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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노장의 생사관을 통해 본 한국민요 고찰

Bawoo 2017. 11. 21.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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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의 생사관을 통해 본 한국민요 고찰

 

하 영 택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이 영 철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들어가는 말
Ⅱ. 노자의 생사관
Ⅲ. 장자의 생사관
Ⅳ. 노장의 생사관 전개와 한국민요
  1. 노장의 생사관 전개
  2. 노장의 생사관과 한국민요
Ⅴ. 맺음말

 

 

<논문 요약>

 

본고는 노장의 생사관을 고찰하여 민요에 수용되어 있는 한국인의 생사관을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한국 민요의 주제 중 생사는 사실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노장의 생사관 역시 많은 곳에서 주요 테마로 곧장 활용되는데, 그 빈도와 역할에서 유가의 생사관을 훨씬 넘어선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에 대한 비애와 공포를 문학적으로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대자연 속에 귀의하여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는 노장의 정통적인 생사관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한국의 민요를 ‘불사지향형(不死志向形)’과 ‘생사탈속형(生死脫俗形)’이란 두 개의 패러다임을 기준으로 다양한 실례를 들어 고찰하였다.

노장의 생사관은 노자의 ‘사이불망(死而不亡)’과 장자의 ‘사생일체(死生一體)’로 집약할 수 있다. 이 것은 ‘사이불후(死而不朽)’를 추구하는 유가의 입장과는 차이를 나타낸다.
즉, 유가는 기멸론(氣滅論)과 이불멸론(理不滅論)을 주장하는데 반해 노장은 기불멸론만 주장하는 차이는 있으나 노장과 유가의 생사관이 육체의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정신적인 영원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상통
하는 점이 있다. 만약 죽은 뒤 다시 태어남을 강조하는 불교와 기독교의 생사관을 ‘사후신생(死後新生)’이라 한다면, 유가와 노장의 생사관은 모두 ‘사이불망’ 또는 ‘사이불후’형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섭생을 잘하는 자’와 장자가 추구했던 ‘지인(至人)’의 ‘생사를 초월하는 형상’은 정신적 측면을 설명하기 위한 신화적 비유였지만, 도교에서는 이를 육체적인 측면으로 생각하여 여러 가지로 죽지 않는 법들을 탐구했다. 다시 말해서 노자의 생사관은 ‘불사지향형’으로 변형되는데 반하여, 노장의 생사관을 준수하는 ‘생사탈속형’ 유형은 산수자연을 도의 구현체로 보고 그곳으로 귀의하여 노니는 것으로 전개된다. 후자를 노장의 정통적인 생사관으로 부른다면, 전자를 노장의 생사관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노장의 입장에서 한국민요에 나타난 생사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제어: 생사관, 사이불망, 사생일체, 노자, 장자.

 

 

Ⅰ. 들어가는 말

 

살아있는 것이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죽음이 있게 마련이고, 이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필연이요 숙명이다.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존재가 소멸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한 개인의 죽음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구조에 크거나 작거나 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그러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1)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지만, 필연적인 죽음 앞에서는 초라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기서 주저함이 없이 죽음을 능동적으로 이해하려 하며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이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어떠한 종교나 철학일지라도 죽음 또는 생사를 핵심 과제로 삼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유가와 더불어 중국 전통 사상을 지탱하는 노장 역시 생사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노장의 생사관을 고찰하여 우리민요에 수용되어 있는 한국인의 생사관을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한국 민요의 주제 중 생사는 사실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노장의 생사관 역시 많은 곳에서 주요 테마로 곧장 활용되는데, 그 빈도와 역할에서 유가적 생사관을 훨씬 넘어선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에 대한 비애와 공포를 문학적으로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대자연 속에 귀의하여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는 노장의 정통적인 생사관이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우선 노장의 생사관의 형성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한국의 민요를 노장의 생사관인 ‘불사지향형(不死指向形)’ 과 ‘생사탈속형(生死脫俗形)’이란 두 개의 패러다임을 기준으로 다양한 실례를 들어 노장의 생사관이 한국민요에 어떻게 수용ㆍ변화되어 표현되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1) 허용무, 진도지방의 장례와 장례놀이를 통해본 생사관, 한국다큐멘터리사진학회, 2004. 참고.

 

 

Ⅱ. 노자의 생사관

 

여러 제자백가의 책과 견주어볼 때『도덕경』이라고도 하는『노자』2)는 분량이 매우 적은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노자 한 사람만의 작품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수정 보완하여 완성된 것이라고 보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 속에 흐르는 사상과 철학은 일관성이 있어 노자의 대표적 주장이라 할 만한 깊은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 중에도 간략한 말로 생사의 이치에 대해서 공자나 맹자에 비해 심오한 견해를 나타낸 점이다.

