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40년 ~1859년]

[이탈리아]Giacomo Puccini[지아코모 푸치니]

Bawoo 2017. 6. 23. 11:39

Giacomo Puccini


Giacomo Puccini

22 December 1858 – 29 November 1924) was an Italian opera composer who has been called "the
greatest composer of Italian opera after Verdi".[1]

Puccini's early work was rooted in traditional late-19th-century romantic Italian opera. Later, he successfully developed his work in the realistic verismo style, of which he became one of the leading exponents.

Puccini's most renowned works are La bohème (1896), Tosca (1900), and Madama Butterfly (1904), all of which are among the important operas played as standards.[영문자료:Giacomo Puccini]




지아코모 푸치니는 1858년 이탈리아 루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5대에 걸친 음악 명문가였다. 10살 때부터 아버지의 제자인 안젤로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16살 때인 1874년 루카 음악원에 들어갔다. 음악원에 들어간 지 2년이 지난 1876년, 푸치니는 피사에서 공연된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오페라 작곡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는 당장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그만두고, 밀라노로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황실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데 성공한 푸치니는 1880년, 우수한 성적으로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했다. 음악원에서는 폰키엘리와 바치니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친구인 마스카니와 함께 하숙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 경험이 나중에 오페라 〈라 보엠(La Boheme)〉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

1883년, 푸치니는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이듬해 산초뇨 청소년 센터가 공모하는 오페라 콩쿠르에 하이네와 고티에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빌리(Le Villi)〉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하지만 입상에는 실패했다. 〈빌리〉는 1884년 밀라노 델 베르메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이때 오페라 작곡가로서 푸치니의 능력을 눈여겨본 리코르디 출판사가 그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해 왔다.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푸치니는 뮈제의 〈술잔과 입술〉이라는 작품을 원작으로 한 두 번째 오페라 〈에드가르(Edgar)〉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1889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리코르디 출판사는 푸치니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푸치니가 첫 오페라를 발표할 즈음인 1884년, 그는 친구의 아내 엘비라와 사랑에 빠졌다. 푸치니의 아이를 갖게 된 엘비라는 1886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6살 난 딸 포스카를 데리고 푸치니의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 국가였던 이탈리아에서는 이혼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적인 아내가 될 수 없었다.

1884년,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된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을 보고 푸치니는 자기도 같은 줄거리를 가지고 오페라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작곡한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는 1893년, 토리노에서 공연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탈리아 전역은 물론, 남미, 러시아, 스페인, 독일, 런던, 부다페스트, 프라하, 필라델피아, 멕시코, 바르샤바, 뉴욕, 아테네, 프랑스 등지에서 공연되었다. 이 작품으로 푸치니는 베르디의 뒤를 잇는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그는 〈라 보엠〉과 〈토스카(Tosca)〉를 잇달아 발표했다.

〈토스카〉의 후속작인 〈나비 부인(Madama Butterfly)〉을 쓰고 있는 동안 푸치니는 코리나라는 여성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그와 같이 살고 있던 엘비라는 이 일로 몹시 낙담해서 푸치니를 떠날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1903년, 푸치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심하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상이 너무 심해 누군가 옆에서 간호를 해 주어야만 했는데, 바로 그다음 날 엘비라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결혼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갑자기 없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사실혼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건강을 회복한 후, 푸치니는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나비 부인〉 작곡에 박차를 가했다. 〈나비 부인〉은 1904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버전으로 3개월 후에 무대에 오른 〈나비 부인〉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07년, 푸치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위촉을 받고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서부의 아가씨(La Fanciulla del West)〉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무렵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늘 푸치니의 여자 관계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엘비라가 푸치니와 하녀 도리아와의 관계를 의심한 것이다. 엘비라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도리아를 욕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도리아는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도리아는 곧바로 죽지 않고 5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죽었는데, 죽어 가면서 지르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푸치니의 집까지 들렸다고 한다. 도리아가 죽은 후 엘비라는 무고죄로 5개월 5일의 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푸치니가 1만 2천 리라를 주고 도리아의 가족과 합의하면서 엘비라는 감옥행을 면할 수 있었다.

