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60년 ~1880년]

[스페인]Manuel de Falla y Matheu[마누엘 대 파야]

Bawoo 2017. 9. 23. 21:04

Manuel de Falla 27 October 1919
Manuel de Falla y Matheu (Spanish pronunciation: [maˈnwel ðe ˈfaʎa], 23 November 1876 – 14 November 1946) was a Spanish composer. Along with Isaac Albéniz and Enrique Granados, he was one of Spain's most important musicians of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His image was on Spain's 1970 100-pesetas banknote


[작품 모음]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스페인 정신을 표현하는 열정, 시적인 요소, 금욕주의적인 면 등을 한데 섞어 음악 속에 훌륭히 나타냈다.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운 후 피아노를 계속하면서 펠리페 페드렐에게 작곡을 배울 목적으로 마드리드로 갔다. 페드렐은 16세기의 스페인 교회음악, 민속음악, 스페인 오페라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파야에게 불어넣어 주었다. 1905년 피아노 연주와 민족 오페라 〈허무한 인생 La vida breve〉(프랑스 니스에서 1913년에 초연)으로 2차례 상을 받았다.


1907년 파리로 가서 클로드 드뷔시, 폴 뒤카스, 모리스 라벨(그의 관현악법은 파야에게 영향을 끼쳤음) 등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첫 피아노 소품과 가곡을 발표했다. 1914년 마드리드로 돌아가 안달루시아 민속음악의 정수로 알려진 무용곡 〈사랑은 마술사 El amor brujo〉(1915, 마드리드)를 작곡했다. 뒤이어 그는 〈El corregidor y la molinera〉(1917, 마드리드)를 작곡했고 디아길레프의 권유로 레오니드 마신의 〈삼각모자 El sombrero de tres picos〉(1919, 런던)를 발레곡으로 개작했다.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3개의 인상을 담은 모음곡 〈스페인 정원의 밤 Noches en los jardines de España〉(1916, 마드리드)

선정적이고 함축성 있는 관현악 처리에 의해 안달루시아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모든 작품들은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곡가로서 그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드높여주었다. 그후 은퇴하여 그라나다로 갔는데, 그곳에서 1

922년 '칸테 혼도' 축제를 주관했고 인형극 오페라 〈페드로 주인의 인형극 El retablo de Maese Pedro〉을 작곡했다.


〈페드로 주인의 인형극〉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숨결이 담긴 하프시코드 협주곡(1926)과 마찬가지로 파야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영향을 무척 많이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그의 스타일은 낭만주의적이라기보다 신고전주의적이었으며, 본질적으로는 스페인풍이었지만 안달루시아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카스티야풍이었다. 하지만 1926년 이후로는 마요르카에, 1939년부터는 아르헨티나에 살면서 작곡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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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데 파야는 1876년 스페인 카디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다가 9살 때부터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13살 때부터 화성학과 대위법을 공부했다. 유년기에 파야는 음악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기질을 발휘해 친구와 함께 〈농담〉과 〈방울〉이라는 제목의 잡지를 발간했는가 하면 연극과 문학, 그림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가 17살이 되어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을 때, 최종적으로 음악을 선택했다.


20살 때부터 마드리드 국립음악학교 교수 호세 크라고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파야는 22살 때인 1898년, 국립음악학교에 들어가 음악이론과 피아노를 정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9년 피아노과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피아노 레슨으로 돈을 벌며 틈틈이 곡을 썼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와 〈야상곡〉,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세레나타 안달루시아(Serenata Andaluza)〉 등이 이 시절의 작품이다.


1903년, 파야는 마드리드 음악원이 주최하는 작곡 콩쿠르에 〈알레그로 콘체르토(Allegro de concierto)〉라는 곡으로 응모했지만, 1등상은 그라나도스에게 돌아갔다. 이듬해인 1904년, 그는 새로운 콩쿠르에 도전했다. 미술 아카데미가 새로운 스페인 오페라를 발굴한다는 의미에서 개최한 단막짜리 오페라 작곡 콩쿠르였다. 여기에 응모한 〈허무한 인생(La Vida Breve)〉이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이듬해 4월에는 오리츠 쿠소사가 주최하는 피아노 작곡 콩쿠르에서 이전 콩쿠르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 〈알레그로 콘체르토〉가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이 곡은 마드리드의 아테네오 극장에서 연주되었는데, 당시 이를 눈여겨본 작곡가 엔리크 투리나가 그에게 프랑스 파리로 갈 것을 권유했다.


1907년, 스페인을 떠난 파야는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독일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작곡가를 만났다. 그중에는 라벨, 드뷔시, 뒤카 같은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도 있었다. 1908년 스페인 왕 알폰소 13세로부터 파리에 남아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낸 파야는 1910년, 이곳에서 러시아 출신의 젊은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를 만났다. 이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파리를 중심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파야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 후 마드리드에 정착해 작곡에만 전념했다. 작곡가로서 성숙기에 접어든 이 시기에 〈스페인 정원의 밤(Noches en los Jardines de Espana)〉, 〈사랑은 마술사(El amor brujo)〉, 〈삼각모자(El Sombrero de tres picos)〉 등 그의 대표작이 연달아 탄생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소개로 파야를 만난 디아길레프가 의뢰해 탄생한 것이 〈삼각모자〉이다.