공자가 삶을 중시하고 가능한 한 죽음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3) 반해, 노자는 삶도 중시하지만, 죽음을 여러 차례 말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는 생사에 관해 ‘나오는 것이 삶이요, 드는 것은 죽음이다.’4)라고 표현했다. 또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老子』의 경우 수많은 판본과 해설이 있다. 본고에서는 陈鼓应,『老子注译及评介』원문을 참고했음.
3)『論语· 先进』, “未知生, 焉知死?”
4)『老子50』, 出生入死. 生之徒十有叁, 死之徒十有叁, 人之生, 动之死地, 亦十有叁.

 

 

"텅 빔의 극에 이르러 고요함의 돈독함이 지켜지는 곳에서 만물이 함께 생겨난다, 나는(그것으로써) 그것들이 뿌리로 돌아감을 보리라. 대저 만물이 무성하되, 낱낱이 그 뿌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라.

뿌리로 돌아가니 정이라 하고, 이를 일러 복명이라 한다네. 복명을 상이라 하고, 상을 아는 것을 명이라 한다네.5)"

5)『老子16』, 致虚极守静笃, 萬物竝作, 吾以观其復. 夫物芸芸, 各復归其根. 归根曰静, 是谓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되돌아감은 도의 움직임이요, 부드러움은 도의 작용이라네.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네.6)"

6)『老子40』, 反者道之动, 弱者道之用. 天下萬物生于有, 有生于無.

 

『노자』 16장에서 ‘물은 자라다가 결국 근원인 뿌리로 돌아간다’ 했는데 이것은 ‘入’을 말하는 것이요 동시에 ‘死’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40장에서 ‘든 존재는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 말은 곧 출, 즉 생과 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되돌아가는 곳은 뿌리라고 했고 그것은 결국 ‘사’를 의미한다고 했다.

 ‘약(弱)’은 부드럽고 약한 것이다. 도의 작용은 결국 부드러움을 가리킨다. ‘약하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7)는 것은 도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이 순환적으로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16장을 유무의 관점에서 다시 설명하면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데 1장에 의하면, 유와 무는 도의 양면이므로8), 결국 인간을 포함하는 삼라만상은 도에서 출하면 ‘생’이요, 도에 입하면 ‘사’인 것이다. 노자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의 삶과 죽음은 도의 운행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인간은 도를 이해하고 도에 부합되도록 항상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섭생이라 이름하고 있다.


사람의 수명은 누구나 한정이 되어 있다. 그러나 생사는 일정하지가 않는데, 이는 삼라만상이 모두 동일한 조건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래 사는 사람 짧게 사는 사람 이것은 섭생에 의해 수명을 지속할 수 있다고 노자는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비명횡사하는 사람이나 자기 생명을 잘못 관리하여 단축시키는 사람도 있고 보면 그것은 섭생을 잘못한 결과나 생의 단속을 잘못한 탓이다.9)

반면 섭생을 잘하는 자는 설사 수명이 짧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외부적 위험에도 죽지 않고 장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신 수양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는 “마음을 텅 비게 하고 무위의 고요함을 굳세게 지켜야 한다.”10)고 결론지어 말하고 있다.

 

7)『老子78』, 弱之胜强, 柔之胜刚.
8)『老子1』, 無名, 天地之始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观其妙常有欲以观其徼. 此兩者, 同出而异名, 同谓之玄.
9) 예컨대, 옛 제왕들이 과다한 영양섭취나, 약물남용, 방중술 등으로 短命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Ⅲ. 장자의 생사관

 

장자는 기본적으로 노자의 생사관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장자의 생사관은 노자와 다르고, 오히려 공맹에 가까우며 전형적인 ‘숙명론’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11), 이는 잘못이다.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구절을 우선 살펴보자.

 

"죽음과 삶은 운명이다. 밤과 낮이 일정하게 바뀌는 것은 하늘의 법칙이다. 이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존재함은 만물의 실정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로 여기고 사랑한다. 그러니 그보다 뛰어난 천명에 대해서야 어떠하겠는가. 또한 사람들은 군주를 자기보다 탁월한 존재로 여기고 그를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 그러니 그보다 참되고 위대한 천명에 대해서야 어떠하겠는가!12)"

 

전후 문맥을 볼 때, ‘죽음과 삶은 운명이다. 밤과 낮이 일정하게 바뀌는 것은 하늘의 법칙이다.’는 것은 사람의 삶과 죽음은 밤과 낮이 규칙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인간의 삶과 죽음도 하늘의 뜻이므로 인간으로서는 불가항거라는 말이다. 장자가 사행을 명으로 보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는 유가에서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있다.’13)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유가에서는 죽음과 삶을 세상사의 변화이며 운명의 흐름이라 하며14) 의지를 갖는 천, 명을 절대권위로서 인정하고 있지만15), 노장은 천과 신을 도 아래로 인식하기 때문이다.16) 윗글에서 명과 천이 동일한 층위에 속한다고 한다면, 노장의 도는 그러한 천, 명의 위에 위치하는 상위 개념인 우주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의 생사관을 노자와 달리하는 숙명론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조화, 즉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죽은 뒤 무엇이 되느냐는 것도 역시 조화에 달린 것이지 인간이 선택할 사항은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부딪치게 마련인데 여기서 절대자에 의한 구원을 바라는 신앙이 성립된 셈이다. 하지만 장자는 우리가 삶을 사랑하듯이 죽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사존망은 천지신명의 권능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 의지가 끼어 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에 의한 구원의 길을 찾지는 않았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하나의 원리로서 파악한 장자는 우리에게 체념의 철학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 없는 세계에서도 인간은 방황하지 않고 늘 넉넉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 존엄의 근거를 이런 점에 두고 있다.


