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60년 ~1880년]

[오스트리아-구스타프 말러의 부인]Alma Mahler

Bawoo 2017. 10. 11. 21:40



알마 말러 [Alma Mahler ]        

YoungAlmaMahler.jpg
Alma Mahler (c. 1902).
BornAlma Margaretha Maria Schindler
31 August 1879
Vienna, Austria-Hungary
Died11 December 1964(1964-12-11) (aged 85)
New York City, New York, U.S., buried 8 February 1965
Burial placeGrinzing Cemetery, Vienna
NationalityAustrian
American
OccupationComposer, socialite, author, editor
Spouse(s)Gustav Mahler (1902–1911: his death)
Walter Gropius (1915–1920: divorced)
Franz Werfel (1929–1945: his death)
ChildrenMaría Mahler (1902–1907), Anna Mahler (1904–1988), Manon Gropius (1916–1935), Martin Johannes Gropius (1918–1919


         

  

알마는 여러 곡의 가곡과 오페라를 위한 연주곡을 남긴 작곡가였다. 하지만 예술가보다는 예술가들의 아내로 역사에 남았다. 말러와 그로피우스, 코코슈카, 베르펠의 예술 속에서 알마는 숨 쉬고 있다. 때론 더없는 기쁨으로, 때론 더없는 고통으로.

알마 말러

알마, 그녀 이름의 내력

19세기가 저물고 20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 빈을 술렁이게 만든 한 여인이 있었다. 알마 마리아 쉰들러, 빈의 유명한 풍경화가 에밀 야콥 쉰들러의 딸인 알마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의 이름 변천사는 그녀의 곡절 많은 생애를 짐작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력서다. 그녀가 생을 마감던 때의 공식 이름은 알마 말러 베르펠, 이따금 그로피우스라는 이름이 끼어들 때도 있었다. 알마의 첫 번째 남편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두 번째 남편은 바우하우스의 창시자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세 번째 남편은 체코 출신의 시인이자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프란츠 베르펠이었다.

빈의 벨 에포크, 그리고 전쟁과 히틀러의 등장이라는 혼란의 시대를 관통하며 당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던 여인 알마, 그녀 자신도 여러 곡의 가곡과 오페라를 위한 연주곡을 남긴 작곡가였다. 하지만 알마는 예술가보다는 예술가들의 아내로 역사에 남았다. 말러와 그로피우스, 코코슈카, 베르펠의 예술 속에서 알마는 숨 쉬고 있다. 때론 더없는 기쁨으로, 때론 더없는 고통으로.

알마는 결혼 전에 쓴 일기에 스스로를 이렇게 기록했다. ‘진정으로 대단한 일을 하고 싶지만 그런 예술적 성취를 달성하기에는 나의 태도가 지나치게 경솔하다’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스스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대신 위대한 남자들의 연인이 되었다. 알마에게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남자를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 그녀를 움직이려면 적어도 당대 최고의 예술혼을 가졌거나, 최고의 열정을 간직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녀의 긴 이름 ‘알마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에 미처 기록되지 못한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첫사랑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있고, 표현주의의 대가 오스카 코코슈카도 있고, 작곡가이자 그녀의 음악 스승인 알렉산더 쳄린스키 그리고 홀른슈타인 신부도 있다.

내 아버지의 정원에서···

알마가 일기에 ‘위대한 무언가를 허락하소서’라고 쓰게 된 배경에는 아버지 쉰들러가 있다. 풍경화가 쉰들러는 빈 화가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알마는 아버지를 찾아오는 예술가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위대한 거인’이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일이 어린 알마에게는 가장 소중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모든 행동은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이해심 가득한 눈빛이 반짝거리기만 해도 내 모든 야망과 허영심은 충족되었다’고 알마는 일기에 썼다.

알마의 유일하고도 위대한 거인은 안타깝게도 그녀가 열세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에게 하나의 세계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3년 뒤에 어머니가 카를 몰과 재혼한 것은 더 큰 혼란을 몰고 왔다. 몰은 아버지가 아끼던 제자였기 때문이다. 젊은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알마는 괴테가 말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의지할 버팀목 없이 보냈다. 그 상처가 알마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아버지처럼 나이가 많고 아버지처럼 탁월한 예술가에게 끌렸다.

알마가 남긴 가곡 중에 〈내 아버지의 정원에서(In meines Vaters Garten)〉 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녀의 일생은 아버지의 정원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어떤 남자가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이끌어주며 다정하게 품어줄 수 있을까? 그녀의 인생에 그토록 많은 남자가 필요했던 것은 아버지의 부재가 만든 그림자 때문이었으리라. 그녀가 평생 사랑에 목마른 여인으로 살았던 것도, 천재적 예술가들과 사랑에 빠졌던 것도 아버지의 부재가 만든 그림자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에게 칭찬받으려 애쓰던 열세 살 소녀를 알마는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

첫사랑 구스타프 클림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가 연주하는 말러의 교향곡 5번이 녹음된 디스크 재킷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 〈키스〉가 새겨져 있다. 이 재킷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일까?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은 그가 아내 알마에게 바친 러브레터였고, 〈키스〉를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는 알마의 첫사랑이었으니까.

키스

클림트, 1907

1898년 봄, 클림트가 이탈리아 제노아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클림트는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카를 몰 가족과 만났다. 클림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알마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가 도착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이튿날 저녁, 클림트는 알마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방으로 들어선 클림트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복잡한 심경을 안고 제노아에 온 클림트와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알마가 나눈 짧은 키스, 그것은 그녀 생애의 첫 키스였다.

알마는 클림트와의 첫 키스를 일기에 기록했다. ‘나는 평생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내 생의 첫 키스를’ 이라고. 그리고 베네치아로 둘만의 여행을 떠났을 때에도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일기를 남겼다. 교회 계단에서 클림트가 사랑을 고백했다는 것도, 카를 몰이 반대하면 사랑의 도피라도 감행하길 클림트가 원했다고 썼다.

알마는 평생 그랬다. 말러의 편지를 비롯해서 많은 기록들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고쳤던 그녀지만 일기만큼은 더없이 솔직하게 썼다. 솔직한 일기와 고쳐 쓴 편지 사이의 간격, 그 사이에 그녀의 진짜 모습이 있을 것이다.

알마는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카를 몰의 집으로 이주했다. 몰과 클림트는 빈 분리파를 태동시킨 두 주역이었으니 당연히 자주 만났다. 주로 클림트가 몰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으므로 알마와의 만남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나이도 적당히 많고 이미 성공한 화가에 속한 클림트는 그녀에게 가장 이상적인 연인이었다. 하지만 클림트에게는 평생의 연인인 에밀리 플뢰게가 있었고, 막강한 후원자의 아내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도 있었다. 그리고 미치를 비롯한 수많은 모델과의 스캔들도 따라다녔다.

그래도 알마는 클림트를 좋아했다. 그가 유명한 화가라는 것 말고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클림트의 눈빛 때문이었다. 아버지 에밀 야콥 쉰들러가 보냈던 바로 그 다정하고도 위대한 시선으로 클림트는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알마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바로 그 눈빛에 반했다.

열여덟의 알마는 아이 같은 순수함과 성숙한 매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클림트는 그녀의 복합적인 매력에 끌렸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가진 모든 문제를 잠시 잊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고 훗날 알마와의 관계를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열일곱 살이나 어린 소녀를, 게다가 절친한 동료의 의붓딸을 좋아하는 일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클림트와의 관계를 눈치 챈 알마의 주변 사람들은 온갖 스캔들의 주역인 클림트를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알마는 그런 조언을 무시했다. 그녀는 열여덟의 조급한 열정이 시키는 대로, 아버지를 되찾고 싶은 소녀처럼 클림트에게 몰입했다.

클림트와 알마는 오페라 공연장에서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당시 알마는 니체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차림으로 공연장에 나타나 클림트의 연인으로 주목받길 원했다. 연인 에밀리 플뢰게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클림트는 자신의 복잡한 사생활에 대해 누구에게든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사과하는 법이 없었다. 알마의 의붓아버지 카를 몰에게만은 예외였지만.

깨어진 첫사랑

의붓딸과 친구의 관계를 모르고 있던 몰은 가족의 이탈리아 여행에 클림트를 초대했다. 처음에 클림트는 그 여행을 망설였다. 바쁜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모른다는 이유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여행에서 또 하나의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만들게 될 것 같아 그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몰의 초대에 응했다. 죄책감 속에서도 알마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몰의 가족은 나폴리와 로마, 피렌체를 거쳐 제노아에 도착해 있었고, 클림트는 곧바로 제노아로 갔다.

결국 몰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알마가 허술하게 관리한 일기를 읽고 몰은 경악했다. 절친한 동료인 클림트와 몰은 알마 때문에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몰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싸늘한 표정으로 클림트에게 알마와의 관계를 알고 있음을 밝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클림트는 몰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요약하자면, ‘알마는 충분히 매력적인 뮤즈지만 더 이상 알마의 연인이 되지는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몰은 알마에게 클림트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그녀의 첫사랑은 그렇게 멀어졌다.

