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60년 ~1880년]

[오스트리아]Hugo Wolf[Hugo Philipp Jacob Wolf][후고 볼프]

Bawoo 2017. 6. 30. 00:08

Hugo Philipp Jacob Wolf

 

 
Photograph of Hugo Wolf

 

 

(13 March 1860 – 22 February 1903) was an Austrian composer of Slovene origin, particularly noted for his art songs, or Lieder. He brought to this form a concentrated expressive intensity which was unique in late Romantic music, somewhat related to that of the Second Viennese School in concision but diverging greatly in technique.

Though he had several bursts of extraordinary productivity, particularly in 1888 and 1889, depression frequently interrupted his creative periods, and his last composition was written in 1898, before he suffered a mental collapse caused by syphilis.[매독]

 

후고 볼프는 1860년 오스트리아 빈디슈그라츠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초등학교 때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볼프는 음악 이외의 과목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에 들어간 첫해에 학습 부진을 이유로 퇴학당했다. 15살 때인 1875년,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빈 음악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음악원에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불성실하고 자주 교칙을 위반했던 그는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자 1877년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후 고향에 잠시 내려가 있다가 다시 빈으로 올라와 개인 레슨으로 생계를 꾸려 갔다. 하지만 다혈질인 성격 때문에 늘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이 무렵 후원자의 딸인 발리 프랑크라는 여성과 교제를 시작했다. 그녀와는 3년 동안 사귀었으나, 너무 박력이 없고 무기력하다는 이유로 차였다. 이에 크게 낙담한 볼프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1881년, 볼프는 마침 공석이 된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부지휘자에 취임했다. 하지만 지휘자로서 열정도 없었고, 지휘 테크닉도 부족했다. 바그너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교회음악도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지휘자 일을 그만두고 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전처럼 개인 레슨을 하며 살았다.

1883년, 그가 우상처럼 여기던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다. 볼프는 몹시 슬퍼하며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곡 〈편히 잠드소서〉를 작곡해 그의 영전에 바쳤다. 바그너가 살아 있을 때 볼프는 빈 음악원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그너는 당시 젊은 작곡가 지망생이었던 그에게 대작을 구상해 보라고 권했고, 그때부터 바그너는 볼프의 우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길을 인도해 줄 우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미래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볼프는 작곡뿐만 아니라 비평가로도 활동했는데, 그의 비평은 무자비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특히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작곡가에게는 가차 없이 비평의 칼날을 휘둘렀다. 그래서 '와일드 볼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자기가 천재라고 생각하는 리스트, 슈베르트, 쇼팽에 대해서는 열렬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평론가로 활동할 때 볼트는 작곡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원한을 품는 사람이 많아지자 볼프는 평론 활동을 그만두고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888년과 1889년은 볼프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왕성하게 창작열이 불타오른 시기였다. 그는 빈 근교 페르흐톨즈도르프에 있는 베르너의 별장에서 유명한 《뫼리케 가곡집(Mörike Lieder)》을 완성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에크슈타인의 별장으로 자리를 옮겨 《아이헨도르프 가곡집(Eichendorff Lieder)》과 51편에 달하는 괴테 시에 의한 가곡을 작곡했다. 1889년 여름휴가가 끝난 후에는 《스페인 가곡집(Spanisches Liederbuch)》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빈의 음악계가 서서히 볼프의 가곡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뫼리케 가곡집》은 테너 페르디난트 얘거의 노래로 초연되었다. 그전에 볼프는 페르디난트 얘거가 주역으로 출연한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보고 크게 감동받은 적이 있었다. 《뫼리케 가곡집》을 부른 후, 얘거는 볼프의 열렬한 찬양자가 되어 가는 곳마다 볼프의 가곡을 불렀으며, 그 덕분에 독일 전역에 볼프의 가곡이 알려지게 되었다. 뮌헨의 신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볼프의 가곡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언제나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볼프의 경우, 과거 신랄한 비평을 휘두른 전력이 있기 때문에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브람스의 전기 작가 막스 칼베크는 볼프의 가곡을 미숙하고 음조마저 괴상한 졸작이라고 비판했다.

1891년 말, 위기가 찾아왔다. 그동안 지나치게 작곡에 몰두하느라 과로한데다 성병까지 걸려 건강이 악화된 것이다. 그 후 몇 년 동안 볼프는 아무것도 작곡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가곡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꾸준히 불리며 호평을 받았다. 심지어 그를 혹평하던 브람스 추종자들까지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정신적, 신체적 침체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후, 볼프는 오페라를 작곡해야겠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마침 그에게는 누군가가 보내 준 〈지방 판사〉라는 오페라 대본이 있었다. 그로부터 9개월 만에 첫 오페라 〈지방 판사〉를 완성하고 무대에 올렸다. 처음에는 반응이 좋았으나 텍스트가 취약해 볼프의 형이상학적인 음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평을 받은 후로는 줄곧 졸작 취급을 받았다.