여기 비유는 사실 구체적인 삶과 죽음이 무엇이냐를 정확히 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편 「지북유」를 보면 삶과 죽음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사람의 삶은 기의 모임이다, 기가 모이면 삶이요, 흩어지면 죽음이다.’17)

『장자』는 내편과 외편 그리고 잡편으로 분류되는데, 대체로 내편은 장자 본인이 지은 것이고, 외편과 잡편은 후인이 가탁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위 정의를 장자가 한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장자』 내편에서도 기가 주요한 개념으로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18), 장자의 인식을 대체로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잘못은 아니다.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더욱 두려하는지도 모른다. 장자는 역설이나 일화를 빌어 죽음이 오히려 삶보다 즐거울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제물론」에서 시집가기 전, 여의 미인 희는 친정을 떠나가길 싫어했지만, 진으로 시집가서는 친정보다 훨씬 행복하여, 하루 빨리 시집오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였다.19) 여기서 친정은 삶을, 시집은 죽음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의 이러한 생사관은 훗날 아내가 죽자 다리를 떡 벌리고 악기를 치며 즐겁게 노래했다20)는 일화로 발전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죽음과 삶을 동일하게 보라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점이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장자의 생사관은, ‘사생존망지일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21)

 

10)『老子16』, 致虚极, 守静笃, 萬物竝作吾以观復.
11) 冯沪祥, 『中西生死哲学』, p.183. 191. 참조.
12)『莊子·大宗师』, 死生, 命也, 其有夜旦之常, 天也. 人之有所不得与, 皆物之情也. 彼特以天为父, 而身犹爱之, 而况其卓乎! 人特以有君为愈乎己, 而身犹死之, 而况其眞乎! 『莊子』역시 매우 많은 판본과 해설이 있다. 본고에서는 원문은 张耿光역주,『莊子全译』을 따르되, 번역은 이를 참고만 하기로 한다. 이하 편명만 밝힘.
13)『論语·顔渊』, 死生有命, 富贵在天.
14) 『莊子·德充符』, 死生存亡…是事之变命之行也.

15) 예컨대, 다음 孔子의 발언에서 그가 ‘天’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学而上达. 知我者其天乎!” 『論语·宪问』, “子曰, ‘不然, 获罪于天, 無所祷也.’” 論语·八佾. 이외 孔孟의 生死观에 관한 자세한 것은 이수진, 양회석의 「孔孟의 생사관과 그 문학적 수용」(『中国人文科学』40집) 참조.
16) 예컨대, 老子는 25장에서 “‘有物混成, 先天地生,… 天法道.’라 하여 道의 존재는 天地의 탄생보다 앞서고, 하늘은 道를 본받는다.” 하고, 60장에서는 “‘以道莅天下, … 其神不伤人’라 하여 天地神明도 道를 어기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17)『莊子·知北遊』, 人之生氣之聚也聚則爲生散則爲死.

18) 공자의 입을 빌어 ‘心斋’를 설명하고 있는 다음 대목에서 ‘氣’가 만물의 핵심요소임이 시사되고 있다.

“若一志, 無听之以耳而听之以心, 無听之以心而听之以气! 耳止于听, 心止于符. 气也者, 虚而待物者也. 唯道集虚. 虚者, 心斋也.” 『莊子·人间世』.
19)『莊子·齐物』, 予惡乎知说生之非惑邪, 予惡乎知惡死之非弱丧而不知归者邪, 丽之姬, 艾封人之子也, 晋国之始得之也, 涕泣沾襟, 及其至于王所, 与王同筐牀, 食刍豢, 而后悔其泣也, 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蕲生乎!
20)『莊子·至樂』, 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则方箕踞鼓盆而歌. 惠子曰, 与人居, 长者.老.身死, 不哭, 亦足矣, 又鼓盆而歌, 不亦甚乎!
21)『莊子․大宗师』, 孰能以無为首, 以生为嵴, 以死为尻, 孰知死生存亡之一體者, 吾與之友矣.

