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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방선(柳方善)

Bawoo 2017. 9. 20. 22:18




류방선(柳方善, 1388년 ~ 1443년)은 조선학자이다.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할아버지는 관찰사 류후(柳厚)이고, 아버지는 류기(柳沂)이며, 어머니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의 딸이다.

생애

1405년(태종 5)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409년 아버지 류기(柳沂)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된 것으로 연좌되어 서원(西原)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영천에 이배되었다. 1415년 풀려나 원주에서 지내던 중 참소로 인하여 다시 영천에 유배되어 1427년(세종 9) 풀려났다. 유배생활중의 학행이 높음이 드러나 조정에서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주부(主簿)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2세 무렵부터 변계량(卞季良)·권근(權近)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특히 유배생활중에는 유배지 영천의 명승지에 ‘태재(泰齋)’라는 서재를 짓고 당시에 유배 또는 은둔생활을 하던 이안유(李安柔)·조상치(曺尙治) 등 문사들과 학문적인 교분을 맺고, 주변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이보흠(李甫欽) 등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원주에서 생활하던 동안 서거정(徐居正)·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강효문(康孝文) 등 문하생을 길러내었으며, 특히 시학(詩學)에 뛰어났다. 경현원(景賢院)과 영천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태재집》이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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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서산.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아버지는 서령부원군 기(沂)이고, 어머니는 이색의 손녀이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어 신동으로 불렸으며, 당대 문장과 이학으로 이름이 높던 변계량·권근 문하에서 총애를 받았다.

1405년(태종 5) 국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1409년(태종 10) 아버지가 민무구의 옥사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서원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영양으로 이배되었다.

1415년 잠시 풀려났으나 다시 모함을 받고 유배되어 1427년까지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중 학행이 뛰어났다고 하여 주부(主簿)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했고, 세종은 집현전 학사를 보내고 스승 대우를 하는 등 각별히 아끼고 등용하려 했으나 병에 걸려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후진 양성에 힘써 서거정·이보흠 등 걸출한 학자를 배출했으며 이안유·조상치·이취·정거·최원도 등 경학에 밝은 선비들과 교유했다.

만년에는 〈주역〉에 심취했고, 산수화를 잘 그렸다. 그의 시는 음풍농월을 배제하고 성리학에 기반을 둔 천지, 만물, 인간사의 이치를 담아내는 데 치중했다. 당시 비서성(秘書省)에 소장된 〈여지록 與地錄〉 중에 16여 편의 시문이 실릴 정도로 문명이 높았으며, 시풍은 충담고고(沖澹高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송곡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태재집〉(5권 1책)이 전한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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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유방선(柳方善)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이다. 유방선의 고조는 태상경(太常卿) 유성계(柳成桂)이며, 증조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서녕군(瑞寧君)으로 봉해진 유숙(柳淑)이다. 조부는 관찰사(觀察使) 유후(柳厚)이고, 부친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종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내 서녕군(瑞寧君)에 봉군된 유기(柳沂)이며,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밀직사(密直司) 이종덕(李種德)의 딸이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철성 이씨(鐵城 李氏)로 양헌공(襄憲公) 이원(李原)의 딸이며,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진사(進士) 유윤경(柳允庚)과 대사간(大司諫) 유윤겸(柳允謙), 사위는 남양인(南陽人) 방준(房峻), 김해인(金海人) 김영견(金永堅), 진사(進士) 최영조(崔榮祖), 삼척인(三陟人) 김원신(金元信), 하양인(河陽人) 허식(許埴)이다.


[활동 사항]
유방선은 1388년(고려 우왕 14) 개성에서 태어났고, 1443년(세종 25) 봄에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방선은 변계량(卞季良)과 권근(權近)에게 경서의 뜻을 강문(講問)하였으며, 1405년(태종 5)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다.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獄事)에 관련되니 연좌되어 서원(西原)[청주]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경상북도 영천(永川)으로 귀양지를 옮겼다.

