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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아내 김현경은 1960년 8월 김수영이 쓴 시 ‘가다오 나가다오’를 낭송해보라고 했다.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우리나라에 한 번이라도 와봤나요. 줄 딱 그은 후 나라를 동강냈습니다. 현재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너희들 미국인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詩 ‘가다오 나가다오’에서
35℃ 폭염 속에서 김현경이 끓여낸 닭죽.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刹那)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현경은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정지용 시인에게 시경(詩經)을 배우며 프랑스와 일본 전위파 문학에 심취했다.
“더는 내 기억 속에 늙지 않은 당신.
기억 속에서 당신은 48세 모습으로 정지해 있는데 저는 서재 유품을 피붙이처럼 안고 15번 이사를 거듭하면서 이렇게 지독한 사랑의 화살을 꽂고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쓰던 테이블, 하이데거 전집, 손때 묻은 사전과 손거울까지….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 중입니다.”
컬렉터로 활동하는 김현경의 자택에는 미술작품이 가득하다.
김현경과 김수영은 1942년 문학을 논하는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1949년 동거를 시작해 1950년 결혼했다.
두 번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
1968년 김수영이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統覺)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위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자비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1960년 김수영 시인 동생 김수환의 결혼식에 참석한 김수영, 김현경 부부(뒷줄 의자). 앞에 앉은 사람은 시인의 어머니 안형순.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다리아가 움직이지 않게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무성하는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돌아오는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
“책상머리에서 글만 썼지 기운을 못 내는 사람이었어요.
곡괭이질, 고물개질(고무래질의 방언) 할 기술도 없었고요. 노동이 아니라 취미로 농사일을 했죠. 식물의 무성함을 들여다보면서 나에게도 기운을 달라고 외친 겁니다.”
김수영(1921~1968)은 전위와 저항의 시(詩)정신을 펼쳤다.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石鏡)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김현경은 6·25전쟁 때 부산에서 영문학자 이모 씨와 동거했다. 김수영이 부산에 나타나 돌아가자고 했으나 재결합한 때는 2년이 지나서다. 김수영은 면도와 이발을 정갈하게 한 후 돌아온 아내를 맞았다.
남편 생사를 모르는 전쟁 와중에 김현경이 한 선택은 비난받을 일만은 아닐 것이다.
아파트 발코니에서 숲이 내려다보인다. 김현경은 이곳에서 책을 읽을 때 행복하다고 했다.
부부를 닮은 미술 작품 앞에 선 김현경.
“핵, 사드 같은 것들 탓에 나라가 난리잖아요. 한국은 산자수명한 선비의 나라예요. 일본처럼 칼싸움하는 무사도가 없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4·19혁명 이후 물 만난 고기처럼 시를 짓습니다.
그때 쓴 ‘가다오 나가다오’를 읽으면서 38선 그은 것을 찬찬히 생각해봤습니다.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우리나라에 한 번이라도 와봤나요. 줄 딱 그은 후 나라를 동강냈습니다.
적대시하고 두들겨 패는 비극이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현재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 같기도 한 것이니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과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4월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잿님이 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일년 열두 달 쉬는 법이 없는
걸찍한 강변밭 같기도 할 것이니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
오이, 호박의 손자며느리 값도 안 되게
헐값으로 넘겨버려 울화가 치받쳐서
고요해진 명수 할버이의
잿물거리는 눈이
비둘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동안에
나쁜 말은 안하니
가다오 가다오
가다오 가다오
명수 할버이
잿님이 할아버지
경복이 할아버지
두붓집 할아버지는
너희들이 피지 섬을 침략했을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들은 아직 젖도 떨어지기 전이었다니까
명수 할버이가 불쌍하지 않으냐
잿님이 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두붓집 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가다오 가다오
그가 모르는 동안에
조용히 가다오 나가다오
서푼어치 값도 안되는 미·소인은
초콜렛, 커피, 페치코트, 군복, 수류탄
따발총…을 가지고
적막이 오듯이
적막이 오듯이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
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도드라진 김수영의 시다.
명수할버이, 잿님이할아버지, 두붓집할아버지, 경복이할아버지는 이웃에 산 이들이다.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 호박씨, 배추씨, 무씨, 시금치씨, 파씨 뿌리는 이들에게 미국인과 소련인은 똑같은 놈일 뿐이다. 자유주의자의 시선에서 남·북은 동일하게 갇혀 있다.
김수영은 이념, 민족, 통일보다 자유, 사랑, 개인을 앞세운다. 자유에는 방종이 없으며, 사랑은 자유의 동의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시여, 침을 뱉어라’ 중)이라고 일갈한 김수영의 시는 시대마다 다르게 호출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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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빛이 곱고 강물이 맑다
산의 초목이 자줏빛으로 선명하고 물은 깨끗하다는 뜻으로, 경치가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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