 

 

Ⅳ. 노장의 생사관 전개와 한국민요

 

1. 노장의 생사관 전개

 

생명의 시한을 초월하여 모종의 ‘영원’을 꿈꾼다는 점에서 노장의 생사관도 유가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다만 유가가 구체적인 실행, 즉 입덕, 입공, 입언 등을 통하여 ‘사이불후’를 추구한다면, 도가는 허정『노자』, 심재와 좌망『장자』의 정신적 수양을 통해서 도와 합일하여 사이불망을 달성한다고 인식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22)


노장의 생사관은 크게 두 유형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도의 상징인 산수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사를 초월한 경지를 육체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불노장생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실 요즘 말하는 ‘자연’은 노장이 말하는 ‘자연’과 다르다. ‘무위자연’의 ‘자연’은 물리적 현상계가 아니라 도의 본질적 속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산수자연 자체가 인위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 것이어서, 인간세계에 비하자면 도에 당연히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자적하는 것은 도와 합일하여 ‘사해의 밖에서 노니는 것’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노장은 ‘장생’을 주창하였지 ‘영생’을 제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사이불망’을 추구하였으나, 노장이 중시하는 것은 정신적인 초월이지, 인간이 생리적으로 사망을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23) 그러나 훗날 도교에서는 신선사상에 근간을 두고 육신의 불사를 추구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예컨대 도교의 핵심적인 학자인 갈홍은 불사적인 존재를 확신하며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불사를 이루는 방법을 크게 양신(养神)과 양형(养形)으로 나누고, 다시 양형으로 복약 · 호흡수련 · 방중술 등을 들고 있다.24) 양신의 경우,『포박자』에는 수진일법(守眞一法)과 수현일법(守玄一法)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중 전자의 일부를 보자.

 

"하나를 지키고 참됨을 간직하면 신령과 통할 수 있게 된다. 욕망을 줄이고 음식을 덜면, 하나가 머물러 쉬게 된다. 퍼런 칼날이 목에 임해도, 하나를 생각하면 살 수 있다. ‘하나’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고 어려움은 끝까지 지키는 데 있다. 그것을 지켜 잃지 않으면 무궁할 수 있다. 뭍에서는 사나운 짐승을 물리치고, 물에서는 교룡을 내치게 된다. 허깨비나 독충을 무서워하지 않고, 귀신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며, 칼날도 감히 찌르지 못한다. 이것이 ‘참된 하나의 대략이다.25)"

 

『논어』와 『맹자』에는 글자 진(眞)의 용례가 없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참됨은 노장 특유의 용어이다. 또 하나는 노자가 도의 별칭으로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다. 뿐만 아니라 뭍의 맹수와 물의 교룡을 물리치고, 허깨비와 독충을 두려워하지 않고, 귀신도 접근하지 못하며, 칼날도 감히 찌르지 못하는 ‘참됨 하나를 지키는 사람’의 신비한 형상은 노자의 섭생을 잘하는 자나 장자의 지인을 고스란히 닮았다. 그래서 위 기록은 특히 노자의 인식과 매우 흡사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니, 노장의 경우는 정신적 초월성과 항구성을 비유하는 것이라면, 갈홍의 경우는 육체적 초월성과 영구성을 신앙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노자의 ‘사이불망’과 장자의 ‘생사일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장의 생사관은 훗날 크게 두 유형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산수자연을 도의 구현체로 보고 그곳으로 귀의하여 노니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생리적인 불로장생이 실존하는 것으로 보고 신선의 세계를 지향하는 유형이다. 전자는 현세에 초연하고, 후자는 불사와 영생을 추구한다. 본고에서는 이것들을 노장의 생사관이라 통칭하기로 하고, 도가 생사관의 정통인 전자를 ‘현세초월형’, 그 변질된 후자를 ‘불사지향형’으로 부르기로 한다.

 

22) 郑小江주편, 『中国死亡文化大观』, p.10. 또 孔孟의 生死观에 대한 자세한 것은 이수진, 양회석의 「孔孟의 생사관과 그 문학적 수용」참조. 어떤 이는 유가의 ‘死而不朽’를 死而不亡으로 표현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이수진, 양회석의 논리를 따르도록 한다.
23) 郑小江주편, 『中国死亡文化大观』p.37.
24) 정재서, 『不死의 신화와 사상』, pp.43-62. 참고.

25)『抱樸子·內篇』卷18, 「地眞」, 守一存眞, 乃能通神. 少欲約食, 一乃留息. 白刃臨頸, 思一得生. 知一不難, 難在于終. 守之不失, 可以無窮. 陸闢惡獸, 水.蛟龍. 不畏..挾毒之蟲. 鬼不敢近, 刃不敢中. 此眞一之大略也.

 


2. 노장의 생사관과 한국민요

 

민요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부터 있어왔고, 많은 설화나 민담과 함께 발전되어 왔다. 민요가 시대의 반영이요, 민중의식의 외현(外现)이라면, 사회 문화 현상으로서의 노장사상이 민요에 혼융되어 있는 것은 당위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더구나 한국 민족은 산악신앙이나 신선사상을 자고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추상해 볼 때26) 당시의 풍토 속에서 발생한 민요에 이런 사상이 스며있는 것이다.


