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60년 ~1880년]

[영국]Gustav Holst

Bawoo 2017. 9. 7. 22:50

middle aged man in head and shoulder shot looking warily at camera

Gustav Holst, c. 1921 (photograph by Herbert Lambert)

(born Gustavus Theodore von Holst; 21 September 1874 – 25 May 1934) was an English composer, arranger and teacher. Best known for his orchestral suite The Planets,
he composed a large number of other works across a range of genres, although none achieved comparable success. His distinctive compositional style was the product of many influences, Richard Wagner and Richard Strauss being most crucial early in his development. The subsequent inspiration of the English folksong revival of the early 20th century, and the example of such rising modern composers as Maurice Ravel, led Holst to develop and refine an individual style.[Gustav Hol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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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첼트넘에서 태어나 런던왕립음악대학(RCM)을 졸업했다. 대표 작품으로는 1916년에 완성된 《행성 모음곡》을 들 수 있지만, 두 개의 《군악대를 위한 모음곡》과 《무어사이드 모음곡》와 같이 관악단의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고 있는 곡들도 남겼다. 그는 초기 작품은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많은 작곡가들처럼 그도 악기를 연주했는데, 트롬본 주자였다.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으나 오른팔에 신경염이 있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피아노 연주를 할 수는 없었다.

1933년에 위장에 문제가 생겨서 1934년 5월 25일 런던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딸 이모겐 홀스트도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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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 본 윌리엄스, 아놀드 박스와 더불어 20세기 전반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구스타브 홀스트는 1874년 영국 첼튼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성가대장이었으며, 어머니는 성악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음악가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2살 때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병약한 아이였다.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었으나 팔에 생긴 신경염 때문에 포기했으며, 천식으로도 고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트롬본 연주가 천식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트롬본을 배우도록 했다.


1893년, 19살이던 홀스트는 왕립 음악대학에 들어갔다. 여기서 일생의 친구인 랠프 본 윌리엄스를 만났다. 두 사람은 음악적 스타일이 전혀 다른데도 서로의 음악을 존중하며 친하게 지냈다. 홀스트는 대학을 졸업하고 칼 로자 오페라 극장의 트롬본 주자로 들어갔지만, 입에 겨우 풀칠을 할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화이트 비에니스 밴드라는 대중음악 관현악단에서도 연주를 했는데, 그는 생계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이 일을 '벌레질'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나중에 작곡가로서 어느 정도 이름을 얻게 되었을 때 미련 없이 이 일을 그만두었다.


1901년, 경제적 안정을 얻은 그는 소프라노 에밀리 아조벨 해리슨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본 윌리엄스와 함께 영국 민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1904년에는 웨스트 덜위치에 있는 제임스 알렌 여학교 음악교사에 취임했으며, 1905년 세인트 폴 여학교의 음악과장을 거쳐 1907년에 몰리 대학의 음악학과장 자리에 올랐다.


1905년을 전후해서 홀스트는 힌두교의 신비주의와 영적인 체험에 심취했다. 인도 철학과 산스크리트어에 매력을 느껴 런던 대학 청강생으로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으며,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1908년, 홀스트는 슬럼프에 빠졌다. 어려서부터 앓아 온 천식이 악화된 데다가 자신이 유력한 수상자라고 생각했던 리코르디 작곡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감이 겹친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아랍 지방을 지나 멀리 프랑스령 알제리까지 여행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베니 모라(Beni Mora Op.29―1)〉를 완성했다.


1912년, 그는 또다시 여행을 떠났다. 여행 경비는 익명의 독지가가 기부했는데, 여행지는 스페인이었다. 여행 중에 그는 어떤 사람에게 점성술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었으며, 런던으로 돌아온 후에 알랜 리의 《천궁도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다. 이때부터 점성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대표작으로 꼽히는 관현악 모음곡 〈행성(The planets Op.32)〉을 작곡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홀스트는 참전을 원했지만 시력이 나쁘고 폐가 안 좋은데다 소화기 계통에도 문제가 있어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병약한 몸 때문에 전쟁에 참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월트 휘트먼의 시에 곡을 붙인 〈죽음에의 송가(Ode to Death Op.38/H144)〉를 작곡했다. 전쟁 중 영국 전역에 반독일 정서가 확산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막스 레거 같은 독일 현대음악에 대한 연주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그 덕분에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홀스트는 〈행성〉을 완성했다. 이 곡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18년 9월, 퀸즈 홀에서 개인적인 초대 음악회 형식으로 첫선을 보였다. 초대받은 사람만 왔기 때문에 관객이 많지 않았지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관객은 물론, 청소부들까지 넋을 잃을 정도였다. 〈목성〉이 연주되는 동안 청소부들은 빗자루를 내려놓고 춤을 추었다. 〈행성〉의 공식적인 초연은 1920년 11월에 있었다.