하지만 알마는 클림트에 대한 집착을 쉽게 거두지 않았다. 말러와의 결혼이 임박했을 때도 클림트의 화실로 찾아가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했다. 알마는 마치 연극성 인격 장애가 있는 여성처럼 클림트 앞에서 격정적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그 장면을 지켜본 에밀리 플뢰게는 알마가 사랑의 아픔을 연기한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틀림없이 그 모든 일을 기록할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날 클림트는 울먹이는 알마를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점차 몰락해가는 이류 화가이며, 자신과 결혼하면 결코 사교계의 여왕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클림트와 알마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만났다. 빈의 사교계가 좁기도 했지만 몰과 클림트가 분리파에 뜻을 함께하는 동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말러도 분리파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잡한 인연으로 엮인 그들은 빈에서 어쩔 수 없이 자주 마주쳤다. 훗날 말러 부부가 뉴욕으로 떠날 때 빈 역으로 전송 나온 사람들 중에 클림트도 있었다. 말러 부부가 탄 기차가 플랫폼을 떠날 때 클림트는 ‘다 끝났어!’ 라고 외쳤다. 말러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예언한 외침이었을까? 아니면 알마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말러를 만나다

‘빈의 아름다운 꽃’이라고 불리던 알마는 자신이 마음먹으면 누구라도 유혹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아름다웠고, 재능이 있었으며, 열정도 있었다. 마음을 감추지 않는 솔직함도 그녀의 타고난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름다움으로만 남자들의 주목을 끌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우월한 예술적 유전자와 아버지의 서재에서 키운 예술적 열망이야말로 알마의 진정한 매력이었다. 화가로서의 재능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지만 알마의 진정한 꿈은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의 제자가 되어 여러 편의 가곡을 작곡했고 오페라도 구상하고 있었다.

알마가 구스타프 말러를 처음 만난 것은 1901년 11월 7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빈 분리파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1897년, 구스타프 클림트와 카를 몰을 중심으로 마흔 명의 미술가가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기존의 미술가 협회를 탈퇴하며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을 만한 전통이 없다고 생각한다. 분리파는 예전의 예술과 새로운 예술 사이의 투쟁이 아니며, 우리가 수호하려는 것은 예술 그 자체다” 라고. 빈 분리파 창설을 지지하는 세력은 광범위했다. 그중에는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을 지지하던 진보 성향의 귀족과 부호도 있었다. 그들은 말러를 후원했고 동시에 분리파를 지지했다. 친 드레퓌스 파의 중심은 훗날 프랑스 수상이 된 조르주 클레망소였는데, 그의 처형 베르타 주커칸들이 빈 사교계의 명사였다. 바로 그 주커칸들의 아파트에서 빈 분리파 창설 기념파티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분리파의 주역들과 미래의 말러 부인 ‘알마 마리아 쉰들러’가 있었다. 클림트의 연인 에밀리 플뢰게도 참석했으며, 파티를 싫어하는 말러도 참석했다. 말수 적은 말러는 화려한 아파트의 커튼 근처를 서성이다가 돌아갔다. 그것이 알마와 구스타프 말러의 첫 만남이었다.

구스타프 말러

1901년 11월 7일, 구스타프 말러와 알마가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주커칸들이 연 파티였다. 주커칸들의 여동생이자 조르주 클레망소의 부인 조피 클레망소도 말러가 지휘하는 연주회를 보기 위해 파리에서 빈까지 달려 왔다. 이 파티의 주역은 말러였다. 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지휘자 말러의 곁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그날, 말러의 시선은 알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흔한 살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던 말러에게 드디어 아내로 만들고 싶은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말러는 빈의 사교계에 명성이 자자한 알마를 알고 있었다. 적지 않은 여성 편력을 가진 말러가 보기에도 그녀에게는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많은 남자들에 둘러싸인 알마에게 마음을 빼앗긴 말러는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수많은 경쟁자 틈에서 그의 마음이 바빠졌다. 사무실로 그녀를 초대하고,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보다 이틀 먼저 찾아갈 정도로 흠뻑 빠졌다. 알마도 파티에서 말러를 만난 그날 ‘말러가 너무 좋아졌다’고 일기에 썼다.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쩔 줄 모르는 젊은 남자들과 말러는 달랐다. 그는 이미 거장이었고, 아버지처럼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결코 순종적이지 않은 알마였지만 말러와의 만남에서는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믿음까지 생겼다. 말러는 현실 속에 환생한 또 다른 아버지였던 것이다.

말러의 여인들

말러에게도 적지 않은 여자들이 있었다. 가장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켰던 나탈리 바우어 레히너는 말러의 일생을 연구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준 인물이다. 레히너는 빈 음악원 시절부터 말러와 함께한 친구였고, 비올리스트였다. 졸다트 뢰거 4중주단의 멤버였던 레히너는 한때 말러를 사랑했지만 그가 거절하자 깨끗이 포기했다. 그 대신 친구로서 오랫동안 말러 곁에 머물렀고, 1893년부터 1901년까지 말러의 음악적 행로를 상세하게 기록한 〈말러리아나(Mahleriana)〉를 집필하기도 했다. 말러는 레히너를 ‘나의 유쾌한, 오래된 나탈리’라고 불렀다. 카셀 오페라 극장 부지휘자로 재직하던 시절에 말러는 성악가 요한나 리히터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말러는 이별의 아픔을 담아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작곡했다. 말러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함부르크 시절에 만난 성악가 안나 폰 밀덴부르크는 한때 결혼까지 고려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밀덴부르크의 집요한 성격에 질린 말러는 빈 국립오페라 극장이 그를 부르자 도망치다시피 함부르크를 떠났다.

말러의 그녀, 알므쉬

말러는 알마를 ‘알므쉬(Almschi)’라고 불렀다. 결혼이 구체화되자 말러는 그녀에게 음악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에게 작곡가 부부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알마에게 ‘함께 행복하려면 오직 나의 필요에 의해 존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작곡을 포기하고 그의 아내가 되어준다면 자신의 인생과 행복을 모두 그녀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알마는 의외로 순순히 응했다. 그때까지 여러 편의 가곡과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고, 니체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까지 구상 중이던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말러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알마는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이 깊고 진실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처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준 말러를 믿고 의지하는 것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토록 열망하던 위대한 무엇이 된 것이다. 그녀 스스로가 이룬 것이 아니라 그녀가 선택한 사람에 의해서.

두 사람을 위한 약혼파티가 열렸다. 말러는 당시 빈에서 가장 유명한 독신남이었으니 그가 약혼한다는 사실은 빈의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는 뉴스가 될 만했다. 그들의 약혼파티를 주최한 사람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클림트의 모델이자 연인으로 소문이 파다한 바로 그 여인이었다. 바우어 부부가 미래의 말러 부부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었을 때 클림트도, 클림트의 연인 에밀리 플뢰게도 참석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와 세기 말의 빈 파티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무료하고 불행한 날들을 파티로 채우고 있었다. 화려하고 무기력한 세기말의 빈을 상징하는 여인과도 같았던 그녀는 클림트의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1907년에 그린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2004년 5월에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세계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말러도 클림트도 파티를 싫어했지만, 그런 사람들일수록 이상하게도 파티를 좋아하는 여자들과 사랑에 빠진다. 또한 파티를 자주 여는 사람들일수록 파티와 멀리 떨어져서 고독하게 파티를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소설 속에 그려놓은 ‘개츠비’처럼. 그 파티 장면들을 상상해보면 세기 말의 빈 풍경이 헤아려진다. 구시대의 독소가 폭발하기 직전까지 쌓여 있던 빈, 한없이 무료해서 무언가 새롭고 놀라운 것을 기다리는 귀족들과 부유한 인간 군상이 손에 잡힐 것 같다. 거대한 지진이 덮치기 직전, 지각 아래에서 마그마가 끓어오르고 있는 것과 같았던 불안한 시대의 초상이.

말러의 예술적 내조자 알마

1901년 3월 9일 일요일, 알마 마리아 쉰들러는 알마 말러가 되었다. 그들의 험난한 결혼생활을 예고하듯 폭우가 쏟아졌다. 말러에게 아버지를 기대하는 알마와, 알마에게 어머니를 기대한 말러의 결합은 날씨처럼 험난했다.

알마는 희생과 헌신을 택한 아내 역할에 한동안 충실했다. 하지만 사교계의 여왕이 남편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기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1년 뒤 그녀는 첫딸 마리아 안나를 낳았다. 난산이었다. 첫딸의 탄생은 산후 우울증을 몰고 왔다. 알마는 일기에 ‘날개 잘린 새가 된 것 같다’고 썼다. 그녀가 겪은 산후우울증은 생각보다 깊었다.

우울한 알마와는 달리 말러는 지휘자로서 승승장구했다. 지휘자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었고, 어쩌다 집에 있는 시간에는 작곡에 몰두했다. 극도로 신경이 예민한 말러가 작곡에 몰두할 때면 알마는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화려한 파티와 남자들의 찬사를 즐기던 그녀에게는 충분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게다가 첫 딸 안나에게도 그녀는 그다지 살가운 모성애를 보이지 않았다.

알마와 아이들

알마는 그의 친구들을 적절한 시기에 집으로 불렀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말러를 위한 일이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말러를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포기했던 그녀에게는 절실했다. 클림트와 몰이 단골손님이었고,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아놀드 쇤베르크도 중요한 손님이었다.