그런데 민요에는 이 노장사상이 2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피세적 탈속형이고, 또 하나는 불사지향형이 그것이다. 그런데 후자는 생사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에 맡겨 사는 무위를 주장하면서도 죽음 뒤에 찾아오는 온갖 환생을 시도하는 일이 있는데 이를 증험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특수한 방법을 구사하는 일도 있으니 적선입공을 주장하거나27) 선계를 지향하는 일이다.28) 반면 전자는 차분하고 초연한 자세로 운림산수에 심신을 맡겨 양회유락(養晦遊樂)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26) 车柱環, 『한국의 도교사상』, (동화출판사, 1986, 중판), p.33 : 李能和, 朝鲜道敎史5장 : 李鐘殷, 「韩国小说上의 道敎思想」, p.19.
27) 葛洪, 抱朴子內篇卷之一第6 微冀也篇,  慾求立生者, 必欲積善之功, 慈心於物, 恕己及人仁逮昆昆蟲, 樂人之吉, 愍人之苦, 救人之窮, 手不傷生, 口不勸弱, 見人之得, 如己之得, 見人之失, 如己之失, 不自己, 不自譽, 不嫉妬己, 不嫉謟陰賊如此, 乃爲有德于天, 所作必成, 求仙可旨旨.
28) 周紹賢, 『道家與神仙』, 自序, 神仙生活, 確實有之, 並非空想, 人患不求耳, 慾求神仙生活, 必先了, 解精神生活, 始肯酖酒而飮甘露, (台灣: 中華書局, 1976).

 

 

1) 생사탈속형

 

‘탈속의 양상에는 은둔과 은일 두 가지가 있다. 은일은 도회(韜晦)가 아니라 세사를 초탈, 불구문달하며 스스로 고답을 추구하려는 것이요, 은둔은 사회 현실이 자기의 이상과 부합되지 않고 현 사회에서는 수용되지 못할 경우 체념하고 도피하여 은신처에 안주하려는 것이다.

즉 은일은 속세를 멀리 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도에 잠심하기 위한 것이며, 은둔은 공명에 투신하고 있던 유자(儒者)가 정치의 와중에서 이탈되었을 때 몸을 감추는 것으로 시기의 전이에 따라 다시 입신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도가에서는 초세의 태를 취하기 때문에 고답미를 풍기고 이것은 초세의 은일을 낳게 한다.29)

도피처는 강호나 산림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경지가 이미 탁월하여 외계의 번우(煩擾)에도 불구하고 능히 마음속에 누릴 수 있으며 외계의 어떠한 곳에라도 구애가 없다면 市井도 도피처가 될 수 있고, 도처에 평온을 이룰 수 있으니 이른 바 대은(大隐)의 경지가 이것이다.30)


따라서 그들은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이나 경계를 갖지 않으려 애썼으며 이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자연과 합일하여 유락하기도 했고 양형이나 양신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 그리하여 도에 몸을 맡기고 세상일을 벗어남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을 일상으로 여긴 일이 많았던 것이다.31)

 

(요1)
어지러운 사바세계
의지할 곳 바이없어
모든미련 다떨치고
산간벽질 찾아가서
두견접동 벗이되어
깊은밤을 세워볼까32)

 

(요2)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더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지33)

 

안분지족적인 정취를 나타내는 자연과의 합일이요 자연을 즐기는 풍모이다. 노동에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산거하면서 팔을 베고 잠을 청하는 초부일 수도 있고 물외한인으로 산수를 즐기는 유선일 수도 있다. 모두 다 자연에 귀의한 지선의 경지이다. 장자는 사물과 나를 회통시키는 순수체험의 경계를 ‘물화(物化)’34)라 칭했다.


인간은 환상적으로 선망하는 이상적 모습 중의 하나가 신선이다. 장자가 말하는 지인이나 진인이다. 어쩌면 이는 꿈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몽상적 존재일지 모르고 장자의 시대에는 너무 사회가 참혹했으므로 이를 피하는 피세나 굴절된 환생을 도입하여 위안하고 인간을 구도의 길로 이끌려는 선각자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는 어떠한 일에도 구애받지 않고, 무한한 자유자재의 삶을 누린다. 그러므로 신선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신선이 있는 곳은 곧 완벽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신선의 내적 의미는 유교의 성인이나 불교의 부처와 같은 전지 전능한 심상을 지니고 있지만 종교적 색채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그만큼 신선이란 단어는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 정서에 닿아 있다고 하겠다.35)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또 반간은 명월이라
강상은 들릴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36)

 

이는 연거를 읊은 김장생의 시조를 차용하여 민요화한 것이다. 이처럼 창자에게도 산수월석은 시문의 소재가 되었고, 도가적 사상 표출의 대상이 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민요는 이러한 시조나 가사를 원용하여 하석상대로 잡박하게 엮어 노래한 것이 많다. 현대에 불리는 이런 민요일수록 명인의 시조가 많이 혼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민요와 시가의 관계가 농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민요는 원시 종합 예술로서 구비 전승되어 오면서 여러가지 민중의식을 표출하며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가창되어 왔고 사상적 제 측면을 영입시켜 더욱 세련된 노래로 개찬되어 왔으니 현금의 노래에서 우리는 화석화한 도교적 잔영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34)『莊子․知北遊』, 與物化者一不化者也安化安不化安與之相靡必與之莫多.
30) 樸晟義, 「韓國文學背景硏究」, (二友出版社, 1980), p.263.
31)『莊子․大宗師』, 篇相造乎道者無事而生定.
32) 任東權, 『韓國民謠集Ⅲ』, p.405.
33) 任東權,『위의 책Ⅵ』, p.244.
34)『莊子․知北遊』, 與物化者一不化者也安化安不化安與之相靡必與之莫多.

