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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외교가/ 소설 강화도의 주인공]신헌 [申櫶]

Bawoo 2017. 12. 9. 23:28



1810(순조 10)∼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무신·외교가.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관호(觀浩).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금당(琴堂)·우석(于石). 할아버지는 훈련대장 신홍주(申鴻周)이며, 아버지는 부사 신의직(申義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전형적인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다양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이면서도 독특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 유장(儒將)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또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姜瑋)·박규수(朴珪壽) 등과 폭넓게 교유하여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가질 수가 있었다.


정약용의 민간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켜 『민보집설(民堡輯說)』·『융서촬요(戎書撮要)』 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 자신의 국방론을 집대성시켰다. 김정희로부터 금석학(金石學)·시도(詩道)·서예 등을 배워 현재에는 전하지는 않지만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이라는 금석학 관계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예서(隷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제작에 조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유산필기(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1843년(헌종 9) 전라도우수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이 밖에 농법에도 관심을 가져 『농축회통(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827년(순조 27) 할아버지 홍주의 후광을 업고 별군직(別軍職)에 차출되고, 이듬해 무과에 급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조·헌종·철종·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헌종 때에는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전라우도수군절도사·봉산군수·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녹도(鹿島)에 유배되었다. 1853년 감형되어 무주로 이배되었다가 철종의 배려로 1857년에 풀려났다.


철종대에는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한성부판윤·공조 판서·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다음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그 뒤 어영대장·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 진무사(鎭撫使)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 연해의 요해지인 광성(廣城)·덕진(德津)·초지(草芝) 3진(鎭)에 포대를 구축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운양호(雲揚號)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는 판중추부사로 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의 협상 전말을 『심행일기(沁行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1878년에는 병으로 총융사를 사직하고 한동안 노량진에 있는 은휴정(恩休亭)에서 요양하기도 하였다. 1882년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역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Shufeldt, R. W.)와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참고문헌

  • 『헌종실록(憲宗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일성록(日省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매천야록(梅泉野錄)』
  • 「신헌의 국방론」(박찬식,『역사학보』117, 1988)
  • 「19세기 중엽 조선정부의 개항인식과 강화도조약체결」(강미영, 인하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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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과 개혁파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군사제도 수립에 노력했으며, 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조선 측 대표로 참여했다.
노론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정약용을 사숙하고 김정희 문하에서 실사구시적 학문을 배웠다. 1827년 별군직에 뽑히고 1828년 무과에 급제, 훈련원주부에 임명된 이후 전라도병마절도사, 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한 후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당해 전락도 녹도에 유배되었다가 1857년 풀려난 후 좌승지, 삼도수군통제사, 공조판서, 우포도대장을 지냈다. 고종이 즉위한 후 형조·공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876년 전권대관에 임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했으며,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서양식 근대무기를 수용해 신식무기를 제작했다.


신헌

신헌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실학과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군사제도 수립에 노력했으며, 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조선측 대표로 참여했다. 본관은 평산. 초명은 관호(觀浩). 자는 국빈, 호는 위당(威堂)·금당(琴堂)·동양(東陽)·우석(于石).

아버지는 부사 의직(義直)이다. 노론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정약용(丁若鏞)을 사숙하고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학문을 배웠다. 초의선사(草衣禪師), 강위, 정약용의 장남인 정학연(丁學淵), 박규수 등과 사귀면서 무신임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지식을 겸비했다. 1827년 별군직(別軍職)에 뽑히고, 182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에 임명된 이후 중화부사·전라도우수군절도사·전라도병마절도사·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한 후 권력을 장악한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을 당하여 전라도 녹도(鹿島)에 유배되었다. 1857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좌승지·삼도수군통제사·형조판서·한성부판윤·공조판서·우포도대장을 지냈다. 고종이 즉위한 후 대원군의 신임을 얻어 형조·공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가 되어 강화도를 수비했다. 1876년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구로다[黑田淸隆]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으며, 1882년에도 전권대관의 자격으로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국방책으로 정약용의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하여 민간 자위(自衛)에 입각한 민보방위체제를 주장했고,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서양식 근대무기를 수용하여 수뢰포(水雷砲)와 마반차(磨盤車) 등 신식무기를 제작했다. 저서로 〈민보집설 民堡輯說〉·〈융서촬요 戎書撮要〉·〈금석원류휘집 金石源流彙集〉·〈유산필기 酉山筆記〉·〈농축회통 農畜會通〉·〈심행일기 沈行日記〉 등이 있다.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다음 백과]


[정의]
조선 후기에서 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무신이자 외교가.