1902년 빈 분리파는 회화와 조각, 건축과 음악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새로운 전시를 기획했다. 바그너가 구현한 종합예술로서의 오페라처럼, 분리파는 종합예술로서의 전시를 선보인 것이었다. 역사적 ‘베토벤 프리즈’ 전시를 위해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은 전시실을 베토벤에게 바치는 신전처럼 만들었고, 조각가 막스 클링거가 제작한 베토벤 흉상이 전시실 중심에 세워졌으며, 클림트가 그린 세 폭짜리 거대한 벽화가 전시실을 에워쌌다. 바로 그 전시실에서 말러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연주되었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함께 일궈낸 ‘베토벤 프리즈’는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향해 내딛은 위대한 걸음이었다.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 The Hostile Powers far wall, 클림트, 1902)

빈 분리파는 1902년 ‘베토벤 프리즈’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왜 베토벤인가? 베토벤은 예술을 비로소 예술가의 것으로 만든 최초의 인물이다. 모차르트가 절반의 성공밖에 이루지 못한 예술가로서의 독립을 베토벤은 가난과 고독과 불행을 감당하며 이루어냈다. 음악이란 왕족과 귀족의 주문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에게 영감이 떠오를 때 비로소 탄생되는 것임을 선언한 최초의 작곡가 베토벤. 20세기가 시작되며 예술가들은 베토벤의 위대함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다.
베토벤 프리즈는 원래 한 번의 전시를 마치고 철거될 예정이었지만 이듬해 있을 클림트의 전시회에 다시 전시되기 위해 보관되었다. 클림트의 전시회를 마치고 다시 한 번 폐기될 뻔했던 이 벽화는 화가 에곤 실레의 주선으로 또 한 번 살아남았다. 사업가 칼 레인하루스가 이 작품을 사서 창고에 보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운송 과정에서 벽화는 어쩔 수 없이 일곱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운송과 보관 과정에서 손상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이 벽화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베토벤의 굴곡 많던 생애처럼 베토벤 프리즈도 온갖 고난을 견뎌낸 것이다. ‘베토벤 프리즈’는 기나긴 복원작업 끝에 되살아났고, 빈 분리파의 전당 ‘제체시온(Secession)’에 영구 보관되어 있다. 이 작품에 쏠린 전 세계 예술 애호가의 관심을 잘 알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이 벽화의 투어버전을 따로 제작했다. 복원에 참여한 팀이 다시 뭉쳐 완벽에 가깝게 리메이크한 이 복제품은 ‘베토벤 프리즈 투어버전’이라고 불린다. 2009년 예술의전당에 전시된 ‘베토벤 프리즈’는 바로 이 투어버전이었다.

말러가 ‘베토벤 프리즈’에 참여한 것은 그가 원래부터 분리파를 지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마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화가를 꿈꾼 적이 있었던 알마는 이미지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말러와 클림트가 바그너를 숭배한 것처럼 알마 역시도 바그너 음악을 숭배했고, 말러가 지휘하는 오페라가 바그너가 구현한 예술처럼 웅장하게 펼쳐지기를 원했다. 말러의 오페라를 위해 뛰어난 무대 미술가를 영입하라고 권한 것도 알마였다.

1903년 말러는 무대미술가 알프레드 롤러와 더불어 혁신적인 오페라 작업을 시도했다. 이 만남은 빈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웅장한 음악과 훌륭한 시각적 장치들이 결합되자 오페라의 극적인 매력이 활활 타올랐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베토벤의 〈피델리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와 〈피가로의 결혼〉 등이 공연되며 빈 국립오페라 극장도, 말러도, 알프레드 롤러도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롤러와 히틀러

1906년, 알프레드 롤러가 무대를 디자인하고 말러가 지휘하는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은 입석표까지 모두 다 팔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때 린츠에서 온 한 소년이 입석표를 사서 이 공연을 지켜보았다. 당시 열일곱 살인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던 화가 지망생 히틀러는 롤러의 제자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소심한 히틀러는 무대 뒤로 롤러를 찾아가지도 못했고, 당연히 준비해 간 추천장을 내밀 기회도 갖지 못했다.

1934년, 히틀러는 롤러를 총통 집무실로 불렀다. 30여 년 전, 수줍은 소년이 끝내 도전해보지 못했던 만남을 권력을 잡은 뒤에야 이루었던 것이다. 만약 1906년의 그날, 히틀러가 롤러를 찾아가 추천장을 내밀었다면, 그때 만약 롤러가 소년의 재능이 마음에 들어 그를 무대미술가로 키웠다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히틀러의 소심한 성격 때문에 세계 역사가 달라졌다니.

지휘자 말러와 작곡자 말러

말러는 카셀과 프라하에서 지휘자의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지휘자로서 인상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1890년 부다페스트에서 〈돈 조반니〉를 공연했을 때다. 이 공연에 참석한 브람스는 ‘생애 최고의 돈 조반니를 보았다’는 극찬을 남겼다. 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브람스는 훗날 말러를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적극 추천했다.

브람스와 말러는 철강재벌 비트겐슈타인 가의 저택에서 자주 만났다. 거의 날마다 음악회를 열었던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배출한 오스트리아의 명문가다. 그 살롱에서 브람스는 자신의 몇몇 작품을 초연했다.

함부르크 시절, 말러는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독일 초연을 이끌었다. 원래는 차이코프스키가 직접 지휘할 예정이었지만 말러를 믿고 그에게 지휘를 맡겼다. 말러는 엄청난 성공으로 보답했다. 1892년에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바그너의 작품들을 지휘했다. 독설을 일삼던 작가 버나드 쇼는 음악평론가로도 유명했는데, 말러의 지휘에 대해서는 ‘악보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고 강약을 섬세하게 조절했다’고 평했다.

1897년, 말러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지휘자로 부임했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무렵의 빈을 ‘슐램페라이(Schlamperei)’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적당주의’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 단어에 섞여들기에 말러는 너무 진지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지휘자로 말러를 맞이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코르셋으로 꽉 죈 옷을 입은 귀부인처럼 시달렸다. 오죽하면 단원들이 그를 ‘흡혈귀’라고 불렀을까. 하지만 말러가 부임한 뒤로 오케스트라가 내는 선율은 점점 더 좋아졌다. 말러에게 ‘적당주의’란 어림도 없는 단어였다. 냉혈한 독재자로 군림한 말러는 음악을 위해 결코 적당히 타협하는 법이 없었다.

말러는 지휘자로서의 명성보다 작곡가로서의 영광을 원했다. 후고 볼프와 룸메이트로 지내던 빈 음악원 시절부터 말러는 피아노와 작곡 그리고 지휘를 함께 공부했다. 지휘자로서 거장의 반열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의 가슴에는 늘 베토벤과 바그너에 필적하는 작곡가가 되리라는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한 이듬해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까지 지휘했기 때문에 말러는 쉼 없이 무대에 서야 했다. 그가 작곡에 완벽하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여름휴가 때뿐이었다. 아터제 부근의 슈타인바흐에 여름 별장을 가지고 있던 말러는 여름휴가를 몽땅 바쳐 열 개의 교향곡과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 〈탄식의 노래〉 등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말러는 알마를 위한 음악을 만들어 그녀에게 들려주는 순간을 좋아했다. 하지만 알마는 작곡가 말러보다 지휘자 말러를 높이 평가했다. 그녀에게 헌정된 음악에 감동받을 때도 있었지만, 남편이 작곡보다는 지휘에 더 재능이 있다는 것이 아내의 판단이었다.

알마가 작곡가 남편을 반기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1904년에 작곡된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때문이었다. 아내가 둘째아이를 가졌는데 남편이 그런 곡을 작곡하다니, 그건 말러가 좀 심했다.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이루고 있는 다섯 곡 중에서 세 곡은 3년 전에 작곡된 것이었다. 죽어가는 동생을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던 말러에게 ‘죽음’은 떨칠 수 없는 트라우마였다. 하지만 말러를 평생 따라다니던 죽음에 대한 강박을 알마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둘째아이는 무사히 태어났다. 둘째딸 안나 유스티네 말러는 별 탈없이 성장해서 엄마를 능가하는 다섯 번의 결혼을 했고, 유명한 조각가가 되었고, 천수를 누렸다. 어쩌면 말러가 그 노래를 작곡함으로 해서 둘째 딸 안나에게 찾아올지도 모르는 액운을 면해주었던 것은 아닐까?

‘이대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알마는 냉정하고 무겁고 칙칙한 말러를 점점 더 견딜 수 없었다. 가정의 모든 짐을 지고 아내로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심지어 말러의 여동생 빚까지 갚아야 했다. 집안은 갑갑한 상황의 연속이었고, 바깥의 사교계는 여전히 화려했다. 그녀는 밖으로 눈길을 돌려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주커칸들을 비롯한 옛 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자유롭던 옛날이 더욱 그리워졌다. 그녀는 일기에 ‘이대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썼다.

음악을 통해 아내에게 사랑을 바치려 했던 말러는 교향곡 6번의 1악장을 ‘알마의 테마’로 작곡했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인 이 작품은 혹평을 받았고, 작곡가 말러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니체를 인용하며 ‘니체처럼 나 역시 내 시대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먼 훗날이 되어야 자신의 시대가 올 것이라던 말러의 예언은 한 세기 후에 사실로 입증되었다.

지휘자로서의 성공과 작곡가로서의 좌절이 말러를 교대로 찾아올 때 그를 고통스럽게 한 일이 또 일어났다. 1907년 첫딸 마리아 안나가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알마는 남편이 작곡한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떠올리며 말러를 미워했다.

딸을 잃은 충격도 컸지만, 말러와 갈등을 빚던 세력들에 등 떠밀려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계속되는 큰 사건을 겪는 동안 말러에게는 심장질환이 생겼다. 빈으로 온 지 10년, 말러에게 최악의 시련이 닥쳤다.

