작은 은하 하나가 소멸된 것이지요. 2차 대전 때 전쟁으로 민간인 포함 총 6천만 명 내지 8천만 명이 숨졌다고 합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왜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요?
1859년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드 뇌빌은 처음으로 살롱전에 군사적인 장면을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합니다. 몇 등인지는 알 수 없지만 메달을 수상했다고 하니까 시작치고는 좋았던 것 아닌가요? 그의 전쟁화를 눈여겨보던 사람들은 그에게 ‘나폴리에 도착한 가디발디’라는 주제로 작품을 의뢰합니다. 전업화가의 길이 열린 것이지요.
참호 속에서 In the Trenches, 1874, 57.5x96.5cm
눈이 내린 회색의 벌판 끝으로부터 어둠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습니다. 작은 모닥불 하나로 이 겨울의 추위를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식량의 공급도 끊긴 것 같습니다. 코에 동상이 걸린 병사와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병사들, 그리고 부상당한 병사들의 모습이 쌓인 눈을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습니다. 벌판을 지켜보기 위해 등을 돌리고 있는 병사의 모습도 안쓰럽습니다. 그들에게 올 겨울 성탄은 오는 것일까요? 그들의 꿈... 아마 아무 일 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 겁니다.
드 뇌빌의 재능은 삽화에서도 발휘되었습니다. <해저 2만리>의 삽화 작업에 참여한 이후 <80일간의 세계일주>와 <기조의 프랑스 이야기>에도 그의 삽화가 실리게 됩니다. 1860년대 드 뇌빌의 작품은 전쟁 장면이 주제였습니다. 크리미아 전쟁과 이탈리아 전쟁이 그의 작품 속에서 되살아났습니다. 그가 서른다섯이 되던 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났고 그는 파리 근처의 예비군 부대 장교가 됩니다.
마지막 총알 The Last Bullet, 1873, 10x165cm
붉은 바지를 보니 프랑스 군인들입니다.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건물 안,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습니다.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마지막 총알을 장전하고 사격을 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총알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나가서 맨몸으로 적과 싸우거나 적이 총알을 가지고 있다면 항복하는 길이지요. 다가올 운명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각각 다릅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다음 상황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글쎄요, 저라면 저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이 상황에 같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제로 드 뇌빌은 르 부르제 전투와 샹피니 전투에도 참가 했는데 이때의 경험을 통해 전쟁터에서 고통 받는 프랑스 군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1872년부터 제작된 이런 작품을 통해 그의 명성은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이전에도 그와 같은 주제를 그린 화가들이 있었지만, 그가 작품 속에서 묘사한 순간을 겪었던 사람들의 감정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데 있어서 탁월했던 것이 강점이었습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야기 Episode from the Franco-Prussian War, 1875
다락방에서 다가오는 적을 살피고 있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상황을 살펴보면 내용은 처참합니다. 이미 숨을 거둔 병사가 보입니다. 주검조차도 편하게 뉘어 놓을 여유도 없었을까요?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음식을 먹는 병사도 있습니다. 어서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고 외치는 나이든 병사도 보입니다. 방안 가득히 퍼져 있는 연기 속에서도 여유를 부리는 병사들도 보입니다. 한쪽에 던져져 있는 총과 식기통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지만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영국 수비대와 줄루족 간에 일어났던 줄루 전쟁을 묘사한 작품들을 가지고 드 뇌빌은 런던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때 유료 관객만 5만 명이었다고 하니까 대단한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애국적인 주제가 담긴 그의 작품은 그에게 레종 도뇌르 훈장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흔아홉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술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일찍 떠났습니다.
뷔장발 성의 롱부아이오 성문 방어 Défense de la Porte Longboyau au Chateau de Buzenval, 1879
뷔장발 전투는 파리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전장이었습니다. 죽은 말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고, 그 옆에는 같은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하고 그래야 끝나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역사에는 ‘정의로운 전쟁’이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그런 표현은 승자가 자신의 행동에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자가 정의로운 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참혹함에 대해 증언을 해야 하고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과연 그래 왔던가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도는 역사에는 그 까닭이 있습니다.
요즘 주변 정세가 어지럽습니다. 그 결과가 전쟁이라는 파국을 가져올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고통에 버금가는 시간이 온다면,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지만 결과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과 감성에 달린 것입니다. 전쟁― 사라져야 할 것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