 

1897년, 빈과 베를린에 볼프 협회가 생겼다. 이해에 페르디난트 얘거가 볼프의 새로운 가곡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연주회였다. 그 후 성병이 악화되면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1899년에 작곡을 중단했다. 절망한 볼프는 한때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다. 스스로 두려움을 느낀 볼프는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빈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가 1903년 2월 22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빈 중앙묘지에 조성된 후고 볼프의 무덤

 

볼프의 가곡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와 음악을 동등하게 취급했다는 것이다. 볼프는 가곡에서 문학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한 작곡가였다. 악보에도 작곡가인 자기 이름보다 시인의 이름을 먼저 적었다. 그의 가곡은 규칙적인 선율구가 없는 낭송조 혹은 아리오소(arioso, 낭송조와 아리아의 중간) 양식으로 쓰인 것이 많다.

예술가곡 작곡가들이 가장 애호했던 독일 시는 괴테의 시였다. 특히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미뇽의 노래에는 슈베르트, 슈만, 베토벤, 볼프, 구노, 차이콥스키, 토마, 리스트, 멘델스존, 루빈스타인 등 여러 작곡가들이 곡을 붙였다. 볼프는 51편에 달하는 괴테의 시에 곡을 붙였는데, 여러 작곡가의 작품 중에서 볼프의 곡이 시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음악으로 가장 잘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뇽의 노래 중 〈그대는 아시나요(Kennst du das Land)〉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한다.

 

그대는 아시나요? 그곳을.
둥근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휘황찬란한 홀과 빛나는 방이 있는 그 집,
대리석 입상(立像)들이 날 바라보며
'가엾은 아이야. 무슨 몹쓸 일을 당했느냐?'
이렇게 물어 주는 곳……

 

소설 속의 상황처럼 미뇽이 빌헬름을 앞에 앉혀 놓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볼프는 본래 독일 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시에도 관심이 많았다. 독일어로 번역된 이탈리아 시 46편에 곡을 붙인 《이탈리아 가곡집(Italienisches Liederbuch)》과 44편의 스페인 시에 곡을 붙인 《스페인 가곡집》이 있다. 볼프의 대표곡인 〈나의 머리카락 그늘에서(In dem Schatten meiner Locken)〉는 1889년경에 작곡한 《스페인 가곡집》 제2집에 들어 있는 곡이다.

 

내 머리카락 그늘 아래 사랑하는 이가 잠시 잠이 들었네.
그를 깨울까? 아니야. 아니야. 아침마다 머리를 빗지만 소용없어.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 버리니까

 

이렇게 소박한 가사와 어우러진 경쾌한 리듬의 반주와 부드럽고 관능적인 조바꿈이 독특한 인상을 준다.

볼프는 일정 기간 한 시인의 작품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1888년에는 뫼리케, 괴테,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집중적으로 곡을 붙였다. 이 중 《뫼리케 가곡집》에는 모두 53편의 가곡이 들어 있다. 이 가곡집의 28번째 곡인 〈기도(Gebet)〉는 종교적인 가사를 보여 준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사랑과 고통을 주시니
내 마음 항상 주 안에서 살게 하소서.
기쁘나 슬프나 내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늘 겸손하게 하소서.

  

찬송가풍의 반주에 종교적 경건함을 담아 볼프 가곡 특유의 자연스러운 억양과 시의 절묘한 조화를 추구했다.

볼프는 일생 주로 가곡을 작곡했는데, 가곡 외의 작품으로는 교향시 〈펜테칠레아〉, 피아노곡 〈발퀴레 패러프레이즈〉,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패러프레이즈〉, 합창곡 〈요정의 노래〉, 〈아침의 찬가〉, 극음악 〈함부르크의 프리드리히 공작〉, 〈졸하우그의 축제〉 <이탈리안 세레나데>

등이 있다.

 
 

진회숙              

이화여대 음대에서 서양음악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악이론을 공부했다. 1988년 월간 「객석」이 공모하는 예술평론상에 '한국 음악극의 미래를 위하여'라는 평론으로 수상, 음악평론가로 등단했고,..펼쳐보기

이화여대 음대에서 서양음악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악이론을 공부했다. 1988년 월간 「객석」이 공모하는 예술평론상에 '한국 음악극의 미래를 위하여'라는 평론으로 수상, 음악평론가로 등단했고, 「객석」, 「조선일보」, 「한국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 매체에 예술평론과 칼럼을 기고했다. 이후 KBS와 MBC에서 음악프로그램 전문 구성작가로 활동하며 MBC FM의 「나의 음악실」, KBS FM의 「KBS 음악실」, 「출발 FM과 함께」, KBS의 클래식 프로그램인 「클래식 오디세이」 등의 구성과 진행을 맡기도 했다. 이화여대 음대에서 서양음악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악이론을 공부했다. 1988년 월간 「객석」이 공모하는 예술평론상에 '한국 음악극의 미래를 위하여'라는 평론으로 수상, 음악평론가로 등단했고,..

출처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진회숙 | cp명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