35) 이기현, 「석북시에 나타난 신선사상 연구」, 서천학술발표대회 서천문화원 2006.
36) 任东权,『앞의 책Ⅲ』, p.409.

 

 

2) 불사지향형

 

사람은 나고 죽을 때까지 외부 사물과 접촉하며, 자신의 심신을 괴롭히며 산다. 사람은 생존경쟁에서 위를 차지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신명을 바치기도 하지만, 만족과 안식을 얻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현자는 승패와 이해득실에 연연치 않으며, 오욕 칠정들의 온갖 인간 세사를 운명으로 맞아들인다. 그리하여 생의 모순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고,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다 같이 중시하는데 단순히 생명의 보전을 양형이라고 한다면 정신적인 것은 양신 또는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37)


『장자』에는 양형과 양신이 다 있는데 ‘양형으로 육체를 보양하지 못한다면 세상에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며 육체적 건강법을 말하고 있으며38) 아울러 ‘순수하여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도와 일체가 되고 변함이 없으며, 담백하고 무위이며, 움직일 때는 자연의 운행에 따른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을 보양하는 길’39)이라고 했다.

양형이나 양신은 양생법이지만 양신 즉 정신적 건강에 더욱 마음을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순히 자연을 받아들이고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삶을 사는 길이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한번 사람으로서 형태를 받고 태어났으면, 이를 손상시키지 않고 목숨이 다 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주위의 사물에 얽매어 서로 마찰을 일으키며 삶을 뜀박질 하듯이, 살아 그칠 줄을 모르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평생을 발버둥치면서도 끝내 성공을 보지 못하고, 고달프고 지쳐도 그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니, 참으로 가엾은 일이 아닌가. 비록 남들이 그를 보고 죽지 않았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 몸이 늙어감에 따라 마음도 그와 같아지리니, 이를 어찌 큰 슬픔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40)"

 40)『莊子․齊物論』,

一受其成形, 不化以待盡, 與物相刃相靡, 其行進如馳, 而莫之能止, 不亦悲乎,

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 可不哀邪, 人謂之不死, 奚益,

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인생을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한다는 속담이 있다. 느긋한 삶은 인생을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고 소중한 자기의 명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시집 고향 찾아오니 집이라고 들다 보니
쑥대밭이 되었구나. 시어머니 시아버지
뫼를 찾아 가서 보니 묵뫼가 되어있고
시누에 뫼에는 강살꽃이 피어있고
남편 뫼에 찾아가서 묏두럭에 엎디레서
대성통곡 하다보니 난데없이 천둥하고
소낙비가 쏟아질때 뫼가 떡 갈라질제
묏속에서 신선이 나오더니
그 부인을 둘쳐 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로 올라가서 선녀가 되고 일월선관이 돼 가지고 그래 잘 사르랴)41)


이 노래는 시집살이가 힘들어 가출했다가 다시 시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남편이나 시집 식구가 모두 죽어 남편 뫼에 가서 엎드려 우는 대목이다. 묘에는 꽃들도 피어 있는데 남편 묘가 갈라지더니 신선이 나오고 부인도 그냥 그대로 선녀가 되어 승천했다는 내용이다.

비현실성의 몽환적 설화 같은 내용이지만 여기에는 도교적 색채와 아울러 무속 신앙이나 불교적 사상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가출형 며느리노래>는 유교가 평민에게까지 깊이 뿌리를 내린 조선 후기에 형성되었으며 며느리가 죽지 않고 선녀로 변신한 부분에서는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노래는 유교사상의 이념적인 면과 도교 사상의 초월적인 면이 상호 보완 작용하여 나타나는 것을 통해 민중의 죽음 의식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인간이 죽은 후에 신선이나 선녀로 환생한다는 내용은 유가적 규범을 일탈하여 도가적인 초월에 까지 가는데 이는 유가의 속박에서 벗어나 도가의 자유로운 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이러한 혼재된 신앙들은 그 때의 시대의 흐름이나 종교적 영향을 받아 서로 수용하면서 민간에 침윤되어 이것이 정서적인 민요로 표현되었다고 본다.42)


우휘넘차 우허야슬프다
친구님네 이내말씀 들어보소
우리인생 태어날 때
뉘덕으로 태어났노
칠성님전 복을빌고
성황님전 명을빌고
옥황님전 수를빌고
아버님전 뼈를빌어
우리인생 생겨났네43)


위 민요는 태어날 때 여러 은덕을 입어 이 세상에 나온 것을 소리하고 있다. 칠성님에게 복을 빌어 받고 성왕님과 옥황상제께 목숨을 빌어 받았다는 내용이다. 소리꾼이 소리메기는 일은 전적으로 그들의 지적 감각을 동원하여 실행된다. 이때 감정을 섞어 소리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칠성님이나 옥황상제의 요사44)가 등장하는 것은 도교적이라 할 수 있다. 옥황상제는 시대에 따라 원시천존 태상노군(노자) 등 여러 신으로 불리어 졌는데 인간의 운명이나 행불행이나 좌우하는 절대 신으로 서민들에게 인식되게 되었다.