악화일로를 걷던 말러 부부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그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1883년에 개장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은 세계 최고의 지휘자와 성악가들이 활약하는 무대였다. 당시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활약하고 있었다.

1908년, 말러는 뉴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혼란스러운 빈과 작별하고 뉴욕에서 보낸 시간은 새롭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을 때 뉴욕의 청중과 비평가들은 찬사를 쏟아냈다. 말러는 계속해서 바그너, 모차르트, 베토벤, 스메타나의 오페라를 지휘하며 뉴욕의 청중에게 유서 깊은 유럽 음악의 위엄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말러는 뉴욕에서 미국의 상업주의가 어떻게 예술가에게 상처를 입히는지를 경험했다. 당시 메트로폴리탄의 경영에는 J.P 모건이라는 회사가 관여하고 있었고, 경영진이 새로 영입한 이탈리아 출신의 극장감독은 말러의 지휘를 선호하지 않았다. 청중은 말러의 지휘에 찬사를 보냈지만, 극장감독은 말러 대신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새 지휘자로 고려하고 있었다. 말러는 불쾌한 마음을 안고 뉴욕을 떠났다.

로댕이 조각한 말러

뉴욕을 떠나 빈으로 가는 길에 말러는 파리에 들러 자신을 지지하는 명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프랑스의 수상이자 말러 지지자인 조르주 클레망소는 말러와 조각가 로댕의 만남을 주선했다. 로댕은 말러의 두상을 제작했다. 로댕의 스튜디오에서 조각가와 모델로 만났을 때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거장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열두 번이나 말러를 모델로 세운 끝에 8점의 조각품이 완성되었다. 로댕이 탄생시킨 말러의 조각상은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로비와 뉴욕의 에이버리 피셔 홀, 필라델피아의 로댕 박물관, 파리의 구스타프 말러 도서관 등에 전시되었다.

외로운 알마 그리고 그로피우스

남편과 더불어 유럽과 미국을 왕래하는 사이, 알마는 이십대 후반이 되었다. 말러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동안 그녀는 낯선 뉴욕에서 소외감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대륙의 활기는 저물어가는 빈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 ‘뉴욕은 외로움과 불면증의 도시, 그러면서도 기막히게 멋진 도시’라고 알마는 표현했다.

결혼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이자 권태롭고 우울한 아내가 되어 있었다. 화려하던 사교계의 여주인공은 버려진 인형처럼 슬픔에 잠겨 있었다. 알마의 외로움을 남들이 알아보기 쉬웠기 때문일까? 그녀가 가는 곳마다 많은 남자들이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곁을 서성거렸다. 파리에 잠시 머물 때, 말러를 존경하던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오시프 가브릴로비치가 알마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말았다. 그 고백은 싱거운 사건으로 끝났지만 알마는 자신이 ‘여전히 매력 있는 여인임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기뻤다’고 일기에 썼다. 아름답다는 찬사에 길들여진 여인은, 주기적으로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는 드라큘라처럼 주기적으로 아름답다는 찬사와 사랑의 고백을 수혈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1910년 6월, 말러 부부는 토블라흐에 머물고 있었다. 말러는 필생의 역작인 〈8번 교향곡〉 마무리와 초연 준비에 심혈을 쏟고 있었고, 알마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심신을 치유하기 위해 가까운 토벨바드로 요양을 떠났다. 알마는 냉기가 감도는 결혼생활에 지쳐 있었다. 작곡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아내가 되어준다면 그의 생애 전부를 바쳐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말러의 결혼 서약은 어딘가에서 표류 중이었다.

토벨바드 요양원의 의사는 알마에게 약과 휴식과 ‘춤’을 처방했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온 한 청년을 그녀의 댄스 파트너로 소개해 주었다. 청년의 이름은 발터 그로피우스, 20세기 건축과 디자인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바우하우스’의 창시자가 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짙은 눈썹을 가진 그로피우스는 젊고, 강하고,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건축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휴가를 즐기던 그로피우스는 알마에게 매혹되고 말았다. 그가 그때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재능과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 그의 예술적 영감을 일깨우는 강렬한 뮤즈로 알마는 그에게 다가왔다. 알마도 그로피우스와 만난 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두 영혼이 만났고, 육체는 잊혀졌다.’

그로피우스

알마에게는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만남이었지만 그로피우스에게는 그 이상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며칠 뒤 알마는 그로피우스를 뒤로 하고 말러에게로 돌아갔지만 그로피우스는 알마가 떠난 뒤에도 그녀를 향한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절절한 사랑의 고백을 담은 편지를 알마에게 보냈다.

불행하게도 그로피우스가 보낸 러브레터를 뜯어 본 사람은 알마가 아니라 남편 말러였다. 아내가 외도했다는 것을 알게 된 말러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알마는 그로피우스가 자신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편지를 보낸 것을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책망했다. 그로피우스도 그녀의 가벼운 처신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운명이라고 믿었던 사랑이 비난받는 신파가 되어버린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그로피우스는 결국 말러 부부의 숙소까지 찾아왔다. 말러는 숙소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 그로피우스를 데리고 들어왔다.

말러와 알마 그리고 그로피우스가 마주 앉았다. 말러는 알마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갈 것인지, 말러의 아내로 남을 것인지를 분명하게 결정하라고 했다. 알마는 말러 없는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결혼이 벼랑 앞에 내몰렸어도 그녀는 말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고 알마는 일기에 썼다. 그로피우스는 알마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참담한 표정으로 말러 부부를 떠난 그는 얼마 후에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하는 정중한 편지를 말러 앞으로 보냈다.

그로피우스의 등장으로 충격을 받은 말러는 아내를 책망하는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았다. 말러 역시 알마 없는 자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고, 그녀에게서 예술적 열정마저도 빼앗아 버렸던 자신을 비로소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알마의 외도가 그럭저럭 봉합되기는 했지만 말러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육체적 충격으로 전이되었다. 초조해진 말러는 알마가 혼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혹시 떨어져 있어야 할 경우에는 식사 전에 자신에게 꼭 전화하도록 당부했다. 그래도 말러의 불안은 점점 심해졌다. 알마는 그가 자주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말러는 밤에 침실 사이의 문이 열려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이따금 알마가 잠든 침대 앞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기도 했다. ‘내 결혼은 결혼이 아니었다’고 알마는 썼다. 채워지지 않는 불안, 붕괴되기 직전의 결혼을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 모두에게 괴로운 시간이었다. 알마는 그 상황을 ‘코미디’라고 표현했다. 결혼이라는 이름의 코미디는 말러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말러와 프로이트의 산책

계단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자 말러는 자신이 프로이트를 만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프로이트는 말러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1909년 8월 27일, 휴가 중이던 프로이트와 말러가 만났다. 두 사람은 진료실의 소파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대학도시 레이덴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똑같이 보헤미아 출신에 유대인이었고, 나이도 엇비슷한 두 사람은 평소 서로를 존경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신 뒤 말러에게 한적한 마을을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말러는 빈과 프라하의 중간쯤 되는 보헤미아의 칼리슈트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체코 땅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곳이었다. 말러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오스트리아 사람 속에서는 보헤미아 사람이 되고, 독일인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 인으로 취급받고, 세계는 나를 유대인이라 부른다. 어딜 가도 나는 이방인이다.’

다혈질이던 아버지 베른하르트 말러는 교양 있는 가문 출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폭력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파악하고 지원하는 일에는 열성적이었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빈 음악원에 입성했지만, 말러는 폭력적인 아버지보다는 기품 있고 연약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말러의 어머니는 한쪽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말러 역시 걸음이 조금 불안정했다. 그는 신체적으로 불편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강박 때문에 불규칙한 걸음걸이를 갖게 된 것이다.

네 시간에 걸친 산책이 끝났을 때 프로이트는 말러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말러가 어린 시절에 연달아 겪은 죽음에 대한 강박과 더불어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프로이트는 말러에게 말했다. 알마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말고 그녀에게 예술적 자유를 허락하라고. 알마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딸이어서,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는 딸처럼 말러의 곁에서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위기에 이른 결혼을 되살려내기 위해 말러는 알마가 다시 작곡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내 아버지의 정원에서〉, 〈침묵의 도시(Die Stille Stadt)〉를 비롯한 알마의 가곡 다섯 작품이 그렇게 출판되었다. 결혼생활이 완전히 금이 간 뒤에야 말러는 결혼을 다루는 법과 알마를 다루는 법을 알았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고객들

20세기 초 빈의 사교계에서는 말러의 음악을 듣고 클림트의 작품을 감상한 뒤 프로이트의 의자에 앉는 것을 최고의 유행으로 여겼다. 알마의 첫사랑 클림트와 알마의 남편 말러는 모두 다 프로이트의 고객이었다. 두 명의 구스타프 모두 프로이트가 충분히 흥미를 가질 만했다. 클림트에게도 어머니와 누이 때문에 평생 안고 가야 했던 깊은 상처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클림트가 이룩한 작품세계는 성에 대한 억압을 예술적으로 대리 충족시킨 성과’라고 분석했다.