푸치니 오페라의 오리지널 공연 포스터들


이런 와중에 완성한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는 1910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딕 존슨 역에 당대 최고의 테너 카루소가 출연해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1919년에는 단테의 신곡에 기초한 3부작 〈외투(Il tabarro)〉, 〈수녀 안젤리카(Suor Angelica)〉,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를 선보였는데, 이 중에서 특히 〈잔니 스키키〉는 그가 비극뿐만 아니라 희극적인 인물 묘사에도 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작품이었다.

말년에 푸치니는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투란도트(Turandot)〉 작곡에 들어갔다. 중국 고대 리듬이나 음악을 듣기 위하여 대영박물관의 자료실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그때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푸치니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투란도트〉 작곡에 매달렸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1924년 11월 29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흔히 푸치니는 베리스모 작곡가로 불리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 그의 출발점은 소박한 베리스모가 아니라 웅대하고 화려한 낭만주의에 있었다. 그는 오케스트라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반음계적 선율 진행을 사용했으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롭고 혁신적인 화음을 만들어 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적 감성에도 깊이 매료되어 샤브리에를 연상시키는 화성 표현을 썼으며, 훗날 드뷔시와 라벨의 음악을 예고하는 기법들을 구사했다.

〈라 보엠〉 세계 초연 당시 세트 디자인을 맡은 아돌프 호헨슈타인의 파리 거리 스케치


그의 작품 중에서도 베리스모 오페라의 전형으로 꼽히는 〈라 보엠〉은 1896년에 프랑스 시인 앙리 뮈르제의 〈보헤미안들의 생활〉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이다. 가난한 시인 로돌프와 다락방에서 수를 놓고 살아가는 가난한 처녀 미미를 중심으로 로돌프의 친구인 음악가 쇼나르와 철학자 콜리네, 화가 마르첼로 그리고 그의 애인 뮤제타의 보헤미안적 삶을 그렸다. 1막에서 어둠 속에서 열쇠를 찾던 로돌프의 손이 미미의 손과 닿았을 때 부르는 아리아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 미미가 자기를 소개하며 부르는 〈내 이름은 미미(Si, mi chiamano Mimi)〉, 2막에서 마르첼로의 애인 뮤제타가 자기의 매력을 뽐내며 부르는 〈뮤제타의 왈츠(Quando me'n vo)〉가 유명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된 〈토스카〉 2막 중 한 장면


〈토스카〉는 1899년에 프랑스 작가 사르두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이다. 오페라 가수인 토스카와 그녀의 애인인 화가 카바라도시 그리고 토스카를 좋아하는 로마 총독 스카르피아 남작 사이에 벌어진 사랑의 비극을 그렸다. 1막에서 카바라도시가 그림을 바라보며 부르는 〈오묘한 조화(Recondita armonia)〉, 2막에서 토스카가 신에게 항의하며 부르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 3막에서 사형을 앞둔 카바라도시가 부르는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 olezzava)〉이 유명하다.

1904년에 발표한 〈나비 부인〉은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자포니즘(Japonism, 일본주의)의 영향을 보여 준다. 일본의 나가사키 항 근처에 살고 있는 게이샤 출신의 소녀 초초 상이 미 해군사관 핑커톤과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까지 낳지만, 본국으로 돌아간 핑커톤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자 단도로 자기 가슴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이다. 초초 상이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고 노래하는 〈어떤 갠 날(Un bel di vedremo)〉, 초초 상이 하녀 스즈키와 꽃을 따며 부르는 〈꽃의 이중창(Scouti quella fronda di ciliegio)〉, 밤에 먼 항구에서 들리는 〈허밍 코러스(Humming chorus)〉가 유명하다.

푸치니는 일생 오페라에 집중하고 다른 장르의 음악은 거의 작곡하지 않았다. 오페라도 작품 수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작품 외에 〈에드가르〉, 〈제비〉 등이 있으며, 오페라 외의 작품으로는 밀라노 음악원 초년 시절에 작곡한 〈교향곡 전주곡〉과 졸업 작품인 〈교향적 카프리치오〉, 베르디의

글:진회숙 -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