여기서 도교라 한 것은 도가와 신선 사상이 융합한 종교로서의 함의를 내포한다.45)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신선사상이 전해 내려왔지만 도가와 습합되어 도교 사상과 융합한 점이 특이하고 삼신산 삼신당들은 이에 함의를 뜻한다고 하겠다.


다음은 죽음의식에 관한 것들이다. 도가의 생사에 관한 생각은 사생 일체라는 것이다. 현세를 중시하며 내세를 인정치 않으려 하여 이승의 끈을 놓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맞는 정해진 길이므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저승을 이승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상정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저승은 초월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 곳은 문 밖을 나서면 바로 접할 수 있는 가까운 이웃과 같은 세계이다. 저승은 따로 어느 곳에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은 저승에 대해 아주 희박하거나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니면 아예 저승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삶의 한 부분이므로 언제나 가볍게 실행할 수 있는 인생무대의 한 장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현세에 더 많은 관심과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앞길에 묻히며 뒷길에 쓰러져
흙꽃속에 잔나비 가을바람 모른다
너와 나의 정의는 바다같이 깊은데

네가죽고 내가살면 무삼자미 있으랴
거미줄에 목을매어 죽을까부다
호박잎 고인물에 빠져나 죽을까부다46)


위 요사를 보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창자에게서 느껴지지 않는다.
죽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벼운 퍼포먼스로나 여기는 것일까? 기껏 거미줄에 목매달아 죽든지, 호박의 고인 물에 빠져 죽겠다는 점을 들어서 화자의 죽음 의지가 표현상으로만 볼 때는 굉장히 미약하다.

전혀 죽을 수 없는 방법으로 죽겠다는 표현은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47) 사람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동물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달라 삶의 의의와 가치가 있다면, 개체 생명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종결지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슬퍼해야 한다면, 죽음이 아닌 짧은 삶, 즉 시간이 지나치게 바른 것과, 삶에 대한 가치와 의의를 얻거나 이해한 것이 너무 적은 것을 슬퍼해야 한다는 것이다.48) 마음을 편안하게 자연에 순응한다면 별로 신비스러울 것도, 사람을 질식시키는 공포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49) 이렇다면 생과 사를 크게 차이를 두지 않고 사생일조50)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삶과 같은 이치로 파악하는 유가의 사상이 깊이 일반 민중에까지 침투한 결과인 것이다.51) 하지만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사생일체나 사이불망의 입장에서 보면 훨씬 도가적 생사관이라 할 수 있다.


37) 박선애, 『장자』외․잡편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견해, 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38집, 2004․제4권, p.111.

38) 『莊子․刻意』, 此導引之士. 養形之人… 「達生」, 世之人以爲養形足以存生, 而養形果不足以存生, 則世奚足爲哉.

39)『莊子․刻意』, 純粹而不雜, 靜一而不變, 惔而無爲, 動而以天行, 此養神之道也.

41)『한국민요대전』충북 해설집, MBC, 1995, 115면, 이렇게 신선이 등장하거나(『한국구비문학대계』 1-2, 1980, 285-286) 죽지 않고 선녀로 변신한 노래(『한국구비문학대계』 2-9, 501면), 선녀가 내려와서 사는 노래(『한국구비문학대계』7-2, 한구정신문화연구원, 1980, 453면)는 시집살이 노래에서 집중적으로 나타
난다.

43) 任东权, 『앞의 책Ⅱ』, 요1516.
43) 任东权, 『앞의 책Ⅱ』, 요1516.

44) 谣辞란 민요의 词라는 의미로 쓴말이다. 이에 해당하는 용어로는 歌词, 辞说등이 있다. 그러나 가사는 민요 아닌 노래의 경우에는 해당될 수 있어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사설 역시 노래 따위를 적어 놓은 글이란 의미로 볼 때 같은 혼동을 가져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승현상의 노랫말까지를 포괄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任东权,『한국민간의식요 연구』, 집문당, 1990, p.10.
45) 李鐘殷,『韩国诗歌上의 道敎思想』, 1978. 서울:보성출판사. p.25.

46) 任东权,앞의 책Ⅱ 요1269.
47) 박태상, 「민요에 나타난 한국인의 죽음 의식 및 한(恨)에 대한 고찰」, 『한국문학과 죽음』, 문학과 지성사, 1998, p.299.
48) 이택후, 권호 역, 『화하미학』, 동문선, 1990, pp.80-81.
49) 하현명, 현채련․리길산 역,『죽음 앞에서 곡한 공자와 노래한 장자』, 예문서원, 1999, p.89.
50)『莊子․德充符』. 死生爲一條
51) 박선애, 「한국 민요에 나타난 죽음 의식 연구」, 『반교어문연구』23권, 반교어문학회, 2007, p.282. 