프로이트는 말러를 직접 만난 뒤, 말러에게는 죽음에 관한 트라우마 말고도 ‘모성 고착’이라는 콤플렉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훗날 말러가 세상을 떠난 지 며칠 뒤에 정신분석학회에서는 말러의 사례, ‘성 메리 콤플렉스(Saint Mary Complex)’를 다루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말러를 환자로서만 대하지 않았다. 말러는 문학과 철학에도 학식이 뛰어났고, 심리학을 이해하는 뛰어난 식견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말러의 지성에 감탄하며 ‘말러는 신비로운 건축물과도 같다’고 말했다. 프로이트와 말러의 만남은 〈Mahler on the Couch〉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8번 교향곡 그리고 말러의 죽음

한바탕의 폭풍우를 겪었던 1910년 여름이 지나고 9월이 왔다. 1910년 9월 1일, 말러 최후의 걸작 〈8번 교향곡〉이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말러 스스로 ‘이전의 내 교향곡은 이 작품을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할 만큼 그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작품이었다. 말러는 1906년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번개가 내려치듯 쏟아지는 악상을 받아 적기 위해 휴지 조각이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악보를 적곤 했다’고 알마는 회상했다.

〈8번 교향곡〉의 초연을 기획한 에밀 구트만은 오케스트라단원부터 합창단원에 이르기까지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무대에 서게 되는 이 작품을 ‘1000인 교향곡’이라고 홍보했다. ‘교향곡 8번’이라고 불리는 것과 ‘1000인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과 ‘월광 소나타’의 차이처럼 말이다.

초연 때 무대에 오른 인원은 모두 1029명, 지휘자 말러까지 모두 1030명이었다. 브루노 발터가 선발하고 훈련시킨 합창단원만 858명, 그리고 현악기 연주자 84명과 하프 연주자 6명, 목관악기 연주자 22명과 금관악기 연주자 17명으로 구성된 171인의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무대를 가득 채웠다. 당대에는 그 스케일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으리라. 음악적으로 정점에 이른 말러의 자신감, 새로운 형식에 대한 도전 그리고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거대한 스케일과 호기심까지 맞물려 〈8번 교향곡〉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8번 교향곡〉을 성공적으로 초연한 뒤 말러는 다시 한 번 뉴욕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토스카니니를 선택한 메트로폴리탄에 뼈저린 후회를 안겨 주고 싶었던 말러는 뉴욕 필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빈을 떠났다.

말러가 지휘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카네기 홀에 울려 퍼졌다. 말러의 뜻에 따라 철저하게 재조직된 뉴욕 필은 완벽한 연주를 펼쳤다. 하지만 한 무리의 비평가와 뉴욕 필의 감독위원회가 말러의 지휘를 공격적으로 비판하면서 말러는 그들과 감정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1911년 2월 21일, 말러는 심장질환이 악화되고 합병증을 겪게 되면서 활동을 중단했다. 그 후 2개월 동안 요양했지만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결국 파리에서 치료하기로 하고 미국을 떠났지만 기대를 걸었던 파리에서도 건강은 호전되지 않았다. 말러는 고향에 가서 죽음을 기다리겠다고 결정했다.

빈으로 돌아온 지 며칠 뒤인 1911년 5월 18일, 말러는 생을 마감했다. 베토벤, 슈베르트, 안톤 부르크너 같은 작곡가들이 ‘9번 교향곡’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징크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10번 교향곡’을 작곡하기 위해 서둘렀지만 결국 말러도 ‘9번 교향곡’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0번 교향곡〉은 말러가 알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와도 같다. 〈10번 교향곡〉 초고에는 알마를 향한 분노가 새겨졌다. ‘너만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는다. 알므쉬’ 말러가 알마에게 헌정했던 교향곡 5번 4악장이나 6번의 1악장처럼 절절한 사랑도 담겨 있지만, 사랑했던 만큼의 뜨거운 분노가 〈10번 교향곡〉 1악장에는 더 깊이 새겨져 있다.

말러는 〈10번 교향곡〉의 1악장만 완성했고, 나머지 악장을 구상하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말러 〈교향곡 10번〉은 1악장만 연주되거나 미완성인 상태로 남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알마는 여러 음악가와 학자에게 의뢰해 말러의 구상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 10번〉을 완성했다. 여러 가지 버전이 있는데 음악학자 데릭 쿠크 버전이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데릭 쿠크가 완성한 말러의 〈교향곡 10번〉을 듣고 알마는 울었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말러의 위대한 선율 때문이었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세월 속에 홀로 남겨진 감상 때문이었을까?

작곡가 알마

알마는 1895년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첫 스승 요셉 라버, 그리고 한때 사랑하는 사이였던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는 그녀가 작곡가로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말러가 작곡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알마는 약혼과 더불어 음악활동을 접었다. 그들의 결혼이 위기에 이르렀을 때 말러는 알마의 가곡 몇 편의 악보를 출판해 주며 음악활동을 격려해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말러가 그녀의 음악활동을 보장한 뒤에도 또 말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알마가 작곡가로서 그다지 의욕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말러 때문에 작곡에서 손을 뗀 10년 사이에 알마는 빛나던 재능과 의욕을 다 잃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은가? 한창 재능을 발휘할 때 그 길을 차단당하면 있던 재능도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고 만다. 부모의 강압 때문에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치고 마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알마는 가곡 17편과 오페라를 위한 연주곡을 남겼다. 생전에 악보 14편이 출판되었고, 그녀가 죽은 뒤 세 곡이 더 발견되었다. 그중 두 곡은 2000년에 출판되었다.

알마의 야사(野史), 오스카 코코슈카

말러의 아내로 유명해진 것이 알마의 ‘정사(正史)’라면 오스카 코코슈카와의 스캔들로 유명해진 것은 알마의 ‘야사(野史)’다. 말러는 알마에게 상복을 입지 말라고 유언했다. 자신이 죽은 뒤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지 눈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말러가 우려한 대로 알마는 다시 사교계의 여왕으로 복귀했다. 무르익은 아름다움에 말러의 미망인이라는 명성까지 더해졌다. 10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그녀는 예술적으로 더 성숙해졌고, 미국이라는 신세계까지 경험한 터였다. 알마 곁에는 다시 남자들이 모여 들었다.

말러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알마는 오스카 코코슈카의 연인이 되었다. 빈은 사실 그녀에게 너무 좁은 세상이었다. 그녀의 남편과 첫사랑이 ‘베토벤 프리즈’를 함께 공연하며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였던 것처럼, 새로운 연인 코코슈카는 그녀의 첫사랑 클림트가 키우는 젊고 열정적인 화가였다.

‘오스카 코코슈카의 스케치는 아주 탄탄하다. 제멋대로이며 괴짜이지만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 클림트는 코코슈카의 미래를 예언했다. 1908년, 클림트가 〈키스(당시 제목은 ‘연인들’이었다)〉를 출품한 미술전시회에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도 전시되었다. 클림트는 전도유망한 이 젊은 작가를 빈의 명사들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클림트의 작품에 쏟아진 찬사와는 대조적으로 코코슈카의 대담하고 원시적인 작품에는 비난이 쏟아졌다. 클림트는 코코슈카에게 혹평을 즐기라고 조언했다. 새로운 화풍을 들고 나온 젊은 화가에게 쏟아지는 혹평은 미래의 성공을 예언하는 것임을 클림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마의 의붓아버지 카를 몰 역시 코코슈카의 등장을 환영했다. 인상적인 이 젊은 화가를 그의 집으로 초대해서 지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음악회를 즐기기도 했다. 예술에 관한 토론이 있는 식탁,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거실, 그곳에서 알마와 코코슈카가 만났다. 1912년 4월 12일, 코코슈카를 처음 만났을 때 알마는 행복하고 동시에 불행한 상태였다. 난파선 같았던 결혼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말러의 미망인으로만 살아가기에는 너무 젊었다. 아무도 그녀가 작곡하는 걸 말리지 않았지만 작곡도 시들해졌고, 우울한 그림자가 여전히 그녀를 맴돌고 있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원하던 그녀에게 코코슈카는 필요한 시기에 적절하게 등장한 인물이었다.

알마와 코코슈카는 첫 만남부터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코코슈카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코코슈카는 기다렸다는 듯 승낙했다. 빈을 떠들썩하게 만든 알마와 코코슈카의 뜨거운 연애가 시작되었다.

코코슈카는 《스핑크스와 허수아비》라는 어린이책을 비롯해 시화집을 출간한 극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알마와 사랑에 빠져 있던 2년 반 남짓한 기간 동안 400통이 넘는 러브레터를 썼다. 그는 알마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알마의 생각은 달랐다. 코코슈카가 훌륭한 화가가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은 없었다. 코코슈카에게는 말러와 닮은 독점욕과 집착이 보였다. 그녀는 말러와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젊은 화가에게 뜨거운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의 역할을 하고, 자신도 그로부터 새로운 의욕과 열정을 수혈받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만약 다시 결혼한다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명성과 품격을 지닌 남자를 선택할 생각이었다. 예를 들자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기품 있고 안정적인 발터 그로피우스 같은 남자 말이다.

바람의 신부

코코슈카는 알마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처음 만난 날 알마가 부탁한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풍으로 완성되었다. 그녀의 포즈는 바로 모나리자의 포즈와 흡사하고 화면의 구성 또한 그렇다. 하늘색과 분홍색을 비롯한 화사한 색채들이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도록 채색되어 있지만, 거친 붓 터치 때문인지 아니면 코코슈카의 격정 때문인지 그녀는 좀 일그러져 보인다. 남아 있는 사진 자료를 보면 알마는 늘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모습이다. 하지만 코코슈카의 초상화 속의 그녀는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어서 단정치 못한 느낌이다. 언뜻 보면 마치 머리를 기른 노파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을 그린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로테스크하다. 그는 알마의 아름다움과 위험성을 동시에 알아차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알마는 코코슈카가 그린 이 초상화를 죽는 날까지 간직했다. 그녀가 살았던 뉴욕의 아파트에도 코코슈카가 그린 이 초상화가 벽의 가장 중심에 걸려 있었다.