[개설]
신헌(申櫶)은 1810년(순조 10) 출생하여 1884년(고종 21) 사망하였다. 근대로의 전환의 상징적 사건인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조선의 대표인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활약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조선 후기 전형적인 무관 가문의 하나인 평산신씨 문중에서 태어나서 실학과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인 군사제도의 수립 및 문물제도의 수용에도 주목할 만한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관호(觀浩),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금당(琴堂)·우석(于石). 할아버지는 훈련대장 신홍주(申鴻周)이며, 아버지는 부사 신의직(申義直)으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무관 가문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신헌은 1827년(순조 27) 할아버지 신홍주의 후광으로 별군직(別軍職)에 뽑혔으며,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순조·헌종·철종·고종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특히 헌종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中和府使)·전라우도수군절도사·봉산군수·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헌종 15)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올랐다. 그러나 이 해 7월에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을 받아,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전라도 녹도(鹿島)에 유배되는 등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다.

1853년(철종 4) 감형되어 무주로 이배되었다가 철종의 배려로 1857년(철종 8)에 풀려났다. 1861년(철종 12) 다시 관로에 올라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형조판서·한성부판윤·공조판서·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의 등극과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판서·병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서 강화의 염창(鹽倉)을 방비하였다.

병인양요가 끝난 뒤에 좌참찬겸훈련대장에 임명되었고, 이양선의 침입에 대비하여 서양의 근대 화포의 원리를 이용한 일종의 시한폭탄형 기뢰(機雷)인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하는 등 신무기 개발에도 힘썼다.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으며, 이후 어영대장(御影大將)·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거쳐 1874년(고종 11) 진무사(鎭撫使)에 임명되었다.

신헌은 신무기 개발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국가 방위 체제 구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1867년(고종 4)에는 국왕의 윤허를 얻어 민보 방위 체제를 구상한 『민보집설(民堡輯說)』을 간행·배포하여 비상시의 대책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의 국방 체제 구축에 대한 이러한 노력은 진무사로 재직시에는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연해의 요충지인 광성진·덕진진·초지진의 3진(鎭)에 포대를 구축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때 서양식 화포인 불랑기(佛狼機)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네 바퀴의 마반차(磨盤車)를 만들기도 하였다.

운양호(雲揚號) 사건 이듬해인 1876년(고종 13)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근대적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1878년에는 병으로 총융사를 사직하고, 한동안 노량진에 있는 은휴정(恩休亭)에서 요양하기도 하였다. 1882년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다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으며,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에 올랐다. 말년에 고향인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신헌은 노론(老論)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당대에 실용적 학문을 추구한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사숙하였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문하에서 다양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이면서도 독특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 유장(儒將), 또는 극곡제자(隙穀諸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또 정약용의 장남인 정학연(丁學淵)과 개화파 인물인 강위(姜瑋)·박규수(朴珪壽) 등과 폭넓게 교유하여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1843년(헌종 9) 전라도우수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격동이 예고되는 시기에 고위 군사지휘관으로 있었던 만큼 유명무실한 국방 체제의 구축과 신무기 개발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병인양요로 서양 무기의 우월성에 충격을 경험한 이후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여 정약용이 제기한 민간 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발전시킨 서적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비한 그의 노력은 군사관계의 또 다른 분야인 지도 제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즉, 조선 후기 신경향의 축적식 지도 제작의 집대성에 해당하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제작에 정부 소장의 각종 자료를 제공하여 편의를 도모하였다.


[저술 및 작품]
직접적인 국방 전략과 관련된 저술로는 다산 정약용이 『민보의(民堡議)』를 통해 제시한 농민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발전시킨 저술인 『민보집설(民堡輯說)』이 있으며, 훈련대장 재직 시절에 서양식 화포 기술을 응용하여 만든 수뢰포 등에 대해 정리한 병서로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說)』·『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機械圖說)』 등이 있다. 또한 1876년 전권대관으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의 협상 전말을 『심행일기(沈行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신헌은 농법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농축회통(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저술하였는데, 이 또한 민보방위책이 민보를 단위로 하는 농민자위체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국방 대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당대 시서화(詩書畵) 및 금석학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로부터 시도(詩道)·서예 및 금석학(金石學) 등을 배워 시서에도 능했고, 특히 예서(隷書)에 조예가 깊었으며, 묵란(墨蘭)을 잘 그렸다. 또한 금석학과 관련해서는 현전하지는 않지만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이라는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묘소]
강원도 춘천시 북중면 유점리 평산신씨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고종실록(高宗實錄)』 
『매천야록(梅泉野錄)』 
『상산지(常山誌)』 
『일성록(日省錄)』 
『철종실록(哲宗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인물지』 (충청북도, 198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인물대사전』(중앙M&B, 1999)
『(국역) 상산지(常山誌)』 (상산고적회, 2002)
박찬식, 「신헌의 국방론」(『역사학보』117, 역사학회, 1988)
강미영, 「19세기 중엽 조선정부의 개항인식과 강화도조약 체결」(인하대학교 석사논문, 1988)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보 출처-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