 

 

Ⅴ. 맺음말


필자는 “노장과 유가의 생사관은 육체의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정신적인 영원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유가는 氣滅論과 理不滅論을 주장함에 비하여 노장을 기불멸론만을 주장하여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두학파가 정신적인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이 동일하다는 사유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유가의 理와 노장의 氣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이 논문의 가장 결정적인 오류 부분이다.

아울러 유가가 사이불후를 주장하는 것에는 죽은 자의 도덕성과 인품 등 살아있을 때의 윤리성이 항상 관계가 되어 있다. 노장은 이런 점이 없다. 이같은 유가와 노장의 차이점에 유의하여 논지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민요를 노장의 생사관인 ‘불사지향형’과 ‘생사탈속형’이란 두개의 패러다임을 기준으로 다양한 실례를 들어 노장의 생사관이 한국민요에 어떻게 수용․변화되어 표현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노장의 생사관은 노자의 사이불망, 장자의 사생일체로 요약되어 진다. 이러한 입장은 노장의 기(氣)과 유가의 이(理), 즉 죽음보다 삶에 초점을 맞춰 사회적 도덕적 가치를 확립함으로써 사이불후를 추구하는 유가의 입장과 크게 구별된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인정하면서도 정신적인 영원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다.52) 만약 죽은 뒤 다시 태어남을 강조하는 불교와 기독교의 생사관을 ‘사후신생(死後新生)’이라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유가와 노장의 생사관은 모두 사이불후 형과 사이불망형으로 구별할 수 있다. 노자의 섭생을 잘하는 자와 장자의 지인의 생사를 초월하는 신비한 형상은 정신적 측면을 설명하기 위한 신화적 비유
였는데, 도교에서는 이를 육체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각종 불사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여기에서 노자의 생사관은 불사지향형으로 변질된다. 이와 달리 노장 생사관을 준수하는 생사탈속 형은 산수자연을 도의 구현체로 보고 그곳으로 귀의하여 노니는 것으로 전개된다. 후자를 노장의 정통적인 생사관으로 부른다면, 전자를 노장의 생사관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민요의 주제 중 생사는 사실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노장의 생사관 역시 많은 작품에서 주요 모티프나 주제로 활용되는데, 그 빈도와 역할에서 유가적 생사관을 능가한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에 대한 비애와 공포를 문학적으로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대자연 속에 귀의하여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는 노장의 정통적인 생사관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도가사상의 불사지향형의 영향을 받아 표현된 한국의 민요는 미래 지향적인 삶을 생각하며 부르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정해진 숙명이기 때문에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승의 삶을 더욱 무게 있게 꾸려가려는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명제가 그만큼 크기 때문에 삶의 공간을 끊임없이 영향을 주어 온 명제라는 것을 뜻한다 하겠다. 생사탈속의 영향을 받아 표현된 한국 민요는 자연에 귀의하여 자연유락의 초세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고 아울러 은일이나 허정 등을 노래하거나 무위자연을 표출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승에 집착한 나머지 도가적 양생을 노래한 것도 일부 나타나기도 하나 이는 상류층의 시가적인 가사에 많고 민요 부분에서 찾아보기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52) 유가의 생사관에 관한 논의는, 이수진․양회석의 앞의 글 참조.



☯ 논문접수일.2015.5.15 / 심사개시일: 2015.5.22 / 심사확정일: 20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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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ing on Korea's folk song as seen in the Lao-Zhuang’s view of life and death


 Ha Young-Taek⋅Lee young-cheol(Dongbang Graduate Univ.


This article is supposed to show the consciousness of death in Korean traditional folk songs related with the Taoist’s view of life and death. Korean traditional folk songs can be found life and consciousness of dead mostly. There have been seen many masterpieces for their maintenance Confucians work. Thus, life and death combine with furious love and emotional threat literary. Accordingly, between no regret to die and be free from life and death have been released as both axes of paradigm.

For instance, the primary considerations look into the Taoist’s view of life and death. This has been understood generally as saying between Lao-tzu(death or everlasting) and Zhuang-zi(all in one system of life and death). Slightly different from the Confucian scholar(death or eternal eternity). But also both of them are agree with spiritual eternity simultaneously. What about Buddhism and Christianity? They have in common the eternal cycle of new born apparently. Confucianism and Taoism could say their death or everlasting theory included all in one system of life and death theory as well.

Lao-tzu insists the rule of health and Zhuang-zi images the acme of happiness and comfort in psychological effects to a colloquial myth but the Taoist seems treat as physical operations for various studying.

Even though, Lao-tzu’s view of life and death is toward to ‘No regret to die’ which is a traditional manner. Zhuang-zi’s view of life and death is performed in ‘Be free from life and death’ for driving nature amusements indeed (only the Taoist’s view of life and death).


Key words: View of life and death(생사관), Death or everlasting(死而不亡), All in one system of life and death(生死一體), Lao-tzu(老子) and Zhuang-zi(莊子).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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