유방선은 영천 팔공산(八公山) 아래 송곡(松谷)에 두어 칸의 집을 짓고 ‘태재(泰齋)’라 편액하고 자연을 즐기며 읍중의 자제를 모아 부지런히 가르치니 사방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인근 고을에서 유배 혹은 은둔생활을 하던 이안유(李安柔)·조상치(曺尙治)·이취(李就)·정거(鄭擧)·최원도(崔元道)·윤통(尹統) 등과 도의로 교류하였다. 1415년(태종 15)에 사면되어 강원도 원주(原州)로 갔으나 참소를 입어 다시 영천으로 유배되었다.

1427년(세종 9) 특별히 사면되어 원주로 돌아가 명봉산(鳴鳳山) 법천사(法泉寺) 인근에서 학문 탐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조정에서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주부(主簿)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세종(世宗)이 집현전 대제학을 보내 질문하여 스승의 예로서 대접을 하였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5권 2책의 『태재집(泰齋集)』이 있다.


[묘소]
유방선의 묘소는 강원도 원주시 법천동(法泉洞) 명봉산(鳴鳳山)에 신좌(辛坐) 향으로 있다.


[상훈과 추모]
통훈대부(通訓大夫)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되고,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淸通面) 애련리(愛蓮里)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서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영천군지(永川郡誌)』 
『서산(서녕)유씨문희공파보(瑞山(瑞寧)柳氏文僖公波譜)』 


[지식연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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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본관은 서령[서산].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아버지는 유기(柳沂)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낸 이종덕(李種德)의 딸이다. 아들은 유윤경(柳允庚)과 유윤겸(柳允謙)이다. 유기는 태종이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보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봉된 후 서령군에 봉작되었다. 그러나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옥사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아버지의 죄로 유방선도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 때문에 서령 유씨 가문은 크게 위축되었다.


[활동 사항]
유방선(柳方善)[1388~1443]은 12세 무렵부터 변계량(卞季良)·권근(權近)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이 수재로 이름을 날렸다. 1405년(태종 5)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409년 아버지 유기와 함께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영천으로 옮겨졌다. 이때 태재(泰齋)라는 서재를 짓고, 이안유(李安柔)·조상치(曺尙治) 같은 유생들과 학문적인 교분을 맺었다. 또 유배지 인근 지역의 젊은이들을 가르쳐 이보흠(李甫欽) 등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1415년 유배 생활에서 잠시 풀려나 원주에서 머무르던 중에는 서거정(徐居正)·한명회(韓明澮)·권람(權覽)·강효문(康孝文)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곧 모함을 당해 다시 영천에 유배되었으며, 1427년(세종 9)에 이르러서야 귀양살이에서 완전히 풀려났다. 유배 중에도 유일(遺逸)로서 주부(主簿)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유방선은 아들 유윤겸과 조카 유휴복(柳休復)의 공부도 직접 챙겼는데, 이들은 곧 성장하여 1443년(세종 25)부터 대대적으로 펼친 『두시언해(杜詩諺解)』의 편찬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로써 서령 유씨 가문이 일신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유방선은 뛰어난 학문으로 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을 잇는, 영남성리학의 학통을 후대에 계승,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오랜 유배 기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이들은 곧 조선 전기 정국을 주도한 권신으로 성장하였다. 유방선은 시학(詩學)에 뛰어났으며, 특히 당나라의 대시인 두보(杜甫)에 정통하였다.

유방선의 저서로는 『태재집(泰齋集)』 5권 1책이 전한다. 『태재집』은 아들 유윤경·유윤겸 형제가 집에 보관되어 있던 음고(吟藁)를 바탕으로 편찬하였다. 이보흠·이경부(李敬夫) 등이 비용을 대어 1450년(세종 32) 영천 북습서당(北習書堂)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그 밖에 유방선의 시 10수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1702년(숙종 28)에 경상도 유림들이 뜻을 모아 유방선과 곽순(郭珣)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천에 경현원(景賢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서원의 이름을 송곡(松谷)으로 바꾸고 여러 인물을 추가로 제향하였다. 송곡서원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철거되었다가 1965년 다시 지어졌다. 현재는 유방선과 이보흠만을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필원잡기(筆苑雜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서산의 문화』 8(서산향토연구회, 1996)
『서산시지』 (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aks)


[지식연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유방선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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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장편소설: 그대, 비해그대, 비해 ]