알마와 함께 지내는 동안 코코슈카는 영감에 사로 잡혀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유화와 드로잉, 판화 그리고 알마에게 보낸 러브레터와도 같았던 독특한 부채 그림 7점이 사랑의 증거물로 남았다. 코코슈카는 마치 일기를 쓰듯 알마와의 사랑을 그림으로 그렸다. 두 사람의 누드, 두 사람의 초상화를 미술전시회에 출품해서 그들의 관계를 세상에 공공연하게 알렸다.

그로피우스도 베를린 전시회에 출품된 코코슈카의 작품을 통해서 알마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훗날 그로피우스는 코코슈카와 알마가 보낸 시간에 분노한 나머지 코코슈카의 부채 그림 7점 중 하나를 벽난로에 던져 태워버렸다. 그래서 코코슈카의 부채 그림은 결국 6점만 남게 되었다.

코코슈카의 대표작은 〈바람의 신부〉다. 그림 자체보다도 알마와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어 더 유명해진 작품이다. 가질 수 없는 연인 알마를 향한 불안이 지배하고 있는 〈바람의 신부〉는 검은색에 가까운 푸른색을 배경으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그림이다. 여인은 남자 쪽을 향해 편안하게 있으나 어둡게 그려진 남자는 그녀가 사라져버릴까 불안한 듯 눈을 뜨고 있다.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어둡고 강렬한 선의 율동은 마치 운명의 노끈처럼 보이기도 한다. 폭풍우 같은 격정을 담은 〈바람의 신부〉는 알마와 코코슈카의 사랑을 더없이 정확하게 증명하는 작품이며, 그 사랑의 슬픈 앞날을 예언한 작품이다. 코코슈카는 이 작품을 그리고 있을 때 알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거의 완성되었소. 번개와 달, 산, 솟구치는 물 그리고 바다를 비춰주는 벵골의 불빛. 폭풍에 날리는 휘장 끝자락에서 서로 손을 잡고 누워 있는 우리의 표정은 힘차고 차분하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2년 반 정도 이어졌던 코코슈카와의 사랑은 열정적이었던 만큼 후유증도 컸다. 그녀가 코코슈카의 집착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까를 고민하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코코슈카는 실연의 고통을 안고 자원입대했다. 그가 두 번의 큰 부상을 입고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사이 알마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했고, 딸 마농을 낳았다.

군복무를 마친 코코슈카는 끝나지 않은 몸과 마음의 고통을 그림과 시에 담으며 견뎠다. 1919년 드레스덴 미술학교 교수로 초빙되면서 그는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런데 이 시기에 코코슈카는 좀 특이한 행동을 했다. 무슨 심경에선지 뮌헨의 유명한 인형공방에, ‘서른다섯에서 마흔 살 사이쯤 되어 보이고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실물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했다. 누가 봐도 알마를 연상시키는 인형에게 코코슈카는 ‘훌다(Hulda)’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드레스와 속옷까지 주문해서 인형에게 입힌 뒤 그는 인형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잠들었다. 마침내 인형을 마차에 태워 오페라 공연에 참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코코슈카는 그 인형을 모델 삼아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그 작업을 이렇게 불렀다. ‘인형, 인형과 우울한 여인의 자화상; 긴 겨울을 고치 속에서 견딘 애벌레는 나비가 된다’.

진실이 어떻든 간에, 빈의 사교계는 코코슈카의 기행을 두고 한동안 떠들썩했다. 그가 기괴하고 혹독하게 치른 사랑의 후유증은 1920년 봄에야 끝났다. 드레스덴 미술학교로 떠나는 그를 축하하는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인형은 함부로 다루어졌고, 머리가 떨어져나간 채 버려졌다. 이튿날 새벽, 청소부가 인형을 수거해갔다. 코코슈카의 가슴에서도 알마의 기억이 수거되었다.

코코슈카가 한평생 알마를 잊지 못했다는 것은 과장된 이야기다. 사랑을 승자와 패자의 게임으로 본 기록일 뿐이다. 물론 코코슈카는 그녀와 헤어진 뒤 회한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그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뒤섞은 제목을 붙인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것 역시 그가 알마에게 가진 미련의 흔적일 테지만, 그렇다고 코코슈카가 알마에게 집착하느라 자신만의 삶을 놓쳤던 것은 아니다. 사랑만큼 불평등한 것도 없다.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언제나 그런 소문의 희생자가 되는 법이다.

훗날 알마가 일흔 번째 생일을 맞이했을 때 코코슈카는 그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나의 알마. 당신은 아직도 나의 길들이지 않은 야생동물이오.’ 편지의 본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추신에는 ‘코코슈카의 가슴은 당신을 용서하기에’ 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코코슈카는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와 더불어 표현주의의 대가가 되었다. 사랑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그림과 극작을 병행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예술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회화만이 아니라 그의 극작품 역시 초기 표현주의 극작의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1922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참여 작가가 되었다. 이때 코코슈카와 알마는 베네치아에서 잠시 재회하기도 했다.

희곡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

많은 사람이 코코슈카의 인형 스캔들을 알마에 대한 집착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코코슈카의 기괴한 인형놀이는 그가 이 무렵에 썼던 표현주의 희곡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를 스스로 공연한 일종의 퍼포먼스이기도 했다. 사랑의 실패를 신화 속에서 되살려내려던 그는 ‘오르페우스’처럼 ‘유리디스’를 사랑의 지옥 속에서 불러냈다.

희곡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는 1918년에 시작되어 1921년에 출간되었다. 1926년에는 작곡가 에른스트 크레넥에 의해서 3막짜리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에른스트 크레넥이 한때나마 알마의 사위였다는 점이다. 알마의 딸 안나 유스티네 말러는 평생 다섯 번 결혼했는데, 그 중에서 두 번째가 크레넥과의 결혼이었다. 1921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불과 10개월만에 이혼했다. 알마의 연인이었던 코코슈카와 알마의 사위였던 크레넥이 함께 만들어낸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는 다시 한 번 알마를 둘러싼 스캔들을 상기시켰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 오페라의 중요 배역을 이렇게 정했으리라. 오르페우스는 코코슈카, 유리디스는 알마, 프시케는 말러의 딸 안나, 그리고 지옥의 플루토 역은 당연히 구스타프 말러.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말러의 집에서 삼자대면을 했던 날, 알마가 말러의 아내로 남겠다고 선택하자 그로피우스는 쓸쓸히 알마를 떠났다. 하지만 알마는 그로피우스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틈날 때마다 그로피우스에게 편지를 썼다. ‘여전히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당신의 아내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다’고. 그로피우스는 답장을 망설였다.

알마는 뮌헨에서 말러 〈교향곡 8번〉이 초연될 때 그로피우스를 뮌헨으로 불렀다. 1910년 겨울, 다시 뉴욕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에도 알마는 말러와 다른 경로를 택했다. 파리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뉴욕에서 합류하겠다고 말러에게 통보했고, 파리로 가는 길에 그로피우스를 만났다. 뉴욕에 도착한 뒤에도, 말러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알마는 그로피우스에게 편지를 썼다. 그로피우스는 알마의 대담함을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마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녀를 두려워했다.

그로피우스가 알마를 사랑했던 것은 상당부분 그녀가 가진 지적 능력 때문이었다. 다른 여성과는 나눌 수 없는 대화가 알마와는 가능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시작되던 단계에서 그로피우스는 이미 큰 상처를 받았다. 그에게 알마는 떨칠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는 고통스러운 존재였다.

말러가 세상을 떠난 1911년 말, 두 사람은 베를린에서 다시 만났다. 그로피우스는 알마와 감정적인 거리를 두었지만 알마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했다. 유서 깊은 가문에서 반듯하게 성장한 그로피우스에게 알마는 얼마나 낯설고 고통스럽고 매혹적인 여인이었을까?

발터 그로피우스는 유명한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도 건축가였고, 큰아버지 마르틴 그로피우스는 베를린 미술공예학교의 교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알마를 만나기 전 그로피우스는 대학을 졸업하고 베렌스 설계사무소에서 일했다. 그때 그로피우스와 함께 근무한 동료들이 훗날 현대 건축의 거장이 된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데어로에 같은 인물이었다.

베렌스 설계사무소를 떠나 새로운 일터로 가기 전, 그로피우스는 재충전을 위해 휴가를 떠났다. 바로 그때 알마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로피우스가 ‘독일공작연맹’이라는 건축 집단에 들어가 새로운 건축을 구상하던 시기에 알마는 말러와 사별했고, 코코슈카와 떠들썩한 연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코코슈카가 그린 알마를 전시회장에서 보는 건 그로피우스에게 괴로운 일이었다. 그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로피우스도 장교로 전쟁에 참전했다. 알마는 계속 편지를 보내오고 있었지만 전쟁터의 그로피우스는 자의든 타의든 알마의 편지에 답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운명처럼 그의 삶에 들어선 알마에게 그는 끝까지 매정하게 굴 수 없었다.

1915년 2월, 두 사람은 베를린에서 재회했다. 알마에게 그로피우스는 그 어느 때보다 멋진 남자였고, 그 누구보다 그녀가 원하던 남자였다. 건축가로서의 명성도 높아지고 있던 그로피우스는 반듯하고 품격 있는 모습과 성실한 공학도다운 강인함으로 알마를 사로잡았다.