1917년,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이 스페인 왕 알폰소 13세의 초청을 받고 스페인에서 〈셰에라자드〉를 공연했다. 공연이 끝난 후, 디아길레프는 안무가이자 무용가인 마신느와 함께 스페인 여러 지방을 여행했는데, 이때 파야가 안내를 맡았다. 스페인에 오기 전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로부터 스페인에 가면 파야를 꼭 만나 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파야를 만난 디아길레프는 그에게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발레음악을 작곡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발레음악 〈삼각모자〉이다. 이 프로젝트는 유명 화가 피카소가 무대 장치와 의상 디자인을 맡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기획 디아길레프, 작곡 파야, 안무와 춤 마신느, 무대 세트와 의상 피카소라는 막강 드림팀의 합작품인 〈삼각모자〉는 1919년 7월, 런던의 알함브라 극장에서 초연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21년, 파야는 그라나다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1939년까지 18년 동안 살며 지역의 유력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는 동안 그 역시 그라나다의 중요한 문화계 인사가 되었다. 1922년에는 스페인 민요협회를 설립했고, 폴리나크 공주의 의뢰로 〈페드로 주인의 인형극(Les Treteaux de Maitre Pierre)〉을 작곡했다. 〈하프시코드 협주곡(Harpsichord Concerto)〉을 완성하고 이어 일생의 역작인 대편성 칸타타 〈아틀란티다〉의 작곡에 착수했다. 1924년, 앙헬 바리오스와 함께 그라나다 예술협회의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27년에는 스페인 음악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라나다에 있는 동안 파야는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1937년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지면서 외부 활동이 뜸해졌다. 1939년, 파야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휘와 작곡 활동을 병행했다. 그동안 스페인 정부로부터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건강을 이유로 거절했다. 말년에는 일생의 역작인 〈아틀란티다〉의 완성에 매달렸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76세 생일을 며칠 앞둔 1946년 11월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파야는 전통적인 소재 속에 잠재해 있는 현대적 미의 가치를 찾아내 이를 수준 높은 작품으로 승화시킨 작곡가이다. 피아노곡에 집중한 알베니스나 그라나도스와는 달리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드뷔시의 영향을 받아 아련하고 섬세한 색깔로 짜인 고전적 투명성을 지닌 작품을 썼으며, 후기에는 당시 스페인에서 유행하던 낭만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신고전주의적인 작품에 몰두했다.


파야의 대표작으로는 발레곡 〈사랑은 마술사〉와 〈삼각모자〉, 교향적 인상 〈스페인 정원의 밤〉이 있다. 이 중 〈스페인 정원의 밤〉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1915년에 작곡했다. 스페인 정원의 밤 풍경을 인상주의 기법과 안달루시아 지방 특유의 리듬과 색채감을 결합시켜 아름답게 그렸다. 제1곡 〈헤네랄리페에서〉이다. 헤네랄리페는 옛날에 아라비아 왕과 왕비가 피서를 즐기던 그라나다 부근의 별장인데, 그곳의 밤 풍경을 그린 신비한 곡이다. 제2곡 〈멀리서 들리는 춤곡〉은 멀리서 동양풍의 집시음악이 들려오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인상주의적인 수법을 사용한 야상곡이다. 제3곡 〈코르도바 산의 정원에서〉는 호화찬란한 샹들리에로 장식한 코르도바 정원의 모습을 동양풍의 춤곡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삼각모자〉는 스페인 작가 알라르콘의 소설 《삼각모자》를 바탕으로 만든 발레음악이다. 줄거리는 삼각모자를 쓴 시장이 물방앗간 집 여자를 좋아해서 그녀의 남편을 강제로 잡아간 후 그녀를 유혹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을 사람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스페인 민속음악이 나온다. 〈서주〉에서는 북과 트럼펫의 짧고 강렬한 도입부에 이어 안달루시아 지방의 민요 〈칸테 혼도〉가 나오고, 이어 스페인의 대표적인 플라밍고 음악인 〈판당고〉가 나온다. 〈판당고〉는 한 쌍의 무용수가 캐스터네츠를 치며 기타 반주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2막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추는 〈세기딜랴〉가 나오는데, 〈세기딜랴〉 역시 캐스터네츠 반주가 있는 3박자의 흥겨운 춤곡이다. 그 밖에 물방앗간 집 남자가 추는 〈파루카〉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추는 〈호타〉 등 전편에 걸쳐 다양한 스페인 민속 춤곡이 등장한다.


파야가 작곡가로서 완숙기에 접어들었던 1929년,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썼다. 이 곡은 오케스트라 파트가 목관과 현악 5중주로 이루어진 소편성에 의한 실내협주곡이다. 바로크 양식과 스페인 음악의 특징을 세련된 수법으로 결합시킨 작품이며, 독주자가 하프시코드의 특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작곡했다. 1악장에서 제1주제는 첼로의 불협화음을 동반한 하프시코드가, 제2주제는 플루트와 오보에가 옥타브 간격으로 노래하는 가운데 하프시코드가 반주를 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2악장은 하프시코드의 특성을 살린 즉흥적인 환상곡풍의 악장이다. 3악장에서는 제1주제는 3박자, 제2주제는 6박자, 제3주제는 반주는 6박자, 선율은 3박자로 이루어진 세 개의 주제가 나온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피아노곡 〈네 개의 스페인 소품〉과 〈바에티카 환상곡〉, 가곡 〈7개의 스페인 민요〉, 관현악곡 〈네 개의 찬가〉 등이 있다.


[글-진회숙 /출처-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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