1919년부터 홀스트는 왕립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영국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늘 고생을 했다. 1923년, 지휘대에서 넘어져 등을 다친 후로 건강이 더욱 나빠졌으며, 말년에는 위에 문제가 생겨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러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1934년 5월 25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홀스트는 퍼셀을 비롯한 영국 옛 작곡가들의 음악을 영감의 근원으로 삼았으며, 당대 작곡가들이 추종했던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영향을 의식적으로 기피했다. 영국적인 것에서 정체성으로 찾으려 했으나 그렇다고 순전히 민족적인 성격의 곡만 쓴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가지려고 노력했는데, 특히 인상주의적인 경향과 대담한 화성, 독특한 리듬을 특징으로 한다.

홀스트의 고향 첼튼햄에 세워진 동상


홀스트는 모음곡 형태의 관현악곡을 많이 작곡했다. 〈세인트 폴(St. Paul's Suite)〉, 〈베니 모라〉, 〈행성〉이 대표작이다. 이 중 동양적 모음곡 〈베니 모라〉는 1909년에 작곡을 시작해 이듬해에 완성했다.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그린 이 곡은 그림엽서에 그려진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곡이다. 제1곡 〈첫 번째 춤〉에서는 잉글리시 혼이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동양적인 멜로디의 아라베스크를 연주한다. 제2곡 〈두 번째 춤〉에서는 팀파니, 바순, 낮은 음역의 플루트와 높은 음역의 현악기 그룹이 적막하고 신비로운, 때로는 다소 위태로운 느낌마저 드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제3곡은 〈아울리드 나일의 거리에서〉로, 홀스트의 도전 의식이 돋보이는 곡이다. 저음역의 플루트가 알제리 민속악기 주법을 모방한 악구를 163번이나 반복하도록 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기법과 화음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홀스트의 대표작인 관현악 모음곡 〈행성〉은 하늘에 떠 있는 각 행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일곱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1915년에 작곡을 시작해 이듬해에 완성했는데, 이 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은 제4곡 〈목성〉이다. '쾌락의 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곡은 전곡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구성의 변화가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3부 형식 안에서 장쾌하고 호방한 네 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곡이 전개된다. 이때 6대의 혼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먼저 현악기 반주에 맞추어 혼이 환희를 예고하는 듯한 제1주제를 늠름하게 연주한다. 이것이 빠른 경과구를 거치고 나면 더욱 당당한 제2주제가 혼을 중심으로 현악기와 함께 씩씩하게 제시된다. 2부에서는 3박자로 바뀌어 역시 혼이 친근한 느낌을 주는 민요풍의 선율을 연주한다. 제4주제는 장대한 축전에서 울려 퍼지는 찬가를 연상시킨다. 홀스트 곡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연한 악식을 가진 가곡풍의 선율로 후에 작곡가 자신에 의해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3부에서는 1부의 처음부터 제2주제가 나오는 부분까지 재현된다.

퀸즈 홀에서 열린 〈행성〉 초연 모습


1920년에 작곡한 〈모음곡 제1번(Suite No.1 in E flat for military band Op.28 No.1 /H105)〉은 군악대를 위한 곡이다. 원래는 38명의 연주자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를 위해 작곡했지만, 크넬러 홀에서 있었던 초연에는 무려 165명이 연주에 참여해 크게 화제가 되었다. 모두 세 곡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모든 곡이 같은 악절을 바탕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에 중단 없이 연주하는 것이 원칙이다. 제1곡 〈샤콘느〉는 중간에 두 번의 클라이맥스를 가진 15개의 변주곡이며, 제2곡 〈인터메초〉는 빠른 템포의 스케르초, 제3곡 〈행진곡〉은 전형적인 영국 군악대의 행진곡풍으로 작곡되었다.

그 밖의 작품으로 관현악을 위한 〈서머싯 랩소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예수 찬가〉, 오페라 〈세비트라〉, 〈완전한 바보〉, 〈방황하는 학자〉 등이 있다.


[출처: 진회숙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