두 번째 결혼

무슨 기이한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러의 기일과 그로피우스의 생일은 같은 날이다. 말러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째 되던 날이자 그로피우스의 서른한 번째 생일인 1915년 5월 18일, 알마는 그로피우스를 그리워하며 일기를 썼다. ‘내 삶이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 발터 그로피우스일까? 만약 그라면 좋겠다.’ 라고. 알마는 그로피우스와 결혼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알마가 코코슈카와 보낸 세월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알마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여전히 그를 망설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매혹이 망설임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알마는 정공법을 택했다. 1915년 6월, 그녀는 대담하게도 코코슈카의 작품이 실린 한 잡지를 그로피우스에게 보냈다. 코코슈카의 작품 제목은 〈Allos Makar〉, 알마와 오스카라는 이름을 순서만 바꾼 것이었다. 코코슈카가 알마를 잊지 못했다는 증거와도 같은 작품을 그로피우스에게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동봉한 편지에 알마는 그렇게 썼다. ‘코코슈카의 시는 아름다워요. 이 작품 중에서 두 점은 좋고 세 점은 끔찍해요. 하지만 그의 작품은 이제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요. 멋지지 않아요? 내가 당신에게 이 모든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이 강하다는 것이?’

알마의 정공법은 결국 그로피우스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드디어 매혹이 망설임을 넘어선 것이다. 1915년 8월 18일, 그로피우스는 베를린에서 어머니 몰래 알마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5일에 두 사람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딸의 이름은 그로피우스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마농’이라고 지었다. 딸의 출생을 지켜보지 못한 그로피우스에게 알마는 ‘나는 아이와 사랑에 빠졌어요’ 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알마와 결혼하던 해, 그로피우스는 바이마르의 공예학교와 건축학교 두 곳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바우하우스’까지 구상하던 중이던 그로피우스는 정말 바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기능면에서는 우수한 디자인으로 인류의 삶을 개선시키겠다는 것이 그로피우스의 열망이었다. 알마에게는 다시 혼자 보내야 할 시간이 많아졌다.

알마는 천재들을 사랑했고, 천재들과 결혼한 뒤 외로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의 천재성으로 세상에 기여하려니 알마의 남자들은 바쁠 수밖에 없고, 알마는 그렇게 뛰어난 남자들에게만 끌렸으니, 천재들과 결혼한 뒤 외로워지는 패턴을 반복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짧지만 가장 강렬했던 사랑

1917년, 알마는 다시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그녀의 살롱에 옛 친구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알마의 첫사랑 클림트와 극장 감독 막스 부르크하르트, 지휘자 브루노 발터,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작곡가 알렉산더 쳄린스키, 아놀드 쇤베르크와 알반 베르크, 말러의 지지자 베르타 주커칸들 그리고 프라하에서 온 프란츠 블레이가 참여했다. 새로운 멤버 프란츠 블레이는 화려한 언변과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다스런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클림트가 블레이를 몹시 못마땅해했다. 블레이는 그 모임에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 새로운 멤버를 한 사람 데려왔는데, 그가 바로 알마의 세 번째 남편이 되는 프란츠 베르펠이다.

1915년 8월, 그로피우스와 비밀결혼을 한 뒤 빈으로 돌아오던 알마는 기차를 타기 전에 잡지 한 권을 샀다. 잡지에는 프란츠 베르펠의 시가 실려 있었다. 〈인식 주체(Der Erkennende)〉라는 베르펠의 시에 감명받은 그녀는 그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을 작곡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마는 베르펠과 금방 불꽃 튀는 사이가 되었다. 그로피우스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집에 머물 때에도 그녀는 베르펠을 집으로 불렀다. 멋진 목소리를 가진 베르펠의 시낭송은 감미로웠고, 그가 부르는 노래도 아름다웠다. 알마가 피아노를 치고 베르펠이 노래하고, 그로피우스는 다른 방문객과 둘러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알마는 정말 대담하다. 아니면 사랑 앞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진무구한 것일까?

알마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그로피우스와의 결혼은 2년도 채 되지 않아 위기에 봉착했다. 그로피우스는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슬펐다. 알마가 가지고 있던 코코슈카의 작품을 불태우거나 박물관에 기증하도록 만든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 위에, 알마가 낳은 둘째 아이 마르틴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 더 추가해야 했을 때 그로피우스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들은 험악하게 싸웠다. 알마는 그로피우스가 가정을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우겼고, 그는 방종한 알마를 원망했다. 그런 방식으로 더 싸우면 알마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의 주치의가 경고했다. 결혼은 이미 무너졌지만 그들은 딸 마농 때문에 곧바로 헤어지지는 못했다.

알마는 그녀의 생애에 만난 모든 남자 중에서 그로피우스를 가장 사랑했다고 썼다. 짧았던 사랑이지만 가장 강렬하고 가장 완벽하게 몰입했던 사랑이 그로피우스와의 사랑이었다고 했다. 그로피우스와의 결혼이 파국으로 끝났을 때 그녀는 두 번째 결혼이 왜 실패했는지를 회한 가득한 심정으로 일기에 적었다. 서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그로피우스가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공학도여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인류를 위해 혁신적인 건축과 디자인을 구상하느라 바쁜 그로피우스의 열정을 그녀가 제대로 알아주지 못했던 탓인지를. 실패란 모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결과겠지만, 알마는 자신이 그로피우스의 이상과 열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그의 작업에 열렬히 호응해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여겼다.

1919년 여름, 그로피우스는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공예학교과 건축학교를 합쳐서 ‘바우하우스’를 탄생시켰다. 아름다움이 제대로 용도를 갖출 때 진정한 디자인이 탄생된다고 믿었던 그로피우스는 그 신념으로 바우하우스를 현대 건축의 성지로 성장시켰다.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교실에서만 공부하지 않았다. 장인에게 기술을 배우고, 직접 제작에 뛰어들어 기능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창조적 작업을 해냈다. 파울 클레, 칸딘스키 같은 유능한 예술가도 바우하우스의 교수로 합류했다.

바우하우스가 문을 열었을 때 알마는 그로피우스와 함께 바이마르에 있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로서나 교육자로서는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알마와는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약 알마가 그로피우스와의 미래에 안주했더라면 어땠을까? 알마의 두 번째 결혼은 1920년 10월 20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침묵만이 진정한 휴식일 것이오’

알마는 그로피우스가 감동적일 정도로 자신에게 친절했다고 기록했다. 자신의 삶에서 만난 가장 관대하고 고결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로피우스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고도 썼다. 자신이 그로피우스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로피우스로부터 잊혀졌다고 그녀는 기록했다. 그것은 알마의 변명일까? 어떤 관계나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맨 얼굴이 있기 마련이니 모든 잘못을 알마에게 일방적으로 덮어씌우지는 않기로 한다.

그로피우스가 관대하고 고결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적확한 표현이다. 그는 평생 건축가로서, 교육자로서, 비평가로서 반듯한 걸음걸이를 보여주었다. 그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알마의 세 번째 남편 베르펠과 연관이 있다.

용광로 같은 혼란 속에 빠져 있던 빈에서 베르펠은 ‘센트럴 카페’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혁명적이고 불순한 모임의 중심인물로 낙인 찍혀 있었다. 만약 베르펠이 체포된다면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였다. 그로피우스는 베르펠에게 곧 체포될 것 같으니 미리 피하라고 알려주었다. 자신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 남자를 위험에서 구해야 했던 그로피우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로피우스는 알마와 헤어진 지 3년 뒤에 이세 프랑크와 재혼했고,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알마와 비슷한 시기에 그로피우스는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고, 하버드 대학의 초빙으로 건축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8년 8월 17일, 그로피우스는 마지막으로 알마에게 편지를 썼다. 알마의 자서전에 실린 그들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결혼이 깨어질 때 그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마농을 두고 서로 어떻게 대립했는지를 표현한 부분에 대해 그로피우스는 분개했다. 오래 전에 죽은 딸을 책 속에 불러내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알마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딸 마농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로서의 참담함을 그로피우스는 편지에 썼다. ‘침묵만이 진정한 휴식일 것이오’ 라고 당부한 그로피우스의 편지는 뒤늦게나마 효과가 있었다. 개정판부터 그 부분은 삭제되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현대 건축의 거장으로서 존경받았고, 알마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뒤인 1969년에 세상을 떠났다.

베르펠과의 세 번째 결혼

알마는 그로피우스와의 이혼도 불사하며 베르펠을 사랑했지만 그들이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9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녀에게도 결혼이 좀 지겨웠던 것일까? 아니면 세상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일까? 베르펠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그녀가 오래 머뭇거렸다.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알마는 베르펠과 뜨겁기도 했고, 차갑기도 했고, 헤어질 위기도 겪었다. 어쩌면 시대가 그들을 끝까지 묶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인 베르펠의 신변이 위험해지자 그녀는 1929년에 베르펠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물론 시대적인 배경만이 그녀가 결혼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알마는 쉰 살, 더 이상 젊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았다. 더 이상의 청혼자가 없는 삶을 생각해보니 그녀는 문득 불안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알마의 러브 어페어는 그 후에도 이어졌다. 그 상대가 존경받는 신부 홀른슈타인이었다는 것이 빈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충격에 빠뜨렸다.

나치에 저항하는 작가 중에서도 가장 큰 목소리를 내던 베르펠은 나치의 위협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자 빈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알마와 함께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간 베르펠은 스페인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전전했다. 그 과정에서 잠시 루르드에 머물렀던 그는 루르드의 성모 발현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만약 자신과 알마가 무사히 미국에 도착하게 된다면 루르드의 기적 이야기를 반드시 세상에 널리 알리겠다고 생각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을 지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던 베르펠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간신히 미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배를 탈 수 있었다. 베르펠은 미국에 도착한 뒤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유대인인 베르펠이 쓴 가톨릭의 기적 이야기, 그것은 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베르펠은 끝까지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았다. 이념과 종교로 나뉘는 좁은 세상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근원적인 휴머니즘을 추구했다. 루르드의 기적을 다룬 〈베르나데트의 노래〉는 베르펠에게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의 성공 이후로도 베르펠은 〈야코보프스키와 대령〉이라는 희곡과 공상과학소설 〈태어나지 않은 별〉을 유작으로 남겼다.

베르펠은 카프카가 인정했듯 뛰어난 작가였다. 하지만 그가 알마의 연인이 된 후 비로소 위대해졌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베르펠의 지인들도 알마의 명성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알마가 아니었다면 그는 빈의 카페에서 저항시를 낭독하는, 약간 알려진 작가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알마의 폭넓은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베르펠이 그의 능력 이상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알마는 진심으로 베르펠의 문학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녀 역시 소녀시절부터 니체를 탐독했고 늘 문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훌륭한 문학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베르펠을 높이 평가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탁월한 음악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르펠의 어린 시절의 영웅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베르펠은 알마의 첫 남편 구스타프 말러도 진심으로 존경했다.

알마 말러와 프란츠 베르펠

기록자, 알마

알마는 아홉 살 때부터 일기를 썼다. 많은 사람들이 알마의 생애를 연구하거나 무대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솔직한 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면 알마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의 사생활을 감출 줄 알았다면 알마에 대한 후세의 시선 또한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너무나 솔직하게 일기를 썼던 것과는 달리, 알마는 자서전의 적지 않은 부분을 사실과 다르게 기록했다. 그로피우스가 항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말이다. 말러에 관한 부분은 정도가 더 심해서, 말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랫동안 혼란을 겪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말러를 지켜 본 사람이 알마였기 때문에 그녀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알마가 상당 부분을 조작했다는 것을 증언해 줄 자료가 나타났다. 구스타프 말러를 평생 조용히 사랑했던 빈 음악원의 동창생 나탈리 바우어 레히너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레히너는 말러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기록했는데, 훗날 레히너의 기록과 알마의 기록을 대조한 학자들은 레히너의 기록이 더 상세하고 정확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알마가 기록을 조작한 것은 고의였을까? 말러는 알마에게 편지를 보낼 때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러의 편지 순서가 제멋대로인 것도 의혹의 근거가 되었다. 무엇보다 알마는 원만하지 않았던 결혼생활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록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말러의 음악에 관한 견해도 그녀의 견해대로 해석하고 수정했다. 베티나 폰 아르님이 ‘불멸’을 탐하느라 베토벤의 편지를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는 것처럼 알마 역시 위대한 무엇을 탐했기 때문에 말러에 관한 일들을 조작하거나 수정했으리라.

말러보다 50년이나 더 살았던 알마는 말러에 관한 모든 권한과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결국 말러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말러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Alma Problem’을 해결할 모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폴리드라마 ‘알마’

젊은 날의 헤밍웨이와 무척 닮은 이스라엘의 극작가 조슈아 소볼. 소르본느에서 철학을 공부한 이 극작가는 1995년부터 빈 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96년 그는 흥미로운 폴리드라마 〈알마(Alma)〉를 빈 페스티벌에 선보였다. 알마의 생애를 ‘말러의 아내’, ‘그로피우스의 아내’, 그리고 ‘베르펠의 아내’였던 시절로 나누어 공연한 이 작품은 기존의 공연과 다른 점이 있었다. 빈에서는 유겐트 요양소가 공연장으로 등장했는데, 관객들은 여러 층에 마련된 무대로 이동하며 공연을 관람해야 했다. 말러와의 삶을 관람한 뒤엔 1900년대 빈의 음식과 와인이 차려진 테이블 앞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다음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이 작품은 빈에서 무려 여섯 시즌에 걸쳐 140회가 공연되었고, 그 후에는 베니스, 리스본, 로스앤젤레스, 베를린, 그리고 알마의 여름별장이 있던 젬머링에서 공연되었다. 공연된 장소는 모두 알마가 살았던 곳, 이른바 ‘알마 코스’였다. 관객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공연을 자유롭게 관람한 뒤 알마의 생애를 퍼즐을 맞추듯 맞추어 가야 했다. 이리저리 이동하며 알마의 생애를 관람한 관객은 그녀의 삶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녀의 다채로운 삶과 그녀가 겪은 다채로운 시대를, 그리고 그녀가 겪은 다채로운 사람과 다채로운 예술을.

알마 말러 vs 루 살로메

알마의 남자들은 특이하게도 서로를 도와주었다. 말러가 클림트를 도와 ‘베토벤 프리즈’ 전시에서 연주했고, 코코슈카는 알마의 첫사랑 클림트의 도움으로 미술계에서 인정받았다. 그로피우스는 베르펠을 위험에서 구해주었고, 알마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홀른슈타이어 신부는 그로피우스와 알마 사이의 딸 마농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 미사를 집전했으며, 베르펠과 알마가 빈을 떠나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때 알마의 연인이었던 쳄린스키 역시 말러의 공연에 도움을 주었고 베르펠이 미국에서 저명한 작가로 알려지는 데 기여했다. 그들은 알마라는 악연으로 묶였지만 서로의 예술적 재능을 존중했고, 서로를 도왔다.

루 살로메를 사랑한 사람들이 서로 등을 돌리거나 파멸에 이른 것과 달리 알마를 사랑한 남자들은 마음의 상처는 입었을지언정 파멸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서로 등 돌리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두 여인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20여 년의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루와 알마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고, 당대 최고의 지성과 미모를 갖춘 여인들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루는 자신을 찾기 위해 고독한 시간을 필요로 했고, 알마는 굳이 자신을 알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아닐까? 루는 고고하고 아름다운 지성을 갖추고 있었고, 알마는 화려하고 드러나기 좋아하는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남자를 사랑할 때 루는 결코 자신을 잃는 법이 없었지만 알마는 기꺼이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 알마에게는 결핍이라든가 고독이 어울리지 않았다. 화려한 파티장에서 매력적인 여주인공 노릇을 하는 여배우 같은 삶이 그녀에게는 어울렸다. 남자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주는 법이 없었던 루가 남자들을 고통 속에 파멸시켰다면, 알마는 남자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었다가 상처를 준 뒤 거둬들이곤 했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긴 했지만, 알마를 잃었다고 해서 죽음에 이를 것까지는 없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여인, 같은 듯 아주 다른 행로가 흥미롭다. 그녀들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남겨졌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조슈아 소볼이 폴리드라마 〈알마〉를 남긴 것처럼 작곡자이자 지휘자 주제페 시노폴리는 루 살로메를 모델로 한 〈살로메〉라는 오페라를 남겼다.

내 아버지의 정원을 떠나며···

알마가 남긴 가곡 〈내 아버지의 정원에서〉는 알마의 인생을 상징하는 제목으로도 가장 어울린다. 만약 그녀가 말러처럼 프로이트를 만나 상담을 받았다면 평생을 지배하던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좀 자유로워졌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두고 알마는, 남편도 아니고 아이들도 아닌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표현했다. 그녀의 삶에 드리워진 아버지의 그림자를 짐작할 수 있는 증언이다.

거인이 떠난 정원에서 거인의 그림자를 껴안고 보낸 한평생. 알마는 타고난 재능도 많았고, 품은 욕망도 많았고, 위대한 무엇이 되고자 하는 열망도 뜨거웠다. 사생활만으로 폄하되기에는 알마가 20세기 빈의 황금기에 남긴 흔적이 너무 크다.

그것이 우아한 방식이든 혹은 경박한 방식이든, 알마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은 예술과 사랑을, 세기말과 새로운 시대를, 고독과 본능을, 예술가와 대중을, 상처와 열망을 씨줄과 날줄로 분주히 엮으며 예술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참고문헌

  • 김문경, 《구스타프 말러 1; 방랑과 뿔피리》, 밀물, 2005
  • 김문경, 《구스타프 말러 2: 황금시대》, 밀물, 2005
  • 김문경, 《구스타프 말러 3; 대지의 노래》, 밀물, 2007
  • 이준석,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 이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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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히팅, 하요, 윤희수, 《어떻게 이해할까? 바우하우스》, 미술문화, 2007
  • 레브레히트, 노먼, 이석호, 《왜 말러인가?》, 모요사, 2010
  • 존슨, 스티븐, 임선근, 《말러, 그 삶과 음악》, 포토넷, 2011
  • 히키, 엘리자베스, 송은주, 《클림트》, 예담, 2006
  • Keegan, Susanne, The Bride of the Wind, Viking, 1991

김미라 집필자 소개

‘세상의 모든 음악’을 집필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방송작가. 지은 책으로는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오늘의 오프닝》, 《세상에 빛나지 않는 별은 없어》, 《위로》, 《나를 격려..펼쳐보기

출처

예술가의 지도
예술가의 지도 | 저자김미라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예술가들은 서로 영향을 받는다. 같은 시대 예술가들은 물론이고,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장소, 다른 공간에서도 예술가들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7명의 생애를 중..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